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75화 (75/350)

75화

“그렇군요. 하지만, 우선하여 먼저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웬 인사요? 아니, 잠깐만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며 멀뚱히 반문 하려던 당유혼이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광세운은 자신의 말을 끝마치자마자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앉아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니, 왜 이러세요?!”

광세운은 가깝든 멀든 이곳 광형 상단을 이어받을 인물. 이 축제에서 알 수 있듯, 광형 상단은 단순히 일개 상단이 아니라 한 지역의 대표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쉽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나, 어깨를 붙잡는 당유혼의 손길에도 광세운의 의지는 확고부동했다.

“벌써 두 번째입니다. 한 번의 은혜만 입어도 그 사람을 평생 은인으로 대접해야 하건만, 두 번의 구명지은을 어찌 제가 다 갚으리라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꿋꿋하게 자신이 할 말을 다 하고 나서야 일어서는 모습. 무릎을 꿇고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느라 이마에 먼지가 다 묻었으면서도 활짝 웃는 그 모습에…….

‘진짜, 어지간히 닮았어야지.’

처음 이 남자를 도와주게 만들었던, 이젠 없는 삼십 년 전 자신의 동생과 그 부자를 떠올리며 당유혼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참… 고집도 강하시네요.”

“어찌 아셨습니까? 아버님과 광운대주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그것인데.”

안 봐도 알겠네요.

“쯧―”

혀를 찬 당유혼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 너무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다 서로 돕고 도운 건데.”

“저희가 도운 게 있습니까?”

“옷가지 하나 없이 홀랑 벗고 있는 부랑자를 주워준 것도 그렇고, 이번 전투도 우리 애들만 가지고 그 도적 떼 놈들이랑 싸워 이겼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다 그렇게 돕고 도운 거죠.”

말하자면 상부상조랄까.

당유혼은 그리 말했지만, 광세운은 그것이 자신들이 더 이상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올려 쳐 준 것임을 잘 알기에 그저 웃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가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광세운은 당잡 입을 열기보다는 멍하니 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였다.

“혼란스러운 시대입니다. 협(俠)은 바닥에 떨어졌고, 의(義)는 너절하게 뒹굴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그것이 아직 가치 있다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부끄럽게도,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어느날 황산현에 발발한 홍연이라는 질병이 사람들을 해칠 때, 자신의 아비는 그것과 최전선에 맞서 싸우다 명을 달리하였고, 감숙의 젊은 문사들은 모여 그 청춘을 다 바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오늘 날, 북방의 마적이 쳐들어 와 감숙을 위협할 때, 어느 가문은 자신들의 일이 아님에도 흔쾌히 뛰어들어 그들과 맞서 싸웠다.

‘그럼에도, 나는 그러지 못 했지.’

가문을 지키고, 상단을 지킨다는 핑계로 그 사이에서 수지타산을 계산했다.

두 어깨에 짊어진 짐이 무겁다고,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닥에 나뒹구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희 가문이, 은인의 가문의 뒤를 따라 걸어도 되겠습니까?”

그 죄스러움을 담아,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그에,

“그건 좀 힘들 것 같네요.”

당유혼은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대신, 함께 걸어가죠.”

뒤가 아니라, 옆에서.

그 말에, 몇 번 눈을 껌벅이던 광세운은,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참 많은 의미가 담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삼 일의 제도 끝을 맞이하고, 다시금 하루가 밝았다.

보낼 사람은 보내고 남은 사람이 나아가기 위한 준비도 끝나니, 이제 다시금 바쁜 하루가 시작되었다.

광형 상단은 전쟁 이후의 피해를 수습하랴, 그 기간 끊겼던 상행에 대한 배상 건과 다시금 상행을 재개하기 위한 일 등등으로 인해 북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니 자연스레 붕 뜬 이들은 차양당의 방계들.

어제까지는 같이 술 마시고 떠들던 이들이 다들 일에 치여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으니, 괜히 자기들만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이었다.

“…우리 어떻게 하지?”

