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선행을 베풀면 호구가 될 뿐이라, 당유혼은 줄곧 그런 생각해 왔다. 하다 못 해 당사명이 선행을 베풀면 복을 받는다고 말할 때도 입술 삐쭉 내밀며 ‘내가 왜?’라고 하던 게 그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당유혼은 다시 한번 자신의 훌륭한 동생 당사명의 옳음을 인정했다.
‘캬! 이게 돌아오네!’
길 가다가 만난 어느 표국주의 아버지를 치료해 주고, 돈 없는 거지새끼들의 문파에 들어와 뼈 빠지게 일하고, 천하의 나쁜 새끼들을 두들겨 패서 환경 미화에 일조하기까지.
그야말로 하늘도 감격할 선행을 베풀길 연속하니, 진짜로 하늘에서 상단 하나가 뚝 떨어졌다!
‘이렇게 감사할 일이!!’
정말로, 잘 먹겠…….
“…저, 소협. 왜 군침을 흘리십니까?”
“…쓰읍. 허허, 무슨 소리를 하시나. 우리 단.주.님?”
다시금 현실로 되돌아온 당유혼의 앞에 있는 것은 당가로 들어오자마자 반쯤 납치되다시피 가주실로 끌려와 착석 당해 차마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광세운.
새끼 양과 같이 떨리는 눈망울로 연신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그는 현재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그에,
“…후우.”
보다 못한 당가의 양심, 당위혼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본가를 찾아주신 손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사천당가의 가주, 당위혼입니다.”
“예? 아… 옙. 광형 상단의 단주, 광세운입니다.”
뭔가 참 많이 늦은 듯한 인사가 오갔다.
“듣자 하니, 형님께서 본가에 오기 전 귀 상단에서 신세를 많이 졌다 들었습니다만…….”
“예? 아, 아닙니다! 제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고럼! 고럼!”
당유혼의 턱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형님께서 그때 떠나오며 여비로 받은 액수가 한둘이 아니라고…….”
“아닙니다! 본 상단의 단주님께서 덕분에 떨쳐 일어나셨고 그에 감사를 표했을 뿐입니다! 이는 제 개인적인 은혜 역시…….”
“고러치! 고러치!”
당유혼의 턱이 거의 지면과 수직이 되었다.
“…그 외에도 이곳까지 형님께서 오실 수 있었던 것도 다 귀 상단의 도움 덕분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오히려 저희 상단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다…….”
“캬아……!!”
‘야야, 저것 좀 말려봐라.’
‘턱으로 아주 천장을 뚫겠는데?’
결국 보다 못한 당위혼이 입을 열었다.
“형님.”
“어엉?”
“잠깐, 단주님과 둘만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조용히 있을게.”
시무룩해진 당유혼을 뒤로 하고, 어린 가주는 다시금 소단주를 응시했다.
“과례는 곧 비례라 하였습니다. 단주님과 형님의 말을 들어보니 서로 간에 받은 은원은 이것으로 마무리해도 될 것 같습니다.”
구태여 더 이상 연연하지 말자는 뜻, 그에 급해진 것은 광세운이었다.
“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입의당 선비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설테니까.
하지만,
“단주님.”
당위혼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단주님께서는 현재 본가의 상황을 알고 계십니까?”
이걸 말하는 것이 당가에 해가 되는 것은 안다. 그럼에도 당위혼은 당가의 가주이기에, 더더욱 말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입 밖으로 꺼냈다.
현 사천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지배한다고 봐도 무방한 사천삼주와 자신들의 관계를.
“그러니까…….”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고, 그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광세운은 무겁게 입을 뗐다.
“가주님의 말씀은… 당가의 현 상황이 좋지 않고, 괜히 저희가 그에 엮일까 우려가 되니 여기서 관계를 정리하고 돌아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귀 상단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굳이 저희에게 얽힌 복잡한 은원까지 엮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허…….”
광세운은 차마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다.
