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적 소저가 여긴 웬일이십니까?”
아까는 울면서 달려가더니…….
눈을 껌뻑이며 그리 묻자 적세희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걸 받아주세요.”
“에… 이건?”
그것은 작은 가죽 주머니였다. 안에는 돌멩이 같은 게 담겨 있는 듯했고, 뭔가 싶어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호를 새겼습니다. 제가 익힌 일족의 비술입니다.”
“…어, 그건 또 다른 무공 같은 겁니까?”
“비슷합니다. 다만, 저희들은 이걸 주술이라고 부릅니다.”
적세희는 슬픈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제 수양이 아직 얕아 그리 강대한 주술을 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과연, 가죽 주머니에서는 신기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당불퇴는 당최 이게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래도 그녀가 뭔가를 해줬다는 사실에 히죽 웃었다.
“거, 고맙게 받겠습니다. 사실 아까 아가씨가 울면… 웁?”
그런데 당불퇴가 그리 웃으려는 순간, 무언가 부드러운 감촉이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우, 우웁?!”
당황한, 그리고 무언가 막힌 듯한 숨소리.
마침 구름 사이로 몸을 숨긴 달은 그 모습을 제대로 비추지 못했고, 별빛 아래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포개어졌다.
그래서,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날이 밝았다.
맑은 새소리와 함께 일어난 방계들이 기지개를 쭉 켰고, 밤새 명상을 통해 몸의 상태를 최고치로 끌어 올린 당유혼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군. 잘들 잤… 저 자식 저거, 상태가 왜 저래?”
“뭐가 말입… 뭐야, 불퇴 왜 저래?”
“그러게요. 원래 이상한데, 오늘따라 상태가 더 이상합니다.”
방계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두 눈이 퀭한 채 잠 한숨 자지 못한 듯한 당불퇴가 있었다.
“뭐야, 너 설마 쫄았냐?”
“무서워서 못 잔 거야?”
“쯧쯧. 온갖 배짱은 다 부리더니… 괴물은 무서웠니?”
“…….”
방계들의 놀림에도 당불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 새끼, 저거… 두고 가야 하나 진지한 생각이 들 때,
“기침들 하셨소?”
그 순간 천막 밖에서 적철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오셨네. 들어오세요.”
당유혼이 소리치자 적철성이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뒤편에는 함께 따라온 곰 같은 남자, 적웅이 있었다.
“헤에, 뭘 그리 많이도 챙기셨대?”
“도움이 될 만한 물품이요.”
적웅은 몸만 덩그러니 온 게 아니라 봇짐을 잔뜩 챙겨왔는데, 그것이 꽤 묵직한지 바닥에 내려놓자 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붉은 바위산 안에는 온갖 독물이 많이 살고 있소. 장로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대들은 그에 관해 해박한 지식이 있다 하여 우리 일족이 가지고 있던 약초들을 전부 가지고 왔소.”
“아하, 우리라면 상황에 맞게 잘 쓸 수 있을 테니까?”
확실히, 독에 대한 내성을 잔뜩 기른 그들이라지만 오만하게 모든 독이 무용하다고 깝죽거릴 생각은 없었다.
당유혼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가 준비해 온 것은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불퇴… 아니다, 지명아. 니가 챙겨라.”
“알겠습니다.”
자연스레 몸 하나는 튼튼한 당불퇴에게 맡기려 했지만, 오늘따라 상태가 영 아니어서 맡기기가 좀 찜찜해 적당히 역할을 바꿨다.
“바로 출발하나요?”
“나는 괜찮소. 다만 그대들은 어떠한지 모르겠군.”
“우리도 지금 당장 출발하는 게 좋겠네요.”
그렇게 출발은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일족들로 인해 한산한 마을 사이를 가로질러 붉은 바위산으로 떠났고, 입구의 초입에서부터 무성한 수풀이 반겨줬다.
그 선두에 서서 길 안내를 겸하는 적웅이 말했다.
“조심해야 하오. 이곳에는 독물도 많지만, 온갖 맹수도 많소. 우리 일족의 사냥꾼과 약초꾼들이 한동안 그 수를 줄여놓지 않았기에, 더더욱 놈들이 수를 불렸을 수 있소.”
