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네가 왜 거기서 나와? 】
용독문을 박살 내고, 그들이 훔쳐 간 사천당가. 단순 재물뿐 아니라 사업체까지 품에 넣은 그들은 다시금 비상할 날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 꿈이 깨지는 데는 불과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예? 사업체에 물건을 대려는 상행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상행뿐만이 아니다. 단순 물건 운송을 해줄 표국들까지 표물을 맡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더군.”
당가의 회의실.
근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명무실하던 곳이었지만, 그래도 당가가 부활을 꿈꾸며 어느 정도 구색이라도 맞추기 위한 회의가 열려왔다.
그리고 그중 차양당의 대표로 참석한 당지명은 참담한 표정의 당궁상의 말에 충격을 받아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주인이 바뀌었다고 텃세를 부리는 겁니까? 그럼 돈을…….”
“이미 원래 금액의 이 할을 더 붙여 준다고도 해봤다. 하지만, 아예 세 배의 금액을 불러 버리더군.”
“…거래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잖아…….”
갑자기 왜?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당지명에게 당유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아. 이제 시작이라고.”
“형님은… 무엇이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쯧쯧, 지명아. 너도 당주라는 놈이 머리 좀 굴리고 판을 크게 볼 생각을 해라.”
입술을 삐쭉 내밀고 억울함을 표하고 싶은 당지명이었으나, 그랬다가는 주둥아리를 처맞을 것 같아 얌전히 되물었다.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만.”
“너는 우리가 누구를 물 먹였는지 기억이 안 나냐?”
“그야 용독문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이미 망했… 아, 설마?”
당연하게도 저 씹어먹을 용독문을 떠올리던 당지명의 머리에 연쇄적으로 다른 집단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용독문의 뒷배. 그러니까…….
“사천삼주… 설마, 그들이 우리를 훼방 놓고 있다는 말입니까?”
“훼방이라고 하면 깜찍한 표현이지. 정확히는, 우리를 말려 죽이려 하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아니……!!”
뭐 이렇게 치사한 놈들이 다 있어?
“그 자식들… 정파란 놈들 아닙니까? 암만 우리가 게네들이 하던 걸 방해했다지만, 원래 우리의 것을 받아온 건데 어찌…….”
“그래. 그래서 대놓고 쳐들어 오지는 않고 이렇게 간접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거야.”
사천이 제아무리 넓어도 모든 걸 자급자족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외부의 물품을 들여오고 또 가문의 특산물 등을 밖으로 팔아야 하는데, 사천삼주가 그 물류의 흐름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에 분노한 당지명은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비겁한!!”
글쎄다, 보통 그런 걸 현명하다고 말한단다.
당유혼은 굳이 당지명처럼 열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라고 마땅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놈들이 용독문을 하룻밤 만에 밀어버린 게 나라는 것까진 모르겠지. 다만, 그런 변수가 있다는 것 자체를 경계하고 아예 싸움 자체를 벌이지 않고 있는 거야.’
정파라는 위선자 소굴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당유혼인 만큼, 그놈들이 뒤에서 모략질하는 데 도가 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미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음에 그저 팔짱을 낀 채 인상만 찌푸렸고,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당위혼이 물어왔다.
“형님. 방도가 없겠습니까?”
“글쎄다.”
사실 마음 같으면 쳐들어가서 다 쓸어버리고 싶다.
아미파의 비구니든 나발이든 그 반질반질한 대머리를 목탁처럼 땅땅 뚜들겨 주면 이 거지 같은 포위망을 풀지 않을까?
하지만…….
‘내 몸 상태가 말이 아니란 말이야.’
지금이야 침상에서 일어나 움직이고는 있지만, 사실상 걸어 다니는 반송장이나 다름없다.
기껏 쌓아놓은 독기는 마기를 제거하는 데 다 써버렸고, 혈도는 마기의 후유증으로 너덜너덜했다.
이런 상태로 사천삼주에 쳐들어 간다?
‘입구에서 개처럼 처맞고 돌아오겠지.’
쩝, 별수 있나.
“당분간은 사려야지. 다행히 사천이 좀 번화한 곳이 아닌 만큼 내부의 물자 공급만으로도 반년 정도는 버틸 만할 거다. 그사이 할 수 있는 것에 전념하는 게 최선이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저 녀석들.”
“저, 저 말입니까?”
척― 하고, 자신을 가리키는 손길에 당황한 당지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그동안 그렇게 키워놨더니, 이번 용독문에 가서 말 한마디 똑바로 못하고 말이야. 그런 주제에 새 무공을 익히겠다고 좋아해?”
“그, 그건……!!”
당유혼은 당지명의 죄책감을 푹푹 찔러대며 선언했다.
“오늘부터 지옥 훈련이니까 그렇게 알아둬.”
“이, 이럴 수가…….”
세상이 끝난 듯한 표정으로 절망하는 당지명. 당유혼은 그런 그 모습에 코웃음을 치고는 뒷머리를 손으로 받치며 생각했다.
‘진짜로, 어디 상단 하나 안 떨어져 주려나?’
어디 대청마루에 누워서 누군가 떡 하나 입에 안 넣어주나, 싶은 생각을 할 무렵.
똑똑똑.
“가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손님? 여기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손님이 찾아와?’
“안으로 들어오거라.”
드르륵―
당위혼의 허락이 떨어지고, 문이 열리며 방계 하나가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손님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더냐?”
요새 당가의 사정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막말로 사천삼주에 찍혔다는 걸 모를 수가 없으니, 누구라도 당가와 얽히려 들지 않는다는 게 가장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손님이라 할 만한 이가 찾아왔음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방계 역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듣기로는 저 먼 곳에서 오신 상단의 단주님이라십니다.”
