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황산 계곡.
감숙성 광형 상단이 존재하는 황산현의 입구 어귀에 있는 이 계곡은 평소 상행을 떠났던 광형 상단의 사람들이 이제 고향에 돌아왔구나, 를 알게 해주는 그런 곳이었다.
언제나 반가운 곳이었기에 광세운 역시 이곳을 밟는 걸 좋아했으나, 오늘 이 자리에 선 그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있었다.
“긴장되십니까?”
그런 그에게, 곁에 서 있던 광운대주가 넌지시 물어왔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이겠지요.”
광세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가급적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상단의 재산 절반을 떼어줄 수도 있으니 돌아가 달라고 빌고 싶군요.”
싸우기도 전에 항복을 말하는 모습에도 광운대주는 그가 약하다고 탓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지만, 그럼에도 싸워야 한다면 싸울 것입니다.”
아직 젊은 소상단주의 눈에는 타오르는 의기가 형형히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화를 지킬 수만 있다면, 무수히 준비한 것이 무색해져도 상관없다.’
하나, 그렇지 않다면?
‘이 한 몸 부서질 때까지 맞서 싸우리라.’
광세운은 그렇게 스스로의 각오를 다졌고, 그런 젊은 후계자의 의지를 시험하듯 저편에서 흙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는 한 무리의 세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왔구나.’
흉흉한 분위기를 몰고 다니는 말 탄 무리는 모두가 사나운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중 제일은 전방에서 큼지막한 도를 말안장에 걸은 채 달려오고 있는 인물이었다.
‘저자가…….’
추풍대주 갈무흔.
한 무리의 이리 떼를 끌고 온 흉포한 살귀가 손을 들었다.
히히힝―
말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손짓 하나로 이백 필의 기마병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모습이 그들이 얼마나 오랜 실전으로 단련된 정병인지 증명한다.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킬 때, 갈무흔이 목을 좌우로 우드득 거리며 말했다.
“흐으, 이게 무엇일까. 설마 우릴 환영이라도 해주기 위해 모였나?”
“크하하하핫!”
“귀엽습니다, 아주!”
그에 호응하듯 추풍대의 마적들이 저마다 사나운 웃음을 터트렸다.
‘피 냄새.’
얼마나 사람을 죽여댔는지, 그 웃음소리에 피 냄새가 섞여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광세운은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으려 노력하였고, 그들이 한바탕 웃어젖힌 뒤에서야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북방의 호걸들이시여.”
“응?”
“북방의 호걸들의 귀한 발걸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광형 상단의 단주인 제가 이리 찾아온 것입니다.”
우릴 환영하러 왔다고? 이건 또 무슨 경우인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낄낄거리던 마적 떼들도 멀뚱히 저들을 돌아보았다.
그때, 갈무흔이 앞으로 말을 몰아 나왔다.
다그닥― 다그닥―
여유롭기 그지없는 걸음걸이.
정확히 열 걸음 앞으로 말을 몰아 나온 그가 히죽 웃었다.
“그래, 우릴 맞이하러 왔다고?”
“그렇습니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북방인으로서 갈무흔 대협을 모르는 이가 있겠습니까?”
“대협? 큭… 크하하하……!”
살다 살다 자신이 대협 소리를 들을 줄이야.
킬킬 웃던 그가 기이하게 목을 젖혔다.
“좋아, 대협이라……. 뭐, 그런 호칭도 상관없지. 한데, 정작 환영하러 온 것 치고는 손들이 너무 가벼운 게 아닌가?”
“당연 준비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 두 손에 담기에 부족하여 놔두고 왔습니다.”
“호오, 얼마나 성대한 환영을 하려고?”
기대된다는 듯 웃는 추풍대주.
그에게 광세운을 한 번 눈을 감았다 뜨며 선언했다.
“반입니다.”
“…뭐?”
“본 상단의 재산. 그 반을 대협께 바치겠습니다.”
“반, 이라고?”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제 귀를 의심하던 갈무흔이 눈을 껌뻑거렸다.