만약 여기 온 것이 개인이었다면, 광세운은 그런 것에 연연치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따라 행동했으리라. 그리 배워왔고, 설령 그리 배우지 않았더라도 그의 마음이 그리 행동하게 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자신은 광형 상단의 단주로서 이 자리에 와 있다.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그 이득을 생각해야만 하는 자리.
그렇기에…….
‘…너무나 괴롭구나.’
상반되는 두 이해관계의 얽힘에 앓는 소리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에 한참을 괴로워할 때,
짝― 하고, 불편한 침묵을 깨는 경쾌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자, 자, 우리 단주님께서 고민이 많으시구만?”
“…소협?”
“내가 우리 단주님께 받은 은혜도 많은데, 이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야 없지. 우리, 일 하나 않으시려나?”
“형님.”
기껏 돌려 돌려 말했는데, 이리 말해 오는 당유혼의 모습에 당위혼도 조금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주.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겠는데, 그건 너무 물렁한 생각이야.”
다시금 어린 가주를 돌아보는 당유혼의 눈빛은 경쾌한 목소리와 달리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정파의 위선자들은 아주 간사한 새끼들이거든. 어떻게 하면 지들은 피해를 덜 보고 깔끔한 척, 착한 척을 할 수 있을까 하루 종일 그 생각밖에 안 하는 놈들이라고.”
“혀, 형님?”
우리도 명색이 정파인데요?
“그리고 그런 새끼들의 문제는 지들이 그러하니 남들도 다 지들 같다는 생각을 한다는 거야.”
즉.
“이미 본가로 저들이 들어온 이상, 사천삼주는 광형 상단을 곱게 보지는 않을 것이란 뜻이지.”
“아니, 그게 무슨…….”
어이가 없다는 듯 반응하는 당위혼이었지만,
“가주님. 말도 안 된다 생각하시겠지만… 이번은 저 녀석의 말이 맞습니다.”
가만 듣고 있던 당궁상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당유혼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성세를 유지하는 대부분의 정파들은 그 혼란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이들. 일신의 무력보다는, 의심과 귀계 등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총…관…….”
당궁상까지 그리 말하자 당위혼도 차마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럼, 어찌해야…….”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지. 어때, 단주님. 우리랑 일 하나 하지 않겠어요?”
다시금 화살은 광세운에게로 향했다.
“…저 혼자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인 듯한데… 일단 이야기부터 들을 수 있겠습니까?”
“어렵지 않죠. 쉽게 말해, 사천의 생산물을 그쪽 지역과 독점으로 팔아먹는 상행을 만들어 보지 않겠냐는 겁니다.”
독점?! 상인이라면 눈이 번쩍 뜨일 단어가 아닌가!
“쓰읍… 도, 독점이요?”
그래, 인마. 군침부터 닦고 얘기해라.
“우리가 유통망이 없는 거지, 물자가 없는 건 아니거든. 아니, 오히려 물자는 남아도는 편이죠.”
용독문이 팔려고 계약까지 전부 다 되어 있던 물자들이 창고에 쌓여있다.
폭삭 망했던 당가가 다 소비하기는 도저히 무리가 있어 악성 재고나 다름없는 데다, 이번에 사천삼주의 압력으로 계약을 파투 낸 상단들 측에서 위약금도 대폭 물어줬기에 그 수량은 과장 안 보태고 산더미 정도는 되었다.
“사천은 예로부터 천부지국(天府之國), 하늘이 곳간을 내려준 땅이라 불렸습니다. 생산량 자체가 타 지역에 결코 밀리지 않는 데다, 사천에서만 구할 수 있는 각종 특산물… 특히, 촉금(蜀錦)까지 남아도는 실정이거든요.”
“촉금까지?!”
촉금이란 저 촉한 시대에부터 사천을 대표해 온 비단이다.
황제의 진상품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것으로, 사천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부르는 게 값일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이 바로 촉금이니. 지금 이 순간, 광세운의 머릿속 주판이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원한다면 당장 이번에 돌아갈 때부터 물자를 제공해 줄 수 있어요. 물론, 대금은 후불로.”
“…자, 잠깐……!!”
