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독류진.
그것은 방계들이 삼재진을 통한 감각 공유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 당유혼이 다음 단계라며 꺼낸 이름이었다.
“삼재진의 본질은 세 명이서 축을 이루어 운용하는 귀원일기공이다. 감각 공유는 덕분에 나오는 효과일 뿐이지. 자, 그렇다면 여기서 세 명이서 운용하는 귀원일기공은 홀로 운용하는 귀원일기공과 무엇이 다를까? 답은 거대한 대순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순환.
귀원일기공의 본질.
“그렇다면 한 번 상상해 봐. 그 대순환 속에 독을 풀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독의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지.’
당율기. 그는 차양당의 방계들 중 독(毒)에 관한 이해도가 가장 높은 이였다. 그렇기에 독류진에 대해서도 가장 심도 있게 연구했고, 그 결과 방계들 중 가장 먼저 독류진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 이놈이…….”
울컥―
진혁수는 목구멍을 역류하는 핏물을 애써 삼켜보았지만, 단순히 피를 뱉는 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감각이…….’
처음에는 감각이 조금 무뎌졌을 뿐이라 생각했지만, 점점 어지러움과 함께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독이라니, 이 비겁한 것들……!”
“쟤 뭐라는 거냐?”
“당가보고 독 쓴다고 욕하는 것 보소?”
“본인은 먼저 기습한 주제에 참 당당하시네요.”
한 마디 뱉었다가 배로 돌려받은 진혁수는 부들부들 떨며 뒤로 물러나 주변을 훑었다.
주변 상황도 실로 암담하기 그지없었는데, 이 대 제자들 중 반 이상이 독에 중독되어 있었다.
‘이런 낭패가…….’
외통수에 빠진 상황. 그때,
“어이.”
이 긴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큭… 넌?”
처음 자신과 시비가 붙었던 남자. 당유혼이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섰다.
“이쯤하고 돌아가지?”
“뭐……?”
“꼭 피를 봐야 속이 풀리겠냐?”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주어진 제안.
“…형님, 전 이미 피를 봤는데요?”
“더 보고 싶냐?”
“…가만히 있겠습니다…….”
끼어들었다가 찍소리도 못하고 처박힌 당불퇴를 뒤로 하고, 당유혼은 턱 짓으로 주변을 훑었다.
“이대로 가면, 니네 제자들 하나둘 땅바닥에 눕는 게 아니게 될 거다.”
“큭… 우리에게 후퇴를 종용하는 거냐? 우리가 목숨이 아까워 도망칠 것 같더냐?!”
응, 다 도망칠 것 같은데?
이미 주변에서는 저 복면 대장의 퇴각 허락만 기다리는 눈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간 그냥 ‘다 같이 죽자.’가 돼 버린다.
“크크, 죽어도 명예롭게 죽겠다, 이거지?”
“그렇다!”
검을 앞으로 겨누며 결연하게 소리치는 진혁수를 보며 당유혼이 같잖다는 듯 웃었다.
“글쎄다. 청성채의 산도적 나으리. 어떻게 뒈지는 게 명예로운 건지는 모르겠다만, 여기서 산적으로서 최후를 마감하는 게 그리 명예로워 보이지는 않는데?”
“…아.”
그 말이 악마의 유혹처럼 다가왔다.
다 망해 버린 당가의 방계들에게 목숨을 구걸할 바에는 차라리 명예롭게 죽겠다는 생각인 진혁수였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이 청성파의 제자가 아닌 한낱 산적 떼로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자연스레 생존에 대한 욕망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그래… 죽을 때 죽더라도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아니지… 나는, 저 아이들을 개죽음당하게 할 수 없는 거다.’
진혁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이 어떠하든, 적어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믿음은 그러했다.
“…물러난다면, 보내줄 테냐?”
“어서 가. 난 처음부터 싸우자고 한 적 없으니까.”
“큭…….”
손을 훠이훠이 휘젓는 당유혼의 모습에 결국,
“퇴각한다!!”
진혁수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 말만 기다리고 있던 청성파의 제자들은 황급히 물러섰고,
“두고 보자……!!”
그들을 수습한 진혁수는 외마디 말을 남기고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대형.”
그 모습을 뻔히 보던 당불퇴가 당유혼을 불렀다.
“쫓아가서 짱돌로 한 대 찍어주고 올까요?”
…그거 좋은데?
“됐다, 인마.”
애써 손을 흔들며 그 유혹을 털어내니, 이번엔 당지명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대형. 정말 저대로 보내도 괜찮습니까?”
산중에서 칼 들고 덤벼오던 녀석들이다. 한 마디로 위험한 놈들. 그런 놈들을 이리 곱게 보내줘도 될까 싶었다.
하지만,
“됐다, 일없어.”
당유혼은 심드렁한 반응으로 손을 저었다.
“갈 길이 구만구천 리야. 우리 갈 길이나 생각해.”
“하지만 저들이 또 습격해 온다면…….”
“그런 일 없을 거다.”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야. 그놈들, 모르지만, 우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도 안 올걸?”
보통의 상식이라면 당연히 한 대 처맞았으니 화가 나서라도 달려들려는 게 정상이겠지.