“…저기 쌀가마니라도 나를까요?”

“좋은 생각이다!”

하나, 둘, 하나, 둘.

남아도는 게 힘이라고 방계들은 일꾼들이 열심히 옮겨놓는 쌀가마니에 붙어 그것들을 운반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당황한 상단 사람들도, 그들이 혼자서 대여섯 명 분의 일을 해내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박수를 쳤다.

“허어, 과연 영웅들이시군!”

“천생 신력이 남달라.”

“아주 장사야, 장사!”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그 말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방계들은 더욱 박차게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쌀가마니를 날랐다.

그리고,

“얼씨구, 잘한다.”

이제 막 밖으로 나온 당유혼은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찼다. 그래서 마침 지나가던 당불퇴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꺄울!!”

걷어차여 날아가면서도 쌀가마니를 땅바닥에 떨어트리지 않은 것도 재주라면 재주인지, 그것들을 받아낸 당불퇴가 빼액 소리 질렀다.

“아니! 가마니가 찢어져서 쌀들이 다 흘러나왔으면 어쩌려구요!”

“그럼 흘러나온 쌀알 개수만큼 줘 터지는 거지.”

저, 저게 진정 사람인가?!

괜스레 저런 형님 살리겠다고 목숨 걸었던 당불퇴는 눈에 눈물이 핑― 도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새끼들, 아주 상황 다 끝난 줄 아네.”

“…다 끝난 거 아닙니까? 단주님이랑도 얘기가 잘 되었다고 들었는데…….”

지나가던 당지명은 혹시나 자신도 처맞을까 은근슬쩍 멈춰서서 쌀 포대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아직 진짜는 시작도 안 했다는 거 몰라?”

“진짜라면……?”

“사천삼주.”

“아…….”

맞다.

추풍대와의 싸움이 끝나고 다들 한시름 놓고 있다가 그 사실을 깨닫고는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수련해야지. 언제까지 놀고 있으려고?”

“아, 아니… 그럼 이거는요?”

이미 배정받아 열심히 노동하고 있던 일들은?

“한 시진 준다. 그 안에 다 끝내고 연병장으로 집합.”

“그게 가능합니까?!”

이거 원래 네 시진쯤 걸리는 일인데?

“가능하게 해줘?”

“하,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으아아아!! 저 양반이 추풍대보다 더하잖아!!”

슬며시 꺼내 드는 젓가락 뭉치에 방계들은 내려놨던 쌀 포대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당유혼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먼저 연무장으로 되돌아왔다.

‘갈 길이 멀긴 하군.’

예상치 못했던 한고비가 지났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분명 방계 녀석들은 꽤 어려운 싸움이었을 텐데도 잘 따라와 주었다.

‘녀석들에게는 첫 실전이었을 텐데…….’

흉악무도한 마적 떼라지만, 그 목숨을 거두는 것이 어찌 쉬웠을까.

애써 밝은 척하던 그 녀석들이 어젯밤 자신들의 입 안으로 털어 넘기던 술잔을 쥔 손을 덜덜 떨어대던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멈춰서서 쉴 시간이 없다.’

털썩―

익숙하게 지붕 위에 앉은 당유혼의 주변으로 젓가락들이 둥실둥실 떠 오르기 시작했다.

무림의 호사가들이 보았다면 깜짝 놀라 온 무림에 떠들어댔을 일.

허공섭물(虛空攝物).

고강한 내공을 쌓은 고수가 기로 멀리 떨어진 사물을 움직이는 기예가 펼쳐졌다.

‘그 녀석과 쌓은 뒤, 벽 하나를 허물었다.’

죽었다 살아날 뻔한 덕분인지, 혼원신공은 다음 단계로 나아갔고 지금이라면 원래 상태의 추풍대주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그때 삼재진을 통해 날 회복시켰던 세 녀석들도 마찬가지겠지.’

