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 *
사천당가.
평소 파리만이 날리던 그들의 장원 입구는 어마어마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관아에 소속된 짐꾼들이 연신 짐을 실어나르고 있었고, 항상 비어있던 곳간이 차곡차곡 차올랐다.
“오오오오!! 고, 곳간이 차오르고 있어!!”
“쌀이야! 그동안 먹던 잡곡이 아니라 순수하게 쌀로 차오르고 있다고!!”
광야에서 기적을 보기라도 한 듯 광신도처럼 비명을 질러대는 방계들이 한 무리.
“이것 봐, 오독초야!! 젠장! 이건 청두사의 독낭이고!”
“거짓말이지?! 사천에서는 못 보는 독초들이 우리 창고에 쌓인다니?!”
두 손을 모으고 무릎 꿇은 채 눈물을 주룩주룩 흘려대는 것들이 또 한 무리가 있었으니.
“무공… 무공이야!! 젠장!! 실전된 무공서들이야!!”
“드, 드디어 차양십이수가 아닌 다른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거야?!”
기쁨에 찬 방계들이 감격에 찬 함성을 내지를 때,
“웃기고 있네.”
꽈아아앙!!
“끄에에엑!”
소음공해에 분노가 터진 이웃집 주민의 방망이질과 같은 손길이 그들의 흥분을 진압해 버렸다.
“대, 대형?”
반쯤 집을 떠났던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
찬물을 퍼붓는 듯한 기세가 목을 죄어왔다.
“새 무공? 새애애애 무고오오옹? 이 새끼들이 빠져가지고, 기지도 못하는 것들이 벌써 날려고 들어?”
“아, 아닙니다!!”
“저, 저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저놈이 문제예요!”
칼 같은 손절각을 잡는 뜨거운 가족애.
‘아이고, 두야…….’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새끼들을 맡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당유혼은 눈 위를 손으로 턱 짚었다.
‘이 철없는 아기 새 같은 것들. 애비 새는 기껏 밖에 나가서 먹이를 잡아 오니까 지들 입에 처먹여 달라고 지저귀는 것밖에 못 하네?’
참교육이 필요하다.
사냥을 위한 비행이 얼마나 어려운지. 애비 새 된 도리로서, 둥지 밖으로 직접 걷어차 줄 그런 참교육이!!
“쌀밥은 얼어 죽을. 니들은 먹던 대로 처먹어.”
“예, 예?!”
“이,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먹는 것 가지고 협박하다니!
그 무도한 폭거에 차양당의 당주이자 방계들의 대표 당지명을 의연히 일어섰다.
‘오오, 형님!!’
‘당주 형님!!’
역시, 평소에는 동네 개 잡듯 처맞고 살아도, 할 때는 해주는구나 싶은 시선들이 빗발칠 때.
“말도 안 되기는, 이놈 자식아!”
“꺄울!!”
벼락같은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혀, 형님?”
그리고 당황하는 방계들 사이로 콧김을 뿜어내는 늙은 총관이 등장했다.
“이 밥버러지 같은 놈들이. 뭐? 싸아아알바바아아압? 싸아아아아아아알바아아아아아압?!”
…망했다.
당유혼이 등장하기 전 원조 당가의 매운맛. 당궁상의 등장에 방계들을 날아갔던 당지명까지 허겁지겁 모여 이 열 종대로 집합했다.
“차양 당주!”
“옙! 차양 당주 당지명!”
저벅저벅.
가장 선두에 선 당지명 앞으로 당궁상이 천천히 걸어갔다.
…꿀꺽.
두렵다.
동공이 파르르 떨리는 걸 애써 참고 있을 때, 서로의 숨결이 맞닿을 거리까지 다가가 선 당궁상이 속삭이듯 말했다.
“당주. 쌀밥이 먹고 싶다고 하셨소?”
“그, 그게…….”
격식이 차려진 물음은 막말을 내뱉는 것보다 더더욱 소름이 끼쳤다.
“그러니까… 그, 그게……!!”
다급히 주변을 돌아본다.
누구라도 좋으니 나 좀 구해 줘! 라는 시선이 열심히 주변을 향하지만,
‘…아 이 개자식들…….’
평생을 함께했던 가족이란 것들은 이미 다섯 걸음씩은 멀찍이 물러서 있었으니…….
“당주.”
“네, 넵?!”
“쌀밥이 먹고 싶으냐 묻고 있잖소.”
“그, 그게… 그러니까… 저, 저는…….”
“후후, 괜찮소.”
턱턱―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과 푸근한 미소.
그리고,
“다만. 옛말에 이런 말이 떠오르는군. 일하지 않는 자는 밥벌레다.”
“…흡?!”
그딴 말은 처음 듣는다고 말할 겨를 따윈 없었다.
“그리고…….”
턱―
어느새 운반 중이던 무공 서적 하나를 주워 든 당궁상이 차갑게 식은 눈으로 책자를 훑었다.
