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모두와의 눈물겨운 작별 인사가 끝나고 출발하기 시작한 상행. 그 난리를 피웠던 당유혼은 상행이 출발하고 얼마 있지 않아 짐수레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따뜻한 햇볕이 드니, 자연의 법칙에 따라 수면욕을 받아들인다나 뭐라나?
어쨌건 그렇게 잠든 게 당유혼이니, 자연스레 짐수레를 끄는 말들, 그러니까 방계들을 적당히 모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때, 그냥 못 본 척 진창에 처박아 버릴까?”
“괜찮은 생각이야. 우리 셋이서 동시에 꼬라박으면 뭐라 못하지 않을까?”
음습한 반역 모의가 그들 사이에 오갔지만,
“…아서라. 대형이 그렇게 논리적으로 이해해 줄 것 같냐?”
누군가의 현실적인 일침에 반역의 불씨는 제대로 피어나지도 못하고 꺼트려졌다.
그렇게 평화로운 침묵이 도달했을 때, 당지명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다들. 긴장해 둬라.”
“예?”
“대형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우린 이제 시작 선상에 섰을 뿐이다. 본격적인 출발은 하지도 않았어.”
거기까지만 말해도, 다들 무엇을 얘기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사천삼주. 녀석들의 습격은 무조건 온다. 우리가 안심할 때, 방심할 때,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을 때… 우리가 가장 약할 때, 녀석들은 이빨을 들이밀 것이다.”
과거 자신들을 몰락시키기 위해 용독문을 만들어 냈던 것처럼.
그들의 대형이 하듯 대놓고 적의를 표하지는 않는 당지명이었지만, 비단 그뿐 아니라 모든 방계들이 사천삼주에 대한 적의를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단단히 긴장해 둬라. 긴 여정이 될 테니까.”
당유혼이 오기 전까지는 그들의 대형, 그리고 지금도 그들 방계들이 속한 차양당의 당주로서 당지명의 경고는 그들에게 깊이 있게 새겨졌고, 그들에게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착, 했다.”
“…도착, 맞죠?”
“그런 것… 같은데?”
그들은 사천에 도착했다.
무척이나 평화롭게.
* * *
“이게 왜 도착하지?”
“습격 온다고 하지 않았어?”
모두가 하나둘 꺼내는 목소리가 아까부터 당황을 떨치지 못하는 당지명의 귓가를 푹푹 쑤셨다.
“이게 왜… 안 오지……?”
부, 분명 습격이 와야 하는데?!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방계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새벽마다 약초를 캐러 오는 산이 보이고 그걸 넘어서 이제는 사천을 들어왔다 나가는 인파들까지 눈에 보이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천삼주의 습격은…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었다.
그건 또 결정적으로,
“…흐아암, 잘 잤다. …응? 뭐냐. 니들 왜 그렇게 빠짝 긴장해 있어?”
늘어지게 수면을 취하던 당유혼이 만약에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전투태세를 취한 방계들을 보고 미친놈 보듯 물어오자 아주 극에 달했다.
“대, 대형! 왜, 왜 습격이 안 오죠?”
“습격? 누가?”
“그, 그야 사천삼주가…….”
“걔들이 왜?”
뭔 헛소리냐, 라는 시선에 새삼스레 그들은 지난날 당유혼의 행적을 떠올렸다.
몇 날 며칠 늘어지게 잠만 자던 그들의 대형.
원래라면 누구보다 그들을 쪼아야 할 사람이 숙면을 취했다는 것에서, 사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되자 방계들의 입이 새 부리처럼 뾰족해졌다.
“예휴, 당주 형님이 그럼 그렇지.”
“솔직히 말해서 불퇴가 있어서 망정이지. 불퇴가 없었으면 지금쯤 불퇴가 담당하는 바보 자리는 당주 형님의 자리였을 걸?”
“불퇴랑 자주 놀더니 능지처참이 옳은 건가?”
“아니, 나는 왜?!”
비난이 빗발쳤다.
“율기 아니었으면 바보 삼인조였지, 뭐.”
“난 기대도 안 했어. 쯧쯧.”
“그러게 말이야. 답지 않게 분위기 잡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아프다. 진짜 더럽게 아프다!