“너… 미쳤냐?”
“아닙니다. 지극히 제정신입니다.”
“하… 반이라, 솔직히 믿기지 않기는 한데… 그래, 뭐. 조건 같은 거라도 있냐? 누구 마음에 안 드는 옆 동네 문파의 대가리를 썰어달라는 거나…….”
지극히 사파다운 방식으로 접근해 보지만,
“아닙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광세운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부디, 이 작은 마을은 대협과 북방의 호걸들께서 머무르기 비좁고 불편할 테니… 다른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간절하지만, 완고한 부탁.
그에,
아아… 그렇구나.
“알겠다.”
갈무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으니,
“승낙이신 것입니까?”
광세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아니.”
돌아온 대답은 그의 기대를 처참히 짓밟는 것이었다.
“너희들이, 얼마나 약해 빠졌는지 알겠다고.”
히쭉― 웃는, 그 잔혹한 미소가 귀에 걸렸다.
“너희들은… 양 떼구나.”
평생을 풀만 뜯어 먹다가 결국 자신들과 같은 늑대들에게 목을 물어뜯기는 것이 숙명인 양 떼.
“내가 왜… 반이나 내놔야 하지?”
그 양 떼를 향해 이리는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였다.
“그 전부가 내 건데 말이야.”
아…….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품었던 기대가 속절없이 짓밟힌 광세운은 눈을 굳게 감았다가 떴다.
“결국, 피를 봐야 하시겠습니까?”
“크크크, 우린 늑대다. 피를 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이야.”
“그렇군요.”
협상은 결렬이고, 남은 결말은 하나뿐.
“자, 오래 끌었더니 목이 마렵구나. 이 갈증을 적실 피가 필요하니, 얌전히 목을 내놓거라!”
“상단주님.”
갈무흔이 두 팔을 번쩍 쳐들며 외치자 광운대주는 광세운을 뒤로 물렸다. 그와 동시에 갈무흔이 안광을 폭사하며 소리쳤다.
“가라, 가서 물어뜯어라!!”
“크하하하하!! 드디어!!”
“오래 기다렸습니다, 대장!!”
그것을 신호로 굶주린 늑대 무리가 풀려났다.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선두에 선 추풍대의 마적들이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교전의 시작!
하지만,
히히히힝―!!
“으, 으아아악?!”
“뭐야, 이… 우아악!?”
전방의 땅이 쑤욱― 꺼지더니, 달려오던 일 열의 마적 떼들이 일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함정?!”
그제야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황산 계곡의 흙먼지로 뒤덮인 바닥, 그 아래에 뚫려 있던 무수한 구멍을!
게다가, 진정한 환영식은 이게 끝이 아니었으니…….
“늑대 사냥을 개시한다!”
물러섰던 광세운이 내공을 섞어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니, 잠시 후 천둥, 번개가 몰아치는 소리가 협곡 좌우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위, 위에!!”
“돌무더기가!!”
이미 황산 계곡 양측 위에 배치되어 있던 이들이 돌을 굴리기 시작한 것!
가뜩이나 선두의 인원들에게 진로가 막힌 이들은 속절없이 낙석에 맞아 고꾸라졌다.
“이, 이런?!”
집단전의 혼란 속에서는 무공의 고수고 뭐고 없었다.
말을 탄 채로 사람 키보다 훨씬 높은 구멍 아래로 떨어지면서 자세도 제대로 잡지 못해 목이 부러져 죽고,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낙석에 맞으면 등 허리가 꺾이며 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선봉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자 갈무흔의 두 눈이 광세운을 찢을 것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한 가지 정정하겠습니다.”
그런 갈무흔을 향해 광세운이 입을 열었다.
가슴 높이까지 돌 더미가 쌓여 앞이 간신히 보이는 상황에서,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희는 양 떼가 아닙니다. 당신들처럼, 피에 굶주린 금수가 아닌 사람입니다.”
“네놈…….”