“새로운 무공을 익히고 싶다 하셨소?”
“저, 저는… 그저…….”
“무공을 익힌다……. 좋지. 이 쓸모없이 늙어빠진 몸뚱이를 가진 노인네보다야 한 살이라도 젊은이들이 새로운 무공을 익히는 게 좋지. 한데…….”
찌릿―
“그 무공을 익혀서… 어디 쓰려고 하는 것이오?”
싸늘하다.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무공을 익혀서 강해지려는 건,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여기 있는 방계들 중 지난 용독문의 개파 대회에서 제 할 일을 한 이가 누가 있을까?
용독문의 군사 채용을 상대로 물러서지 않고 맞상대했던 당궁상.
용독문의 문주 용제운에게 사정없이 두들겨 맞으면서도 끝끝내 승리를 쟁취한 당위혼.
그 과거의 행적 앞에 당가의 방계들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으니, 그 누구도 여기서 입을 열 수는…….
“에이, 왜 애들 기를 죽이고 그래요?”
…있구나?
“가뜩이나 모자란 놈들인데, 그렇게 기를 팍팍 죽여서야 애들이 제대로 자라겠어요?”
‘혀, 형님?’
‘역시…….’
‘지가 먼저 시작했으면서!!’
유일하게 이곳에서 죄가 없는 사람.
그리고 무려 사천성주의 면전에서 대들었던 당유혼이 거들먹거리며 끼어들자 방계들을 쥐잡듯 쪼아대던 당궁상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뭐, 그렇다고 우리 총관님 정책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찰랑―
“…뭐냐?”
“뭐긴 뭐겠어요. 곳간 열쇠지.”
내밀어진 열쇠 꾸러미에 당궁상의 눈에 의심이 잔뜩 끼었다.
“지금까지처럼 하던 대로 잘해 달라고.”
어쩌면 조금은 예민한 문제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을 때는 몰라도, 이제 당가의 곳간에 재물이 차오르게 된다면 욕망은 자연스레 피어난다.
그런 상황에서 당궁상과 당유혼의 마찰은 분란의 시초가 될 수 있으니, 이정도면 당유혼이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격이었다.
“…흥.”
그 뜻을 모를 수 없는 당궁상은 짜증스럽게 열쇠를 받아 채고는,
“차양 당주!”
“네, 넵!!”
조용히 방계들 사이로 숨어들려던 당지명을 호출했다.
“돼지와 소를 잡으시오.”
“네, 넵?”
“못 들었소? 돼지와 소를 잡고 물을 끓이시오.”
“어, 어째서…….”
덜덜 떠는 그에게 당궁상은 떠나가며 말했다.
“어쨌거나 기쁜 날인 건 사실이니까. 조금은 즐겨도 되겠지.”
“어…….”
“그러니까…….”
그 말뜻을 이해한 건 당궁상이 완전히 떠나고 난 뒤.
이윽고,
“오오오오오오, 그럼!!”
“잔치다!! 연회다!!”
“풍악을 울려라!!”
당가가 떠나가라 함성이 울려 퍼졌다.
‘자식.’
그 모습을 지켜보든 당유혼은,
‘멋있는 척하기는.’
조금은 펴진, 그러나 아직도 비비 꼬인 웃음과 함께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 * *
그리고 당유혼이 다음으로 발길이 향한 곳은 당가에 버금가는 축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 하오문 사천지부였다.
“아이고, 오셨습니까요!”
허리가 부러져라 숙이지만 아프지 않다. 두 손에 불이 나도록 비벼대지만 기쁘다!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행복 지부장 하윤호의 인사에 당유혼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꼬롬해졌다.
‘왜 난 이놈이 기뻐하면 심사가 뒤틀릴까.’
순수 악의 기질을 내비치는 당유혼이지만, 일단은 안내받은 자리에 앉았다.
“헤헤, 어떻습니까요?”
“뭐가 어때?”
“에이. 뭐긴 뭐겠습니까요. 사천성주를 이 판에 끌어들인 제 수완이 말입죠.”
슬그머니 공을 자랑하는 하윤호.
그에 당유혼은 비죽 입꼬리를 틀었다.
“웃기고 있네. 누굴 봉으로 알아?”
“…쩝, 역시, 너무 티가 났습니까요?”
“아무렴. 이 판에서 제일 이득 본 놈이 누군데.”
용독문이 개 박살이 나고, 그곳에 투자한 사천삼주는 사천에 흐르는 강물의 수온을 확인해 봐야 할 이 시국에 가장 이득을 본 이는 누구인가.
그건 당가도, 하오문도 아닌 사천성주였다.
“우리가 발에 땀 나도록 뛸 동안 놈은 설레설레 산보하듯 남의 집 잔치에 와서 재산의 반을 털어갔지. 게다가…….”
“사천무림의 총력이 반으로 깎였습지요.”