하지만,
“명문 정파라는 것들은, 유서 깊은 비겁자들이거든.”
“…예?”
겉모습은 어린아이지만, 속은 닳디 닳은 노강호인 당유혼은 소위 명문이라 불리는 것들의 생리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역겹기 그지없을 정도로.
“녀석들은 이번에 예기치 못한 일을 겪었다. 이를 보통 변수라고 하는데… 명문 정파라는 놈들은 이걸 지독하게 싫어하거든.”
“…고작해야 몇몇 중독되고 끝났지 않습니까? 그들 정도라면 며칠만 정양하면 쉽게 털고 일어날 수준일 텐데…….”
“그 고작이 지상 제일의 보신주의자들에게는 치명적이라는 게 문제다.”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당지명의 모습에 당유혼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그래, 이해 못 하겠지.’
나도 그 새끼들을 이해하는 데만 수십 년이 걸렸으니까.
“그놈들은 절대 자기가 위험한 일은 안 하려고 든다. 특히나, 사천삼주니, 뭐니, 하는 연합체라면 더하지.”
일견 보기에는 공고한 연합체 같지만, 내부에서 보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래성이나 다름없는 놈들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남에게 미루려 하는 게 그들의 생리다. 도망친 놈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죗값을 덜기 위해 최대한 우리의 위험도를 부풀려 이야기할 거고, 그때부터는 서로가 책임을 덜기 위한 책상물림을 시작할 거다.”
마교와의 대전에서도 질릴 만큼 본 풍경이다.
당유혼은 그때를 생각하며 분노를 피워 올렸고, 그 모습에 당지명은 얌전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대형이 저렇게 화를 내는 정파가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화를 내는 대형은 잘 알잖아.’
괜히 저럴 때 깝죽대다가는 한 대 처맞는다는 것을.
뭐, 어쨌거나.
“수고했다, 이 밥벌레들아. 그래도 없는 살림에 꾸역꾸역 먹여놓으니 밥값은 하는구나.”
칭찬인지 격려일지 모를 말들이 쏟아져 나오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듣고 있던 방계들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너한테 무슨 좋은 말을 기대하겠냐.’
‘더러운 자식.’
‘자기는 손도 안 대고 코 풀었다, 이거지?’
정작 그동안 손 하나 안 움직인 주제에 상황을 정리하라며 짝짝 박수를 치며 독려하는 당유혼의 모습에 방계들은 허탈하게 웃으면서도 바삐 움직였다.
스스로도 모르지만, 어서 빨리 이 장소를 벗어나고 싶다는 본능이 그들을 자극한 것이다.
그리고,
‘…그래, 지금은 이게 낫겠지.’
그 모습을 보던 당유혼은 차마 말하지 못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속으로 삼켰다.
‘아직은 이르잖아.’
손에 묻은 피를 빨리 닦아내는 녀석들.
칼을 쥔 무인인 이상… 늦든 빠르든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것이 필연이지만, 당유혼이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싶었다.
‘살인(殺人)을 하기에는 말이야.’
사람을 죽이는 것.
인간 백정처럼 수없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본 당유혼이기에 알고 있었다. 그 끔찍한 감각을 한 번 알게 되는 순간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조금은 늦어도 되겠지.’
* * *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말로 당유혼의 장담대로 더 이상의 습격은 없었다.
표행은 무사히 감숙에 도착했고, 광형 상단의 널찍한 입구가 보이는 순간 모두가 환호했다.
“도착이다!!”
“와아아아!!!”
“젠장, 드디어 노숙은 끝인 거야?!”
“흙바닥이 아닌 곳에서 잘 수 있는 거지!”
“난 밥부터 먹고 싶어!! 표사님들이 거긴 매일매일 고기반찬을 먹여준다잖아!!”
…이 한심한 놈들아.
진지하게 이놈들을 굴릴 연무장부터 수배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저 입구에서 한 무리의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바로 입의당의 문사들.
상단이 돌아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꼭두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던 그들이 열렬히 환호했다.
“와아아!! 대 사천당가!!”
“당유혼 대협을 환영합니다!!”
“아이참, 그 정도는 아닌데… 크흐흡……!!”
멋쩍게 뒷머리를 긁으면서도 결코 부정은 하지 않는다.
“저거… 좋아하고 있는 거죠?”
“아니, 좋아 죽고 있는 거지.”
“…대형.”
그냥 저대로 죽었으면.
눈 꼭 감고 모른 척하고 싶어지는 방계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유혼은 아주 입꼬리가 귀에 걸리게 웃으며 말했다.
“아휴, 제가 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닌데… 이렇게 환영들 해주니시 너무 쑥스럽네요.으히히힛!”
틀린 말은 아닌데, 또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너무 부끄럽잖아요.
실실 쪼개는 대형을 진짜로 반으로 쪼개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방계들의 뇌리를 가득 채울 때, 광세운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실은 사람들을 보내 미리 상을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저희가 잔치를 준비해 두었으니 우선은 오늘은 먹고 즐기시지요.”
안 그래도 안쪽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먹을 것?!”
“잔치?!”
“우와아아아아!”
“대 광형상단이 최고시다!!”
대형에 대한 쪽팔림을 깔끔히 사라졌다.
일단은 짐부터 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