45화
나타난 사내의 외양은 무척이나 젊어 보였다.
하나 그럼에도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없었으니, 그가 바로 이 땅의 주인, 사천성주 이군학이었다.
‘저 녀석이…….’
약 이십 년 전, 지금의 당위혼과 비슷한 나이에 사천성주의 자리에 배정받아 이 땅의 혼란을 종식시켰다는 입지적인 인물.
그리고, 그런 사천성주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당유혼은 이내 고개를 돌려 곁에 서 있던 남자를 노려봤다.
‘새끼, 웃기는.’
그 곁에 선 채 자신에게 웃음을 던지는 이는 고관대작이나 입을 법한 고급스러운 복색을 입고 있다.
하지만 그 정체는 사실 누구보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왕.
‘사천성주까지 끌어들였다는 거지?’
하오문 사천지부장 하윤호가 복색을 고쳐 입은 채 시립해 있었다.
“사, 사천성주라고?”
“아니, 어째서 사자도왕이 여기에…….”
“아무리 용독문의 행사라지만…….”
웅성웅성.
그의 별호까지 부르며 수군거리는 군중들,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연무장까지 나아간 사천성주는 가볍게 단상 위로 뛰쳐 올랐다.
그리고.
“어디, 봐볼까.”
까닥―
허공 중에서 손장난을 치듯 손을 내뻗으니,
“오오……!”
“책이?!”
당위혼의 손에 들려 있던 노예 명부가 스르르 사천성주의 손길로 끌려왔다.
허공섭물(虛空攝物)!
고강한 내공을 쌓은 고수가 기(氣)의 움직임만으로 멀리 떨어진 사물을 움직이는 기예가 펼쳐졌다.
“흐음.”
가볍게 명부를 펼친 그는 촤르륵― 책장을 넘겼다.
내용을 읽는 건지, 마는 건지, 그냥 책장을 한 번 빠르게 넘기고 다시금 덮어버린 사천성주는 이내 고개를 돌려 당궁상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시선이 향하자 한차례 움찔거린 당궁상이지만, 이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성주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노야(老爺).”
그런 그에게 아는 채를 한 사천성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상처들을 보니, 우리 옛 추억이 떠오르는 듯하오.”
“…그렇습니까?”
“그렇소. 해서… 노야는 날 원망하고 있으시오?”
원망이라.
그 말에 당궁상은 조금 전까지 괴성을 질러대던 괴팍한 노인네에서 지난한 세월을 지닌 노인이 되어 우수에 젖은 눈을 감았다.
한 차례 깊은 침묵을 사천성주가 용인해 주는 사이, 다시금 눈을 뜬 그는 곧 고래를 저으며 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후후, 그리 말해 준다면 고맙군. 그대라면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하지만… 글쎄, 다시 만났을 때 노야에게 멱살을 잡히지 않으리란 확신이 없었거든.”
무엇이 재밌는지 껄껄 웃음을 터트린 사천성주가 고개를 돌려 엉금엉금 무대를 기어오르던 용제운을 응시했다.
움찔!!
조금 전 당궁상을 바라볼 때와는 다른 시선이 용제운에게 쏟아졌다.
그 시선에 용제운은 마치 호랑이 앞에 놓인 토끼와 같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서, 성주를 뵈, 뵙습니다…….”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하는 저릿저릿한 기세가 용제운을 내리눌렀다.
당유혼마저 불쌍하다는 듯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한 자리의 정점에 오른 이가 가진 패도(覇道)의 기세와 약물과 영약에 의존한 가짜가 아닌, 타고난 재능과 뼈를 깎는 노력으로 경지에 이른 진짜 고수의 내력. 저런 반푼이라면 피가 토해지는 고통이겠군.’
실제로도 그 시선을 바라보던 용제운은 얼마 견디지 못해 울컥 울혈을 토해냈다.
“커, 커억……!”
“무, 문주님!!”
“괜찮으십니까?!”
그제야 뒤늦게 달려드는 용독문도들을 바라보며 사천성주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문주, 몸이 좋지 않은가 보군.”
“아, 아닙니다……!!”
피를 토하면서도 허겁지겁 자세를 바로 하는 용독문주의 모습에, 좌중은 이 자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고작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음에도 남의 구역에 쳐들어 와 멋대로 그 자리를 차지해 버린 폭군(暴君)의 행사지만, 그 누구도 그에 반발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힘의 논리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무림이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럼 대충 정리는 다 된듯하고.”
사정없이 온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힘으로 찍어 누른 사천성주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마지막으로 걸음을 옮겨 이 상황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에게로 향했다.
“반갑군. 그대가… 당대의 사천당가의 가주인가?”
“…성주를, 뵙습니다.”
당가의 어린 가주 당위혼.
