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적웅의 안내에 따라 배정받은 곳은 어느 천막 안이었다. 바닥은 평평하고 중앙에는 화덕이 있었으며 동물의 가죽이 깔려 있어 푹신하진 않아도 적당히 누워 쉴 수 있었다.
“으아아아!! 휴식이다!!”
“아이고, 삭신아!”
인내에 익숙해진 것일 뿐, 황무지를 무거운 마차 끌고 달린 피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방계들은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에잉, 쯧쯧. 나약한 놈들. 뭐 했다고 그렇게 힘들어해?”
‘…그럼 니가 해보시든가요.’
‘악독한 새끼…….’
혀를 차는 당유혼을 향해 방계들은 속으로 훈훈한 덕담을 뱉었지만 만면에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대형도 누워봐요. 여기 가죽 엄청 푹신푹신한데요?”
“저기 화덕 열기도 잘 와 닿아서 뜨끈뜨근해요.”
“우리 이렇게 된 거 꼬치구이나 해 먹을까요?”
“…그럴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일단은 배부터 채우자는 말에 당유혼도 혹해서 동의하니 당지명이 짐가방에 주섬주섬 고기를 꺼냈다.
오다가 캔 약초와 버섯들을 교차로 끼워서 화덕에 집어넣으니, 고기 굽는 냄새가 피어올랐다.
“캬, 냄새 좋고~”
천막은 화덕 위쪽으로 연기가 빠져나갈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위로 흩날리는 연기를 보고 있자니 어느새 고기가 다 구워졌다.
가져온 마실 것들도 하나둘 꺼내서 슬슬 판을 벌이고 있자니, 문득 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응?”
그 기척의 주인은 입구를 서성일 뿐, 들어오지 않고 망설이기만 했다.
‘뭐여?’
궁금함은 참지 못하는 당불퇴가 다가가 천막을 벌컥 열자,
“우아앗?!”
어린아이의 비명 소리와 함께, 천막 뒤에 있던 소년이 발라당 넘어졌다.
“잉?”
이건 또 뭐여?
뭔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아니, 왜 얘를 놀라게 하고 그러냐?”
“쯧쯧……. 당가의 푸른 야수라더니, 그냥 짐승이 따로 없구만?”
뒤편에서 이어지는 비난 세례.
“내, 내가 뭘요?!”
“변명하지 말고 저기 꼬마나 좀 살펴봐라.”
“아니…….”
억울함이 치솟았지만, 일단은 넘어진 꼬마를 살피는 게 우선.
달달 떨고 있는 소년을 보고 있자니 불퉁했던 마음도 누그러드는 것만 같아 당불퇴는 머쓱하니 아이에게 손을 내뻗었다.
“쩝,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그런데 넌 누구니?”
“그… 죄, 죄송해요……. 마, 맛있는 냄새가 나서…….”
“맛있는 냄새?”
이민족 소년은 고개를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꼬르륵―
“…아.”
아이의 배 속에서 울려 퍼지는 뱃고동이 모든 설명을 대신했다.
‘이 녀석.’
엄청 굶었구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 당불퇴가 아이를 일으키며 천막 안으로 이끌었다.
“자, 먹어.”
꼬치구이 하나를 쥐여주니 이민족 소년이 눈을 크게 떴다.
“예, 예?”
“먹으라고. 뜨거우니 조심해서 먹고.”
“저, 정말이에요?”
“그럼 뭐… 먹을 것 가지고 장난칠까?”
그러면 천벌 받어.
직접 먹는 시늉까지 해 보이자 소년은 조심스레 맨 위에 있던 고기 한 점을 뜯어먹었다.
그리고…….
“…마, 맛있어……!!”
“흐흐, 그렇지?”
내가 야전 요리 내공이 얼마인데?
그들 대형에게 배운 것 중 무공 다음으로, 아니, 솔직히 가장 쓸모 있다 여기는 게 바로 이 당유혼식 야전 요리였다.
“많이 먹어.”
당불퇴가 낄낄 웃으며 말하자 소년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소년은 옆구리에서 꼬질꼬질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더니 조심조심 꼬치구이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응? 왜 안 먹어?”
“그… 그, 어, 엄마 가져다드리려구요…….”
“엄마? 아…….”
