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잘하고 계십니다 】
챙― 채앵! 챙!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를 맹렬히 만들어 내는 이 조장 구마유는 눈앞의 현실을 믿지 못해 이를 가는 중이었다.
‘젠장!! 내가 겨우 여기서 발목을 붙잡히고 있다고?!’
카앙― 캉!
그의 자랑인 박도가 연신 허공을 가른다.
가로막던 적들의 목을 추수철 보리처럼 잘라내며 여기까지 왔던 박도였지만, 지금은 무슨 규모 있는 문파의 무인도 아니라 웬 지방 상단의 표사 하나 베어내지 못하고 휘두르는 번번이 가로막히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어째서 네놈 따위가!!!”
발악하듯 소리치는 구마유. 그리고 그 상대인 광운대주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묵묵히 날아드는 도격을 쳐내는 데 집중했다.
‘과연 추풍대. 서열전에서 밀려나며 내상까지 입었다고 들었거늘… 강하긴 강하구나.’
상대는 답답함에 연신 괴성을 질러댔지만, 일대일 상황만 따지면 자신이 훨씬 불리했다.
이미 자신 역시 내상을 입어 울혈이 울컥울컥 역류하고 있었고, 입가에 줄기줄기 흘러내리는 핏물은 뱉어낼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 상황을 간신히 유지하면서도 광운대주는 자신이 선 자리를 지켰다.
“죽어! 죽으라고!! 좀 뒈지란 말이다!!!”
카앙! 캉!!!
거친 쇳소리에 둘의 칼이 크게 부딪쳐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광운대주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만으로 자세를 바로 하고 다시금 상단세(上段勞)를 취했다.
그 모습이, 구마유의 입장에서는 질려서 신물이 날 것만 같았다.
“너 이 새끼… 무슨 수를 쓴 거냐. 어떻게, 어떻게 내 칼질을 이렇게 막아내는 거냐?”
도저히 믿기지 않아 묻는 말, 그에 조금 여유가 생긴 광운대주는 입 안에 고인 피를 퉤― 하고 뱉어내며 답했다.
“확실히 강하군. 한낱 마적 무리의 우두머리 중 하나라고 믿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 얼마나 강하냐면, 지난번 산적으로 위장해 쳐들어 와서 자신을 압도했던 청성의 무인으로 추측되는 이보다도 위 단계로 추측되었다.
하지만,
“당신과 나는 상성 관계에 있는 듯하오.”
지난번과 따지면,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그대는 처음 우리들과 부딪칠 때, 우리들을 수백 년간 한 지방에 머물러 밖으로 뻗어나갈 생각도 하지 않는 나약한 이들이라고 폄하했지. 하나, 그건 달리 말해 이리 이야기할 수도 있소.”
불혹(不惑)에 이르러,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어질 나이에 이른 그가 단단한 눈빛으로 말했다.
“수백 년간, 우리의 가족들을 지켜온 검이라고.”
“뭐……? 이런……!!”
으득―
이빨이 갈려 나갈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개 같은, 개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다른 세상을 둘러볼 용기조차 없어서 지방 구석탱이에 처박혀 안주해 오던 것이 지켜온 행위라고?!”
“아무렴. 스스로의 고향을 지킬 용기조차 없고, 그를 위해 옥쇄할 의지조차 없어 이리 도망쳐 온 당신이 무얼 알고 있겠소?”
그의 등 뒤로 서 있는 광운대의 대원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서 있는 감숙 다른 중소 문파들의 무인들이 보였다.
‘내가, 우리가, 광형 상단의 수백 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이들.’
한창 추풍대를 상대할 작전을 의논할 때 찾아온 이들이었다.
“우리도 힘이 되고 싶습니다!”
“비록 하잘것없는 저희지만, 함께 싸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광형 상단이 추풍대와 맞서 싸우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들을 돕기 위해 그들에게 은혜를 입었던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몰려온 이들은 작은 중소 문파에 소속된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손에 농기구를 들고 찾아온 농부들도 있었고, 무공 하나 익히지 않은 장정들도 있었다.