사천성주의 마지막 발걸음이 자신을 향하자 당위혼은 천천히, 당궁상이 했던 것과 같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정확히는 숙이려 했지만…….
덜컥―
무언가가 자신의 어깨를 잡아서 강제로 고정한 듯한 감각에 뻣뻣이 고개를 들고 두 눈을 성주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런. 사천의 패주가 함부로 고개를 숙여서야 쓰나.”
“…….”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감을 잡지 못한 채 사천성주를 묵묵히 바라보던 당위혼은 이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성주를 뵙습니다.”
선 채로 포권을 취하며 다시금 인사하자 그제야 사천성주도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초면이지만… 아주 부친(父親)과 꼭 빼닮았어.”
“선친(先親)을… 아십니까?”
“모를 수가 있나. 그와는 아주 막역한 사이였다네.”
“…….”
그 말에 당위혼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할 말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오히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심정을 이해라도 한다는 듯 사천성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그렇게 보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내게도 사정은 있거든.”
사정이라고?
그 말에 당위혼은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무어라 말하려 할 때,
“사정이라…….”
누군가 마치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으니.
‘아……!!’
그 정체를 굳이 떠올리려 노력할 필요도 없이,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 잘난 사정이 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성주.”
뒤틀리고, 비비 꼬여서 똬리 튼 뱀보다 더욱 응어리진 물음이 장내에 울려 퍼지자 모든 군중들이 흠칫 놀라 그 목소리의 진원지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혀, 형님……?!’
조금 전까지 치솟던 모든 감정이 당황과 당혹으로 뒤바뀐 당위혼이 서둘러 그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아, 비켜. 이 새꺄!”
“으악!”
이미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고 있던 방계들의 안면을 걷어차며 화려하게 등장한 당유혼의 모습을 보니 머릿속의 무언가가 뚝― 끊기는 수준이 아닌, 하얘지는 기적을 느꼈다.
‘망…했다.’
실로 일관성 있게 무대 위로 오른 의형을 바라보며 어린 사천의 가주가 두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낄 때, 젊은 사전의 패주는 오히려 흥미롭다는 시선을 던졌다.
“그대는 누구신가?”
“당유혼. 사천당가의 한낱 직계 나부랭이옵니다.”
그 이름 석 자가 내뱉어지자 사천성주는 순간 흠칫― 하는 반응을 보였다. 당연, 그 무례를 넘어서 죽여 주십쇼, 하는 태도 때문은 아니었다.
“…좋은, 아주 좋은 이름을 가졌군.”
“칭찬이십니까?”
“칭찬이지. 자네가 과연 그 이름의 뜻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아련한 기색마저 보이는 사천성주의 모습에 당유혼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비죽였다.
“뒈지면 썩어 문드러지고 잊힐 이름에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잊힐 이름……. 그래, 그렇지. 잊혀지고, 잊혀진… 이름이지.”
사천성주는 의뭉스러운 동의를 표하고는 이내 고개를 들어 난입자를 바라보았다.
“내 사정이 궁금하다고 물었나?”
“그렇습니다.”
그 잘난 놈의 사정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면 당장에라도 물어뜯겠다는 듯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보며 사천성주는 웃음을 흘렸다.
“훗, 미안하지만 그건 알려줄 수 없겠군.”
“…예?”
“내가 그걸 꼭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뭐라고, 이 자식아?’
“내가 뭐 하려고 이 자리까지 올랐는데. 나는 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 자리까지 올랐다네.”
“권력…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자네는 권력이 무엇인지 아는가?”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모를 수가 있나.
“남이 하기 싫은 것을 강제로 하게 하는 일. 그게 권력 아닙니까?”
“저, 저…….”
“미친……!”
무례를 넘어 오만에 이른 말투.
하지만,
“푸하핫!!”
정작 듣는 이는 즐겁기 그지없다는 듯 폭소를 터트렸다.
“걸작이군. 아주 잘 알고 있어.”
박수까지 치며 즐거워하는 남자.
하지만, 방계들 중 그 누구도 즐거워할 수 없기에, 허겁지겁 당유혼을 끌어내리려 단상 위로 뛰쳐 올라가려 할 때,
“허나.”
거대한 압력이,
“그 의미를 안다면.”
쿠웅―
“이런 것도 알았어야지.”
장내 모든 이들을 내리눌렀다.
“으아아악!!”
“끄어억?!!”
비명이 난무했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채 알아차리지 못해 눈치만 보던 군중들이 일제히 바닥에 쓰러졌다.
당유혼을 끌어내리려던 방계들은 물론이요, 조심스레 눈치를 보던 용독문주조차 그대로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 놀라운 현실에 군중들의 머릿속에 사천성주의 또 다른 이명이 스쳐 지나갔다.