가슴 한편을 콕콕 찌르는 저 말들 하나하나가 차양 당주로서의 권위를 땅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대, 대형!!”
“왜 인마.”
“왜… 왜 안 오는 겁니까? 사천삼주는 분명 우리에게 패퇴해 그들의 잘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렇다면, 지금 습격을 오는 게 정상일 거라고?”
“…아닙니까?”
쯧쯧.
말없이 혀를 차고 있자, 서러움이 북받친 당지명이 소리쳤다.
“왜, 왜 그러십니까? 분명 감숙으로 갈 때는 습격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사천으로 올 때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지?”
“…왜요?”
대체 왜? 어째서? 아니, 왜 안 오는데?!
“아오, 씨, 어딜 매달려.”
퍼억―
저리 안 꺼져?
이젠 아주 찰거머리처럼 매달려 오는 당지명을 걷어 차버린 당유혼이 쯧쯧 혀를 찼다.
“갈 때와 올 때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뭐겠냐?”
“…우리가 강해진 것?”
“어휴.”
말을 말자.
“생각해 봐라. 만약 산적 놈들이 습격을 해왔다고 쳤을 때, 역으로 물리치고 사로잡으면 어떻게 할 거냐?”
“그야 뭐… 관아에 넘겨야겠죠?”
피에 미친 사파들도 아니고, 목숨을 노렸다고 해서 마찬가지로 목을 따버릴 만큼 방계는 그리 모질지 못했다.
“그렇지. 그런데 감숙으로 가는 길에 사로잡으면 어디 관아에 맡기겠냐?”
“감숙의 관아에 맡기겠죠……?”
“그럼 사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로잡으면?”
“그야 사천… 아……!”
말하다 보니 당지명 역시 깨달을 수 있었다.
“알겠냐? 사천 성주는, 특히나 사천삼주라면 언제 쥐잡듯 때려잡을 수 있을까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양반이지. 우리가 만약 그놈들을 관아에 넘긴다면 좋다며 달려 나와서 받아 갈걸?”
그리고 사천삼주를 차례대로 조리돌림 하기 시작하겠지.
무섭다, 무서워, 사천 성주.
십만 사천 무림인들의 목숨으로 천마신공을 대성했을 사천 성주에게서 피어나는 것만 같은 핏빛 휘광을 한 번이라도 봤으면, 제아무리 잘난 아.청.점 동맹이라도 함부로 나대지 못하겠지.
“…그럼, 제가 한 건?”
“뭐긴 뭐야. 뻘짓이지.”
“아… 아아…….”
털썩―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제 자리에 무릎 꿇는 당지명.
“그럼 그렇지.”
“어휴, 당주 형님이나… 불퇴나.”
“아니, 나는 왜?!”
퍼부어지는 야유가 그를 철저하게 매몰시켰다.
그리고,
‘뭐, 사실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유혼은 한바탕 소란에서 고개를 돌려 부쩍 가까워진 사천을 눈에 담았다.
참 간만에 돌아오는 집이었다.
* * *
기다리고 기다리던 당가로 복귀.
그립고 그립던 집으로 돌아왔으니,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갔다가 맛있는 것 왕창 먹고 푹신한 침상에 몸을 뉘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해서 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
“직계 당유혼 외 서른세 명의 차양당 방계. 모두 이상 없이 복귀했습니다.”
그들이 당가로 돌아왔다고 공식적으로 보고하는 것.
근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는 꼬장꼬장한 표정의 당궁상을 곁에 세운 채, 마찬가지로 한 달 만에 보는 데도 여상한 표정으로 그들을 반기는 당위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운 협행과 명성이 벌써 이곳 사천에도 자자합니다.”
감숙에서 있었던 추풍대와의 혈전.
추풍대가 어디 잡도둑들의 무리도 아니고, 무림 북방에서 흉흉한 악명을 떨치던 이들인 만큼 그들과의 승전보는 전 무림의 호사가들에게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비록 예전 전성기의 추풍대 전력에 십 분지 일도 되지 않는 상태라고 해도, 감숙과 붙어있는 사천에는 이제 막 약동하는 당가의 이름을 한 번 더 울려 퍼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심신의 피로를 풀고 푹 쉬도록 하지요. 사천 내의 숙수들을 모아 크게 잔치를 열어볼까 합니다.”