“…상단?”
“…단주?”
갑자기?
다들 의아해하는 와중, 당유혼만 설마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
“그분 말씀으로는… 광형 상단이라고…….”
아니,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진짜 하늘에서 상단이 떨어지네?
* * *
광형 상단.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그곳은 한동안 무지하게 바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 홍연이 남긴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들이 있던 황산현 뿐이 아니라, 감숙 전체로 뻗어나가려던 홍연의 영향성을 덜어내는 것은 꽤 지난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끝, 끝이다!!”
“이 지긋지긋한 녀석, 드디어 완전히 패퇴했구나!! 하하핫!!”
마침내 광형 상단으로 모여든 수많은 감숙의 인재들과, 긴 시간 쌓여온 재력을 아낌없이 투자한 광형 상단의 노력으로 홍연의 그림자를 완전히 거둬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되자 남은 이들은 기쁨과 동시에 그 다음을 논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 뭐하지?”
“집으로 돌아가야지?”
“집이라...”
맞는 말이기는 했다.
감숙 여기저기서 모인 이들인만큼, 할 일 다 했으면 귀향하는 게 맞았다.
그렇지만, 입의당(立義堂)의 이름 아래 모인 그들은 자신들이 무언가 하나를 해냈다는 기쁨과 그 무리와 규모에서 오는 무형의 무언가에 잔뜩 취해 있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럼 뭐하자고?”
“은혜를 갚자.”
“은혜? 누구? 아, 설마...?”
전염병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던 고집쟁이들!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단주, 광세운에게 한 데 모아 전달했고 그 의지를 들은 광세운 역시 두 눈에서 정광을 밝하며 소리쳤다.
“맞는 말씀들입니다! 사람이 은혜를 잊어서야 금수와 다를 바가 없지요!”
그 외침과 함께 광형 상단 전체의 다음 행동 방향이 결정지어졌다.
그리고,
“음… 광운대주?”
“말씀하십시오, 단주님.”
“여기가… 저희가 찾던 곳이 맞겠지요?”
“일단은… 편액은 그리 쓰여있는 듯합니다만…….”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광세운은 낡아빠진 편액이 달린 문 앞에서 우두커니 멈춰 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넓기는 엄청나게 넓은 장원에 반해 입구에 걸린 것은 반파된 편액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아직 당가가 돈이 없어서가 아닌, 오히려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벌었기에 특제 편액을 주문, 제작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라는 뒷사정이 있어서이지만, 그걸 모르는 광세운으로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폐가가 아닌가…….”
눈앞의 모습에 무척이나 당황해 들어가지도, 주인을 부르지도 못하고 있을 때,
“응? 누구쇼?”
그 다 쓰러져 가는 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그 누군가의 몰골은 허물어져 가는 대문만큼이나 엉망진창이었으니, 머리는 산발이요, 옷은 쭈글쭈글해서 어디 거지새끼 하나가 먼저 동냥 받으러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안녕하십니까? 광형 상단의 단주, 광세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광세운이 먼저 예의를 갖추고 인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은 작고한 아버지로부터 뇌리에 뿌리가 박히도록 주입된 교육 덕분이었다.
“엥? 단주? 그거 엄청 대단한 것 아니오?”
그리고, 그의 인사에 웬 소란인가 싶어서 수련 중 밖으로 나왔던 당가의 방계, 당불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예? 대단하다니요?”
“수레 가득 산더미 같은 재물을 쌓아서 이 지역, 저 지역 돌아다니며 거래를 하는… 그 엄청나게 손이 큰 양반들이 단주 아닌가?”
“아니, 뭐…….”
그렇게 말하면 또 틀린 말은 아닌데…….
광세운이 부정은 하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평소 돈 많은 사람이란 곧 대단한 사람의 이음동의어의 공식을 가지고 있던 당불퇴는 신기해하며 소리쳤다.
“캬, 부럽구만.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신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건가 싶어 묻자, 광세운은 광운대주와 잠깐 시선을 교환하다 입을 열었다.
“혹시, 이곳에 당유혼이란 분이 계십니까?”
“…엥? 뭐야, 설마… 대형을 찾아온 분들이셨습니까?”
당유혼이란 말이 나오자 태도가 싹 달라졌다.
“대, 대형?”
“아닙니까? 그 개 같…이 아니라, 훌륭한 이름 석 자를 쓰는 사람은 사천 땅에 우리 대형밖에 없을 텐데.”
조금 전에 분명 욕을 한 것 같았는데……?
자신의 청각 건강 상태를 의심하려던 광세운은 애써 자신의 기억을 소거하기로 결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듯합니다. 그분이 맞다면 광형 상단의 단주 광세운이 은을 갚기 위해 찾아왔다 전해 주십시오.”
제발, 그 양반이 이 거지무리의 왕초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광세운은 처음 봤을 때, 아무런 옷도 입지 않고 있었던 게 어쩌면 설마…라는 생각이 드는 걸 애써 무시하며 그리 말했다.
“아, 그럼 안에서 기다리시죠. 귀한 손님밖에 세워둘 수도 없으니.”
어쨌거나 이게 며칠 만에 보는 손님인지, 당불퇴는 그저 좋다고 헤실헤실 웃으며 그들을 받기로 결정했다.
“아직 저희의 신원 확인이 안 됐는데도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에이, 괜찮아요. 우리 대형도 처음에는 다 그랬는데요, 뭘.”
입구에서 당궁상과 멱살잡이를 했던 게 그들의 대형이니, 좋은 말로 인사하며 방문한 이들을 세워둘 수가 있을까.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그리하여, 광세운과 광형 상단은 당가의 안으로 입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