‘사천 제일 고수……!’
권력으로 이미 사천의 정점에 올랐으나, 그 일신의 무위마저 저 오만한 사천삼주의 무수한 고수를 제치고 제일에 올랐다는 입지적인 인물.
그의 존재감이 퍼져나가자 군중들은 경배하듯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 와중에 부러져라 허리를 편 이는 오롯이 셋.
당가의 어린 대형 당유혼.
당가의 늙은 총관 당궁상.
그리고, 당가의 당대 가주 당위혼.
그들이라고 괴롭지 않은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정신력. 오로지 극기(克己) 하나로 버티고 선 그들을 돌아본 사천성주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타인을 짓밟고 그 머리 위에 서는 것. 그게 바로 권력을 쥔 자가 마땅히 취해야 할 위상이지.”
신음 소리 사이 유일한 웃음소리를 흘려 넣으며 걸어간 사천성주는 그렇게 어린 가주 앞에 서서,
“어떤가.”
사천의 주인은 또 다른 사천의 주인에게 물어왔다.
“부럽지 않은가?”
“…….”
무겁다. 질문 한 마디를 건넸을 뿐인데, 만근의 바위를 넘겨받은 것만 같았다.
허리를 짓누르는 이 괴로움은, 당장에라도 머리를 처박고 편해지고만 싶다는 미몽을 뇌 속에 심어왔다.
그러나,
까득―
입가를 붉게 물들일 정도로 입술을 깨물어 터트린 당위혼은 끝끝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흐음?”
흥미롭다는 반응, 그저 고개를 까딱거리는 독재자를 향해 당가의 어린 가주는 말했다.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부친께… 배운… 당가의 기치!”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고,
“힘으로 억압하지 않고… 품으로 끌어안는…….”
핏발 선 눈으로, 꿋꿋이 말하는 당가의 가주는,
“그것이… 감히… 이 땅의 이름을… 등에 진 자의… 의무… 입니다……!!”
끝끝내 자신의 품격을 드러냈으니…….
“큭…….”
그에 또 다른 사천의 주인은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 하하하하핫!!”
구우웅―
폭풍과 같은 기세가 옷자락을 사정없이 펄럭거리게 만들었다.
더더욱 강해지는 압력에 당위혼의 두 눈은 결국 핏줄이 다 터져 붉게 물들었고, 그런 그를 향해 사천성주는 한 걸음 더 성큼 다가가서는,
“인정하마.”
조금 전 기세가 거짓이었다는 듯, 싱긋―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예?”
내리누르던 압력이 씻은 듯 사라지고, 그 힘에 못 이겨 내리눌렸던 고개를 들었을 때 내밀어진 것은 한 권의 서책.
“이 사천성주의 이름으로 공인하지. 이 책의 내용이 전부 진실임을.”
그리 말한 사천성주는 책을 안겨준 뒤 곧장 몸을 돌리며 좌중을 향해 소리쳤다.
“사천의 주인으로서 명령하지. 주인의 곤란함을 틈타 등 뒤에 비수를 꽂고 도망친 종놈은 당장에 그 재물을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쩌렁쩌렁 외쳐가는 선언은 가히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다.
그들의 가주를 구하기 위해 엉금엉금 기어가던 방계들도 그 자리에 우뚝 멈출 정도였지만, 그나마 개중 머리가 잘 돌아가는 당율기만이 번뜩 소리쳤다.
“저, 정말로?!”
“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도 좀 알자!”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방계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그, 그러니까, 서, 성주님께서 인정해 주신 거야. 저, 저게 진본이라고!!”
“뭐?!!”
“지, 진짜로?!”
처음에는 침묵. 그러나 이윽고 하나둘 터져 나오는 함성.
기쁨에 젖은 방계들의 외침이 터져 나올 때,
“다만.”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 있던 사천성주는 당위혼을 돌아보며 첨언하듯 손가락을 세웠다.
“반은 내놓아야 되는 거 알지?”
“허…….”
“왜, 싫어?”
마찬가지로 멍하니 있던 어린 가주는 그제야 퍼뜩 놀라 고개를 숙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흐, 고개 숙이지 말라니까.”
그렇게 뻣뻣하던 녀석이, 지금은 또 잘 숙이잖아.
“지배가 아닌 군림이라……. 기대가 되는군.”
그리 말하는 사천성주는 자신이 만들어 낸 폭풍의 잔해를 지나 퇴장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당유혼은,
‘…새끼. 지 혼자 멋진 척이야.’
두 손 가득 잔뜩 들었던 젓가락들을 다시금 품으로 훔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삼십 년 전이었으면 한주먹거리였을 놈이.’
그래도 뭐.
‘성공이기는 성공이네.’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