좀 전에 걷어차며 확인해 본 결과, 당불퇴 녀석의 몸은 확실히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몇 배나 강건해졌다. 그것이 대체 어떻게 일어난 일인지는 혼원신공과 그걸 통해 귀원일기공을 개량한 당유혼조차 알지 못했다.

‘이건 이미 내 손을 반쯤 벗어난 신공이니까.’

신공(神功)이 괜히 신공일까.

가끔은 창시자의 의도를 벗어나 그다음 영역까지 멋대로 뻗어나가기에 신공절학이라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족하지.”

이놈의 망할 가문. 아니, 실제로도 망한 가문은 없는 게 너무 많다.

싸울 만한 머릿수는 고작해야 서른세 명에 불과한데, 싸워야 할 머릿수는 수십 배로 많다.

‘이제 겨우 상행로를 하나 뚫었는데, 그걸 또 지키려면 이미 자리 잡은 놈들과 박 터지게 싸워야 할 테고… 그러기 위해선 또 저놈들을 끝없이 굴려야 하잖아?’

생각만 해도 살살 머리가 아파져 오는 기분.

이럴 때면 오만상을 찌푸리며 하늘에 다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나 소리치고 싶지만서도,

“흠… 그래도,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단 말이야.”

자, 갑자기 들이 닥쳐온 극악무도한 사파 제일 악 추풍대도 훌륭히 격퇴했다.

거기다 광형 상단과의 상행 건도 무사히 타결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그립고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 * *

“여물은 충분히 먹였냐?”

“…그쵸.”

“말들의 상태는 좋고?”

“…좋아 보이십니까?”

“좋아 보이는구만.”

대광형 상단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어 꾸려지게 된 첫 번째 공식 상행이 준비가 완료되었다.

당가에서 용독문을 탈탈 털어서 가지고 있던 잉여 물자를 다 넘기고, 당장 우리가 필요한 물자들을 수레 가득 쌓았다.

그걸 끌 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덕길이든 진창길이든 가리지 않고 달려 나갈 수 있는 전천후의 명마를 준비해 뒀으니,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게 없는 것이다!

“좀 망설이십쇼!”

“아니, 그래도 갈 때는 말을 끌고 갈 줄 알았더니!!”

그런데 출발할 때가 되니 갑자기 말들이 난리를 부린다.

비싼 여물을 먹이며 곱게 키워놨더니 감히 태업을 꿈꿔?

“이 자식들! 너희들 사천삼주의 간자들이구나!”

찰싹찰싹!

“아! 아악!!”

“그, 그만!!”

특수 제작한 채찍을 몇 번 휘둘러주자 방계라는 이름의 말들이 얌전해졌다.

입이 빼죽해진 게, 마음 같으면 재갈까지 채워 버리고 싶은 기분이구만.

“…은인. 제가 감히 간섭해서도 안 되고, 간섭할 수도 없는 질문인 것은 알지만… 정말 이래도 됩니까?”

당가로 운송될 물자가 실리는 것을 지휘 감독하던 광세운이 그 모습을 보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그래도 이번에 같이 악전고투를 치렀던 분들인데…….”

차마 이 모습을 두고 볼 수는 없는지 조심스레 의견을 타진하자 방계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더, 더해 주세요!’

‘저 사파보다 더한 새끼에게 협의를 보여주십쇼!!’

대충 그런 시선들이 와 닿았지만,

“흠, 상단주님.”

팔짱을 낀 당유혼은 그딴 시선은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제가 이번 전투에서 죽을 뻔하며 느낀 게 뭔지 아세요?”

“무, 무엇입니까?”

“저 녀석들이 더럽게 약하다는 겁니다.”

…네?

“아니, 진짜 생각해 보니 열받네. 야, 이 자식들아, 니들이 좀만 더 강했으면 내가 그 고생을 할 일도 없었잖아!!”

찰싹― 찰싹!

다시금 채찍이 휘둘러지고, 결국 광세운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당유혼을 말리는 것을 포기했다.

어쨌거나, 그런 과정이 있는 덕에 상행은 마침내 출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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