“독물이라…….”
당유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운남의 독물이라면 인정해 줘야지.”
“대형. 운남의 놈들은 좀 다릅니까?”
가만 듣고 있던 당지명이 물어왔다.
“내가 다른 곳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운남의 독물은 니들한테 만만히 보라고는 못 말하겠다.”
그 정도라고?
방계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당유혼은 앞을 향해 걸어가며 첨언했다.
“독물도 급이 있고, 운남의 독물이라면 독물계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거든.”
“…서책에서 읽어는 봤습니다. 운남의 독물이 독하다고.”
“그렇지. 남만 만큼은 아니지만, 이놈들도 다들 극독을 품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다른 지역에서는 깊은 산에 들어가야 할 놈들이 여기는 산의 초입에서부터 빈번히 나타났다.
예를 들자면,
“딱 이런 놈이 대표적이지.”
당유혼의 손이 섬전처럼 뻗어졌다.
그것은 막 그들의 머리 위에서 당지명을 노리고 덮쳐들던 뱀의 목을 잡아챘고, 당지명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키학!!”
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목을 단단히 움켜쥔 당유혼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홍두사. 머리가 붉은 게 특징이지.”
“이건… 홍련화의 원료로 유명한 독사가 아닙니까?”
독에 대한 지식이 가장 해박한 당율기가 놀란 눈으로 녀석을 노려봤다.
“복용하면 한 시진 만에 붉은 열꽃이 전신에서 피어나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극독… 때문에, 용독문에서 가져온 것 중에도 얼마 있지 않은 것이었는데…….”
“그런 게 흔히 널린 게 바로 이곳, 운남이란 뜻이지.”
당유혼은 뱀의 머리를 가져온 가죽 주머니 앞에다 대고 꾸욱 눌렀다. 그러자 이빨 사이에서 독액이 뚝뚝 흘러내렸고, 그걸 충분히 담아낸 뒤에는 머리를 짓눌러 터트렸다.
“홍련화의 주재료는 홍두사의 극독이지만, 홍두사의 극독으로 만들 수 있는 게 또 홍련화만은 아니지.”
당유혼은 머리 잃은 홍두사의 시체를 대충 아무 데나 던져 버리며 말했다.
“종족의 진화는 환경 요인에 크게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이놈의 독은 이놈이 살아가는 주변 또 다른 독물들의 독을 치료하는 치료제가 되지. 어때요, 아저씨가 가진 주머니 중에 홍두사의 독이 있으시려나?”
이야기의 화살이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적웅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일족 중에 놈의 독을 다룰 수 있는 이는 없소. 진정 대단한 독인이시구려.”
“뭘요. 이건 이제 기본이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모습들에 방계들은 오싹해졌다.
그들 스스로가 독에 대한 면역이 제법 생겨서 자신감이 붙었지만, 홍련화쯤 되는 독은 그들에게도 위험할 수밖에 없는 극독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들의 긴장은 한 층 더 강해졌다.
그렇게 찾아온 침묵 속에 당유혼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아저씨.”
“말하시오.”
“그 괴물이란 놈에 대한 정보는 뭐 없어요?”
“흠…….”
적웅은 잠깐 생각하는 듯 침음을 흘리다가 말했다.
“놈은 크고 무겁소. 그리고 날래오.”
“그건 무슨 뜻이래요?”
“녀석의 족적이 남겨진 곳을 발견했소. 땅이나 나무 밑동에 새겨져 있었는데, 새겨진 크기가 크고 깊이가 매우 깊었소.”
그것은 괴물의 동체가 크고 무겁다는 뜻.
다만,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그 개수가 많지 않았소. 긴 거리를 불쑥불쑥 뛰어다니는 듯하오.”
“크고 무거운 놈이 날래기까지 하다?”
그건 좀 희한한데…….
대충 짐작 가는 목록을 꼽고 있을 때 적웅이 첨언했다.
“또한, 놈은 강한 독을 지니고 있는 듯하오.”