“와아아아아아!!”
“가주님! 가주님! 가주님!”
수련 열외.
무제한의 휴식.
맛있는 음식!
역시 그들의 가주시다.
천마를 향한 마교도의 신앙과 같이.
방계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당위혼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오늘도 가자마자 지옥 수련을 예고하고 있던 당유혼의 압제에서 벗어난 그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아니, 이 자식들이 뭘 했다고 놀아? 내가 다 했는데?
그런 말들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지만, 그래도 자리가 자리인지라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꿀꺽 삼켰다.
한편, 그런 시선을 이해한 당위혼은 쓰게 웃으면서 자신의 어린 형님을 마주했다.
“그리고, 형님께는 저와 따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에 당유혼은 당장 답하기보다는 좋아서 날뛰고 있는 방계들을 일견했다.
그러다가,
“그러지. 그리고 당지명.”
“축제다! 오늘은 그냥 먹고 죽는… 넵? 저요?”
누구보다 날뛰고 있는 당지명을 콕 집어 호명했다.
“넌 따라와, 인마.”
“예, 예??”
전 왜요?!
“가, 가주님께서는 대형을…….”
“얘까지는 데려가도 되지?”
“…그러시지요.”
반 호흡 늦게, 알 듯 말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가주의 승낙에 당지명은 절망했고,
“우와아아아아아!!”
“축제다, 축제!!!”
아무튼 내 일은 아닌 듯한, 방계들은 연신 환호를 내질렀다.
그렇게, 당유혼은 도축장 끌려가는 소처럼 축 처진 당지명을 잡아채 가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왜 나만?!’
그리고, 울분에 차서 오늘은 한마디 해야겠다 빼액- 거리려던 당지명은…….
‘……?’
달칵―
문이 닫히자마자 갑자기 뒤바뀐 집무실의 공기에 벌리려던 입을 그대로 꾹 다물고 주변의 눈치를 봤다.
“앉으시지요, 형님.”
아까까지의 미소는 어디 가고 딱딱히 굳은 표정의 당위혼이 자리를 권하고, 당유혼 역시 그의 맞은편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입을 열었다.
“역시, 사천삼주 때문이겠지?”
‘사천삼주?’
조금 전까지 저도 모르게 잊고 있던 그 단어에 당지명은 깜짝 놀라 허리를 바로 펴고 섰다.
가주 당위혼.
총관 당궁상.
대형 당유혼.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이미 예상 했다는 듯 덤덤히 그 안건을 꺼내고 있었으니, 당지명은 이제야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당위혼은 한 장의 서찰을 탁자 위로 올렸다.
그것은…….
“사천지회(四川之會)의 초대장입니다.”
사천지회(四川之會).
그것은 어찌 보면 당가와 가장 연관이 깊고도, 가장 연관이 없던 단어였다.
“…아실 것입니다. 사천지회는, 과거 삼십 년 전 본가가 주도하여 사천인들의 회합을 도모했던 장이었음을.”
한때는 분명 그런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옛말.
“본가의 위상이 추락한 이후, 사천지회는 현재의 사천삼주들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그건, 마교의 겁난으로 폐허가 될 뻔했던 사천에는 실로 홍복인 일이지만…….”
그 자리에 더 이상 사천당가의 자리는 남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초청받지 못한 것도 어언 십 년이 넘은 일. 그렇기에 먼발치에서 사천 제일의 축제를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사천당가인데, 지금 그 초청장이 도달한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함정일 거다. 알지?”
“…좋은 뜻은 아니겠지요.”
초청장을 줄 거면 진작 줘야지.
당가에 초대장이 온 시기도 공교롭다.
“이 주일 전에 당도한 초대장이라면… 우리가 그놈들에게 물을 먹인 뒤로군.”
산적으로 변장해서 습격했다 실패하니, 이제 이런 잔수작을 부리는구만?
‘참 녀석들답다면 녀석들답다고 해야 할까.’
팔짱을 낀 당유혼이 멀뚱히 초대장을 바라보고 있자, 바싹 얼어있다가 돌아가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던 당지명이 겨우겨우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