“사람이기에, 가급적 피를 보는 것을 피할 뿐이지만… 같은 사람에게 입히는 피해가 도를 넘어선다면 사냥을 시작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니까…….
“이제, 그 시작입니다.”
말을 끝낸 광세운은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광세운을 포함한 다른 광운대의 병력들도 일제히 후퇴하였고, 계곡 위에 이들도 분주히 움직이는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이익……!!”
뻔한 유인 작전이지만,
“뭘 하느냐, 쫓아라!!”
이미 분노에 가득 찬 갈무흔에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존명!”
“가자!!”
떨어진 낙석과 구멍을 피해 추풍대의 마적 무리가 달려 나갔다.
갈무흔은 광세운을 차가운 시선으로 쫓았다.
‘잡히면 결코 곱게 죽이지는 않겠다……!!’
분노로 가슴은 뜨겁게 이글거렸으나,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그는 원래 그런 인물이었다. 사냥에 앞서면 더없이 흉포해지지만, 머리는 언제나 어떻게 상대방의 숨통을 끊을지 생각하는 냉혹한 사냥꾼.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으니, 부하들을 먼저 보내 어떤 함정이 있을지를 대비하고 사냥감을 몰아붙여 체력을 빼는 것이었다.
그런 방식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으나, 동시에 그런 방식이 지금의 그를 홀로 남게 했으니…….
슈우욱―!
“……?!”
날카로운 예기가 갈무흔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채앵!!
그 찰나의 순간, 갈무흔은 말 안장에 매달린 도를 뽑아 휘둘렀고, 묵직한 충격이 손아귀에 작렬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위기를 회피할 수 있었다.
히이잉―!
그 충격을 못 버틴 말은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지만, 갈무흔은 그에 당황하기보다는 말 등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파파팟!!
주저앉은 말 위로 무수한 암기 세례가 내려와 꽂혔다.
간발의 차로 암기 세례를 피해 낸 갈무흔의 시선이 재빨리 습격이 날아온 방향을 좇았다.
‘어디냐?!’
고개를 드니 중천에 떠오른 해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그 사이로 검은 점이 찍히는가 싶더니 빠른 속도로 확대되었다.
‘이런……!’
두 팔을 교차하여 방어 자세를 취하니 그 위로 발차기가 내리 찍혔다.
묵직한 충격에 두 허벅지 근육이 잔뜩 팽창했다.
“놈!!”
팔을 펴며 상대를 튕겨내고 그대로 박도를 휘두르자 습격해 온 그림자가 빠르게 몸을 튕겨 멀어졌다.
마치 곡예를 하는 듯한 움직임!
재빨리 쫓으려 했지만, 몇 개의 암기가 더 날아와 그것들을 쳐내느라 자연스레 거리가 벌어졌다.
습격자는 열 걸음 남짓한 거리를 벌리며 씨익 웃었다.
“아, 아깝네. 예쁘게 구멍을 뚫어줄 수 있었는데.”
이 난장판인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유유자적한 목소리에 갈무흔이 사납게 일갈했다.
“누구냐!!”
“누구냐라……. 그것참, 등신 같은 질문 아니냐?”
습격자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딴 걸 알려주면서 대화를 하고자 했으면, 첫인사로 암기나 던지지는 않았겠지.”
“금적금왕. 우두머리인 내 목을 잡기 위해 이리 행차하셨다는 뜻인가?”
“금적금왕? 사파 새끼가 문자 쓰기는.”
하여튼 요새 사파놈들은 이게 문제라니까.
‘나 때는 고개도 못 들던 놈들이… 이제는 구패니, 뭐니, 목만 뻣뻣해져 가지고 말이야.’
말세구만, 말세야.
세상의 변화를 한탄하는 노강호가 반대편 손에 비수를 한 뭉치 들었다.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그 끝을 상대방을 향해 겨누고,
“넌 짐승 새끼고.”
반대쪽 손은 당겨 천천히 전의를 고취시킨다.
“난 사냥꾼.”
그렇게 당유혼은 선언했다.
“그냥 넌 여기서 뒈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