흔히 사천의 세력도를 나타낸다면 청성, 점창, 아미의 사천삼주가 있고 그들의 대전사인 용독문과 하오문의 대전으로 그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정확히 말해 사천의 무림 세력의 표현이고, 그 외에도 관(官)의 존재가 있었다.
“예전부터 사천은 골때리는 곳이었지. 다른 성도보다 넓다고는 해도, 과도할 정도의 세력이 집약되어 있어서 서로 치고받고 하는 곳이었으니까.”
때문에 그들을 조율해야 하는 사천성주는 보통 인물일 수가 없었고, 대대로 어떻게 하면 무림이라는 무법 도검 소지자들을 조질 수 있나 궁리해 왔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로 사천삼주는 크게 데였지. 수십 년간 키워오던 용독문이 개 박살이 났고… 네 녀석은 또 그들에게 빚을 졌겠지.”
“쩝, 뭐든 공짜일 수는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요?”
사천성주 옆에 서 있던 하윤호.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별로 중요치 않다. 하오문의 고위 인사라면 누구나 가지는 여러 가지 가짜 신분 중 하나일 테니까.
문제는, 그 대가로 하오문이 관에 빚을 졌다는 것.
“관에는 뭘 얼마나 가져다 바친 거냐?”
“성주가 말한 대로 입니다요.”
“…진짜 용독문의 반을 다 갖다 바쳤다고?”
“어차피 못 먹는 것이지 않겠습니까요.”
“젠장. 배가 아파오려 하는구만.”
용독문이란 거대한 세력이 붕괴되며, 그 아래 깔려 있던 온갖 이해관계들이 함께 무너져 내렸다. 대외적으로 그들이 관리하던 사업체라든가, 비밀 장부에 적혀 있던 각종 재물과 인명록 따위가 바로 그러했다.
그리고 그걸 하오문이 사천성주가 소화하기 쉽도록 열심히 조력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 새끼, 날로 먹으려 하면 배탈 나는 거 모르나?”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요? 그리고 그만한 그릇도 되는 인물입니다요.”
“쯧, 그렇겠지. 그래서 더 궁금한 거야.”
대체, 그런 놈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말해 봐. 그건 진짜 뭐 하는 놈이야?”
“사천성주 말입니까요?”
“그럼 딴 놈이 있겠냐?”
“흐음… 가장 유명한 말은 이것입니다요.”
사천성주를 소개할 때 가장 앞서 붙는 말.
“천하 십 대 고수. 그는 현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는 열 명 중 한 명입니다요.”
“뭐? 그 새파랗게 어린놈이?”
“…….”
뭐라고 하는 걸까, 이 양반은.
뇌가 정지되는 듯한 말이지만, 하윤호는 가뿐히 흘려넘기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첨언했다.
“그리고 이건 정설은 아니고 소문에 불과하기는 한데…….”
“소문? 뭔 하오문 지부장이란 놈이 소문을…….”
“그가 삼십 년 전 사천성주의 사생아라는 말이 있습니다요.”
“…그, 새파랗게 어린놈이……?”
같은 말이지만, 두 번째 반문은 말의 온도가 달랐다.
삼십 년 전의 사천성주. 그러니까, 전전대의 사천성주라면… 당유혼도 모르지 않는 이름이었으니까.
“역시 소협도 알고 계십니까요. 예, 역대 제일의 사천성주라 불리던 그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고 있습니다요. 뭐, 그 역시 황족의 핏줄이었던 만큼 황가의 소문은 저 역시 쉽게 사실 확인을 할 수는 없지만…….”
무려 지부장쯤 되는 이가 말하는 소문이라면 아주 근거 없는 말은 아닐 터였다.
‘…녀석의 아들이라.’
사천성주는 사천에 황궁의 지배력을 공고히 해야 하는 지난한 자리. 그리고 삼십 년 전의 사천에는 다름 아닌 전성기의 사천당가가 있었다.
‘그렇다면…….’
과거의 기억을 되짚던 당유혼은 이내 저번 용독문의 개파 대회에서 사천성주가 보인 행보들을 떠올리고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충 알겠군.”
“필요한 설명이 되었습니까요?”
“다른 건 몰라도, 녀석이 당분간 이 판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것은 알겠다.”
그것만 알면 되었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당유혼을 향해 하윤호가 물어왔다.
“조력이 필요하겠습니까요?”
“됐어.”
찾아올 때와 같이 휘적휘적 몸을 일으킨 당유혼은 문득 창가의 앞에서 멈춰서 당가가 있을 방향을 응시했다.
한동안 물끄러미 그쪽을 바라보는 그에게서 넋두리 같은 게 흘러나왔다.
“한창 잔치가 벌어지고 있거든. 우리 같은 것들이… 감히 어울리지 못할 그런 축제가 말이야.”
빛에서 멀어져 점점 어둠으로 스며들며, 그는 말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축제를 즐겨야겠지.”
피비린내 나는 축제가, 추악한 악취를 풍기며 반겨오고 있었다.
당가와 하오문의 잔치 분위기였다면, 어딘가는 초상집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