그 말에 당불퇴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니 이민족 소년은 납치당했던 이민족과 크게 다를 게 없을 정도로 홀쭉했다. 아이가 이 정도인데 어미는 어떤 수준일까?
답이 뻔한 질문에 당불퇴가 우두망찰 서 있자, 뒤편에서 당유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천막 하루 종일 열어놓을 거냐?”
“대, 대형…….”
그 말에 당불퇴는 당황해 입을 열 수 없었다. 이들을 돕고 싶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
“뭘 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나가서 야산에서 멧돼지라도 하나 잡아 오든가. 아니면, 우리가 가져온 거라도 풀든가. 그 인신매매범 새끼들한테 뺏어온 건 뒀다가 엿 바꿔 먹기라도 할래?”
“…대, 대형?!”
설마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가. 니들도 눈치 그만 보고.”
어느새 당불퇴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당율기와 당지명도 신이 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다녀오겠습니다!!”
“저, 저도!!”
소년의 등장 이후로 좌불안석이던 방계들이 자신의 허락이 떨어져 벌떡 일어서 천막 밖으로 뛰쳐나가자 당유혼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런 멍청한 것은 어떻게 물려받는 거야? 피를 물려받은 것도 아닌 놈들이.”
이런 이민족 사회에 방문했다가 가지고 온 암기와 독까지 팔아서 도와주고는 하던 멍청한 짓거리.
그것은 삼십 년도 더 전에부터 종종 봐왔던 당가놈들의 종족 특성이었다.
- 혼은 이어지니까요(流魂).
당유혼은 그저 쓰게 웃으며 화덕에서 꼬치 하나를 더 꺼내 입 안에 밀어 넣어 질겅질겅 씹어먹었다.
그렇게 바깥이 소란스러워질 때까지도 속을 채우고 있자니, 천막 밖에서 또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
“들어오세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리 말하니, 천막이 열려 젖혀지고 초로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적철성. 붉은 바위 일족의 장로였다.
“내가 올 줄 알았나 보군.”
“뭐, 슬슬 오지 않을까 싶기는 했죠. 앉으세요.”
적당히 자리 한 군데를 안내하고는 꼬치구이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드실래요?”
“괜찮네.”
“그쪽도 꽤 굶으신 것 같은데요?”
“어차피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 며칠 굶어 그날이 빨리 다가온 들 무슨 상관이 있겠나?”
덤덤한 모습에 당유혼은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그 말에서 이 노인이 느끼는 죄책감과 자괴감이 깊숙하게 묻어나왔지만, 그것은 외부인인 자신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대신 물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맞나요?”
“그렇다네. 그리고,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자네들이 뜻하는 바를 이루기 힘들 수도 있다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적철, 채광하지 못한 지 꽤 됐죠?”
“…짐작대로일세.”
짐작되는 이유야 여러 가지였다. 그중 가장 가능성이 큰 걸 따지자면…….
“중원인들 때문인가요?”
그 인신매매범 놈들. 아무래도 그것이 이유가 아닐까 싶어 물었다.
“그것도 틀린 이유는 아닐세.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이유가 더 크다네.”
“다른 이유요?”
그건 예상 못 했는데…….
적철성은 자신의 예상이 빗나감에 의아해하는 당유혼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디 우리 일족은 붉은 바위산에서 살아가는 이들일세. 그곳에서 나는 자연의 은혜에 기대어 삶을 영위해 왔지. 하지만, 일 년 전부터 그곳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타났다네.”
“무시무시한 괴물……? 그게 뭐죠?”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등장.
그것이 모든 쇠락의 근원이었다.
“처음은 약초꾼이었네. 붉은 바위산을 타며 약초를 캐던 이들이 하나둘 실종되었네. 이따끔씩 그곳의 맹수들에게 물려가는 이도 있어서 처음에는 그저 안타까운 일이라 여겼지만… 그건 모든 일의 전조였지.”
“그다음은 사냥꾼이었나요?”
“그렇다네.”
처음엔 무력이 부족한 약초꾼이었지만, 그다음부터는 맹수를 잡아 고기를 구해 오는 사냥꾼들도 실종되기 시작했다.
맹수를 잡는 사냥꾼이 맹수에게 잡힌다?
그 이상한 일들이 반복되자 붉은 바위 일족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일족의 전사들을 보냈었네. 하지만, 그 전사들도 하나둘 실종되기 시작하며 일이 커졌지.”