광운대주는 그런 이들까지 차마 받을 수는 없어 돌려보냈지만, 다른 중소 문파의 무인들을 보니 없던 희망이 한 줄기 생겨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과 연계할 작전을 짜고, 지금에 이르러 자신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버틴다.’
추풍대와의 싸움은 길어지고, 방어진을 단단히 구축하며 창과 화살, 투척 무기 등등을 고루 갖춘 덕에 수적 열세인 자신들이 조금씩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버티려면… 나 하나의 목숨 정도는 내놓아야겠지만…….’
광운대주는 슬쩍 고개를 돌려 저편에서 사람들을 지휘하며 연신 검을 휘두르고 있는 광세운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버텨라!! 조금만 더 버텨라!!”
잘 묶어 정리했던 머리는 어느새 산발이 되어 흩날렸고, 전신에 난자당한 상처가 여럿 생겨나 있지만,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처럼 방어진을 단단히 구축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다음 세대를 향한 밑거름으로. 이 한목숨을 바치는 정도라면… 정말 수지타산이 괜찮은 거래가 아닌가.’
평생 상단의 호위 무사이자 표두로 살아온 그로서, 이만큼 큼지막한 상행을 실행할 기회가 어디 두 번 올까?
“이놈!! 좀 뒈지란 말이다!!”
광운대주는 다시금 박도를 휘둘러 오는 구마유를 향해 검을 움직였다.
“좀, 비켜라!! 차라리 도망쳐라! 도망친다면, 네놈만큼은 보내줄 테니까!!”
거의 애원하듯 소리치는 구마유의 외침에도 광운대주는 헐헐 웃으며 피로 범벅이 된 입가를 달싹였다.
“산적이 습격해 온다고 도망치는 표사를 본적이 있는가.”
“이 멍청한 새끼! 그래서 이대로 뒈지겠다고? 네놈은 결국 내 손에 죽을 거다!!”
“뭐, 그렇겠지.”
거침없이 움직이는 검과 박도의 부딪침은 끊임이 없지만, 그 상황에서도 광운대주는 오히려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건 표사로서 최고의 영광일 듯하군.”
몸은 가벼워져도 검을 쥔 손은 더더욱 무겁게. 뿌리 깊은 나무처럼 받아치며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광운대주의 모습에 구마유의 두 눈에서 귀화(鬼火)가 피어올랐다.
“오냐, 그렇다면 여기서 영광스럽게 뒈져라!!!”
울컥―
잠력(潛力)까지 끌어다 쓴 구마유가 피를 토하며 검을 휘둘렀다.
더더욱 날카롭고 더더욱 무거워진 박도에 광운대주는 이제 그 방어 자세가 점점 더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까지군.’
그 사실을 절절히 절감하며 광운대주는 검을 움직였다.
‘그렇다면.’
그는 결심했다.
‘끝까지 내가 할 일을 할 뿐.’
동귀어진(同歸於盡).
상대가 스스로의 생명을 불태워 박도를 휘두르듯, 광운대주 역시 자신의 마지막을 불태우며 움직였다.
지금 여기서 꺼지더라도, 상대에게 통렬한 최후의 일격을 남기기 위해!
그렇게 서로가 마지막을 그리기 위해 움직일 때,
파파팟!!
저 멀리서 무언가 날아드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커어억?!”
구마유의 등판에 암기 대여섯 개가 꽂혔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 이런… 개, 개 같은……!!”
채 검을 휘둘러보기도 전에 비틀비틀 걸음을 내디딘다.
깜짝 놀란 광운대주가 암기가 날아온 방향을 보자 거기서 수십 명의 무리가 나뭇가지를 타 넘으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멈춰!”
“싹 다 밀어버려!!”
“다 조져버려!!”
‘당가……!!’
얼마나 기다리던 이들이던가.
반면, 구마유의 몸은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이건… 독……?”