광세운은 금방이라도 홀려 넘어갈 것 같은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든 이성을 잡기 위한 아등바등함이 실로 애처로웠다.
“엥? 또 뭐가 문제예요? 이 정도면 거저구만, 그냥.”
“너, 너무나 좋은 거래 조건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본 상단은 인력이 없습니다…….”
상행이 아무렇게나 진행되나? 물건이 많아질수록, 그걸 실어나를 인부와 호위, 말 등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입의당의 문사들 덕분에 행정 인력이야 넘치도록 남아돌지만, 단순 육체 노동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아아, 인력? 그거야 마침 우리가 남아돌지.”
내뻗은 당유혼의 손가락이 창밖을 가리켰다.
그곳에 있는 것은 오늘도 죽어라 수련을 반복하고 있는 방계들.
“특별히 개점 기념 대특가로 모시겠습니다, 손님. 무보수, 무임금의 노동력이 남아도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자의 따위는 없이, 자기들도 모르게 도매가로 넘어가 버릴 위기에 처한 방계들!
“자, 잠깐!!!”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방계들의 대표로, 차양당의 당주로 겨우겨우 꼽사리 끼듯 참석한 당지명이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형님! 이건 너무나 잔혹한 폭거입니다!!”
“뭐? 잔호오오옥? 폭거어어어어어?!”
그래, 내긴 했는데…….
“야, 이 자식아. 니가 처먹은 쌀밥은 안 잔혹하냐? 하는 것도 없이 밥만 축내는 쌀벌레 같은 게!!”
“싸, 쌀벌레……?”
“웬 거지새끼들 데리고 밥 먹여줘, 영약 먹여줘, 무공 가르쳐줘… 다 해놨더니, 니들이 대체 그 비싼 것들 얻어먹고 한 게 뭐야?!”
“그, 그건……!”
사실이 묵직하다.
때로는 거짓보다 더욱 잔혹한 것이 사실이라더니…….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당지명은 일어난 기세가 무색하게도 휘청거리다 저 구석으로 가 쭈그려 앉아서는 ‘난 쌀벌레야… 레벌레벌…….’을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나는 격침.
그다음은,
“형님…….”
당가의 살아 숨 쉬는 양심, 가주 당위혼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방계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데려가는 것은 과한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흥, 가주는 내가 정말 저놈들이 밥만 축내는 꼴을 보는 게 아니꼬워서 이런다고 보여?”
‘아닙니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뻔했지만, 겨우겨우 다시금 꿀꺽 삼켰다.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있지. 실전.”
“실전?”
추가적인 설명을 원하는 당위혼의 눈빛에 당유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응했다.
“언제까지고 저 녀석들을 가문 안에만 두고 무공 수련만 냅다 반복시킬 수는 없지. 저 녀석들도 실전을 겪고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는 훈련을 미리 해둬야 한다. 그러기에 지금이 적기지.”
그건 가히 전가의 보도와 다름없는 단어였다.
정작 이리 말하는 당위혼 역시 실전에 대한 경험은 전무하다시피 했기에, 무어라 당장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그에, 당유혼은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리고, 신뢰.”
“신뢰라니요?”
“만약 이 상행이 성사되고 앞으로도 꾸준한 유통망이 지속된다면, 광형 상단은 본가와 첫 거래를 트는 상징적인 곳이 되겠지. 그런 이들에게 우리가 이 정도의 성의를 보였다는 것 자체가 신뢰의 표현이 될 거야.”
“확실히…….”
차양당은 현재, 유일무이한 당가의 무력대다.
사실상 패망한 당가에 존재하는 유일한 집단이며 기관 부서이기에 그들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최대치의 신뢰 표현이다.
“어때, 단주님. 구미가 좀 당기시나?”
결국 당가의 어린 가주마저 뱀의 교언으로 홀라당 넘겨 버린 당유혼은 마지막으로 고민을 끝낸 단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에,
“…후우, 이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군요.”
결국 광세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아이고,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죠. 몇 가지 준비만 끝내고 곧바로 상행을 진행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딱 기다려 달라고 호ㄱ… 아니, 아니, 고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