“인신매매범들이 나타난 것도 하필 비슷한 시기고?”
“…안 좋은 일은 겹쳐서 나타난다는 말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지.”
시기도 공교롭게도, 하필 일족의 전사들이 줄어들기 시작할 때 인신매매범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생업이 걸린 붉은 바위산의 일도 확인해 봐야 하는데, 일족을 지켜야 할 전사들도 따로 분배해야 했다.
사달은 그렇게 일어났고, 붉은 바위 일족의 대전사이자 일족 비술의 계승자인 적웅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다가 결국 납치된 동족을 구하기 위해 일족을 떠나게 되었다.
“다들 잘 먹지도 못하고 잘 쉬지도 못하는 건 그 때문이었군요.”
인생… 뭐 이렇게 하는 일마다 쉽게 되는 게 없어?
‘북쪽에서는 마적 떼와 얽히고 남쪽에서는 정체불명의 괴물이야?’
어처구니가 없어 당유혼은 실소를 흘릴 뻔했지만, 적철성의 침울한 표정을 보자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 찾아온 이유도 뻔하겠네요.”
“…그렇다네. 은인에게 이런 부탁을 하여 감히 할 말이 없네. 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의 목숨을 바쳐도 감히 갚을 수 없는 빚이네만…….”
차마 인간의 도리로 꺼내기가 버거웠지만, 또한 일족을 책임지는 장로의 입장에서 적철성은 내장이 끊어지는 심정으로 결국 그 말을 뱉었다.
“부디, 그 괴물을 토벌해 줄 수 있겠는가?”
* * *
붉은 바위 일족.
일 년 전부터 연이은 악운으로 우울한 분위기만 감돌던 그들의 마을에 정말 오래간만에 축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자, 자, 한 명씩 오세요!”
“아직 남은 고깃국은 많아요! 밀지 많고 오세요!”
“아니, 아저씨! 그렇게 급하게 오면 앞에 애가 넘어지잖아!”
몰린 인파의 중심에 있는 것은 당가의 방계 삼 형제들. 그들은 큼지막한 가마솥에 온갖 약초와 고기를 때려 넣어 팔팔 끓인 국을 붉은 바위 일족원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며칠을 굶은 이들이 수두룩한 그들은 처음에는 그들의 행위에 경계했지만, 그 구수한 냄새에 얼마 버티지 않아 하나둘 나와 낡고 부서진 나무 그릇에 한 국자씩 받아가 허겁지겁 들이켜기 시작했다.
“캬, 이 잡탕국은 진짜 획기적인 놈이란 말이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거대한 나무 몽둥이를 국자 대용으로 휘휘 휘젓고 있는 당불퇴는 감탄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만들기도 간단하고, 이 많은 이들 배 채우기도 좋고.”
동감한다는 듯 함께 국을 끓이는 둘 밑에서 열심히 불을 지피고 있는 당지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마. 그리고, 그 인간쓰레기 놈들이 먹을 것을 많이 가지고 있어 다행이다.”
처음에는 사냥을 나갈까 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건량이나 말린 고기들이 제법 풍족해 빠르게 국을 끓일 수 있었다.
이민족이 사는 곳이 애초부터 산과 가까워, 당장 배를 채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풀뿌리 등을 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에 매우 뿌듯함을 느끼고 있자니…….
“엥? 그 인간쓰레기 놈들 잡으러 가자는 것에 반대했던 사람이 누구였지?”
“아, 아니 그건……!!”
상황이 상황이었잖아?!
“됐다. 불퇴 네가 이해해. 이제 우리 당주 형님도 가진 사람이 된 거지. 원래 가진 사람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잘 나누지도 못한다잖아?”
가만히 있던 당율기의 지원 사격.
“아, 그런가? 어쩐 지 요즘 입는 옷도 자기만 달라진다더니…….”
“달라지긴 뭐가 달라! 니들이랑 똑같은 옷 입는다, 이 자식들아!!”
이 망할 놈의 가문. 어떻게 된 놈들이 틈만 나면 하나 묻어 버리려고 하는 거야?!
배신감에 가득 찬 당지명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댈 때,
“…은인들께 또 은혜를 받게 되는군요.”
그들의 소란 속에서도 뚜렷이 들리는,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