암기의 끝에 발라진 독이 체내로 흘러들어 오는 게 느껴졌다. 잠력을 격발시켜 빠르게 체내를 휘몰아치는 혈류를 타고 삽시간에 사지백해(四支百骸)까지 흘러간 독이 체온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이 새끼가 우두머리 같은데?”
“뭐해? 그럼 빨리 조져.”
이미 반쯤 죽어가는 구마유의 곁으로 후두둑― 떨어진 세 명의 방계가 삼재진을 형성했다.
“웃기지 마라……. 어디 이름도 못 들어본 놈들 따위에……!!”
구마유는 발악하듯 저항했지만,
“누가 할 소리야?”
“네 녀석은 무슨 무명이 천하 무림을 뒤흔드는 수준이냐?”
여기 오기 전부터 이미 내상을 입고 있었던 데다, 광운대주와의 접전에서 체력을 대부분 소진하고 스스로 잠력을 격발시킨 상태로 기습과 중독을 허용한 그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를 처리한 방계들이 땅에 검을 박은 채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광운대주에게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나, 나는 괜찮소. 그런데 여기 왔다는 건 혹시…….”
“저희 쪽은 다 처리했습니다.”
“그, 그 말은…….”
됐구나. 이겼구나.
그 사실에 환호를 지르려던 광운대주지만, 이상하게도 방계들의 안색이 밝지 않은 것과 자신이 알고 있는 셋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아해했다.
“그런데… 당주와 다른 두 분은 어디 있는 것이오?”
“당주 형님과 불퇴, 율기는 대형을 찾으러 갔습니다.”
“당유혼 대협을 말입니까?”
“예… 아직, 형님이 오지 않으셨거든요.”
차양당의 당주 당지명과 당불퇴, 당율기는 곧장 당유혼을 찾으러 갔고 나머지 셋은 이곳에 지원을 왔다.
그리고, 지원을 온 서른은 결코 안색이 좋지 못했다.
‘이상해. 분명… 대형이 먼저 우리에게 왔어야 하는데.’
그들은 생각했다.
죽어라 버티고 있으면, 어느 순간 ‘이 새끼들아, 저런 마적놈들한테 아직 처맞고 있냐?’라며 소리칠 대형의 등장을.
하지만 아직까지 나타나지 못한 모습에 그들의 마음속에는 어둠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당유혼 대협은…….”
“괜찮으시겠죠. 괜찮을… 거예요.”
방계 하나가 어렵사리 뱉은 말과 함께 서서히 정리가 끝나가는 전장의 다른 방계들도 일제히 한 곳을 바라보았다.
이 전쟁의 끝이 머지않았다.
남은 것은, 그 끝이 어떤 방향성을 맞이하냐 뿐이었다.
* * *
타타탓―
세 명의 방계들은 달리고 있었다.
그들 중 선두에서 달리는 것은 당지명이었고, 그의 마음은 여러 가지로 좌불안석이었다.
‘대형…….’
언제 또 그들이 대형을 걱정하는 날이 올까 싶었다.
추풍대주 갈무흔.
그 악명은 당지명조차 알 정도로 유명한 악인이었으나, 그들의 대형이라면 분명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망상에 가까운 기대였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젠장… 젠장……!!’
고작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당지명은 다른 이들을 이끄는 대형이었다. 하지만, 고작 일 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너무나 나약해져 버렸다.
당유혼의 뒷모습을 보고 따라가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고, 지금 이렇게 무력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게다가 그가 걱정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불퇴 이 녀석도 어서 돌려보내야 하는데…….’
아닌 척하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녀석의 흐트러지는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자신보다도 더욱 앞장서 싸웠던 녀석이기에 전신에 입은 상흔이 한둘이 아니다.
어깻죽지부터 옆구리까지 길게 베인 자국이 대미를 장식할 정도였고, 응급 치료를 해놨다지만 어서 빨리 의원에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차마 그를 돌려보내지 못하는 것은…….
“흐흐, 당주 형님. 내가 너무 느려터져서 신경 쓰이오?”
울컥울컥 피를 흘리면서도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는 그 모습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