“독?”
“그렇소. 녀석에 흔적이 남은 곳에 나무며 바위들이 녹아내린 흔적이 있었소.”
“녹아내렸다라…….”
물리적인 효과가 꽤 강한 독이잖아?
목록이 점점 수를 좁혀가자 당유혼의 눈 역시 주변을 훑었다.
“놈이 사는 곳이 여기는 아닌가 봐요?”
“어떻게 알았소? 아주 가끔씩 이곳까지도 나오지만, 놈의 영역으로 생각되는 곳은 이곳에서도 제법 들어가야 하오. 뭐… 정확한 녀석의 영역으로 들어간 적은 없지만.”
“흐음… 그렇단 말이지.”
당유혼의 머릿속에서 추측되는 목록이 한 손으로 좁혀졌다. 그리고 그 목록들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놈이든 쉬운 놈은 없잖아?’
준비가 꽤 필요하겠어.
그렇게 세 시진쯤 더 나아가며 이런저런 독물들과의 조우를 행하다, 당유혼이 불쑥 멈춰 섰다.
“여기쯤이면 좋겠다.”
“예? 무슨 일 있습니까?”
바짝 긴장한 당지명이 묻자 당유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변을 돌아봐라. 뭐가 보이냐?”
“그야…….”
무성한 수풀이 보이는데요?
뭘 가리키나 싶어 의아해하자 당유혼은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퍼억―
“악! 왜 때리십니까?!”
“쯧쯧, 내가 니들한테 뭘 가르쳤나 싶다. 다 독초로 가득 한 게 안 보여?”
“그, 그야…….”
확실히 많기는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 열 가지 식물이 있으면 그중 둘 셋이 독초였는데, 이제는 열 가지 식물이 있으면 그 열 가지 전부 다 독초였다.
“캐라.”
“…지, 지금요?”
“그래.”
두 번 말하리?
“아니…….”
우리, 급한 거 아니었어요?!
눈빛으로 항변하는 당지명에게 당유혼은 혀를 쯧쯧 찼다.
“어리석은 것. 이게 다 이유가 있으니 니 녀석은 시키는 대로 해. 그리고… 인원을 셋으로 나누는 게 좋겠네.”
일행을 슥 둘러본 당유혼이 손가락을 들어 차례로 둘씩 짝지었다.
“네가 이 아저씨랑 같이 가. 율기랑 불퇴는 같이 움직이고.”
“…어째서입니까?”
“이 아저씨는 독에 대해 잘 모르잖아. 니가 알려줘야지.”
“아…….”
그렇게 인원 편성이 끝이 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갑작스러운 독초 캐기에도 적웅은 이렇다 할 반발을 보이지 않았고, 얌전히 조 편성대로 흩어졌다.
“…그럼, 가시겠습니까?”
“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알려주는 대로 하겠소.”
당지명과 적웅의 어색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가자.”
“으, 응…….”
오늘따라 이상한 당불퇴와 당율기의 동행도 시작되었다.
* * *
처음엔 당율기도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독물 캐기가 시작되자 점점 신이 나기 시작했다.
‘이건 구지흑엽초? 구엽초 중에서도 변종인 녀석이라 쉽게 보기 힘든데… 여기선 꽤 흔히 보이는구나?’
당율기는 신기해하며 그것들을 채집하는데, 문득 당불퇴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우뚝―
그래도 형제라고, 몹시 신경 쓰여 바삐 놀리던 손을 멈추었다.
“불퇴. 무슨 일 있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진짜 아니다…….”
영 이상하지만 당불퇴가 그리 말하니 뭐라 더 말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리 고개를 돌리는데,
“…저기, 율기야.”
얼마 안 있어 들려오는 목소리.
“왜?”
다시금 고개를 돌리자,
“아, 아니야…….”
잔뜩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다시금 당불퇴가 말을 얼버무린다.
‘뭐야 이 자식?’
어처구니가 없어 노려봤지만, 땅에 고개를 처박은 당불퇴의 표정을 알 수는 없었다.
결국 다시 독물 채취나 하려는데,
“저, 저기, 율기야.”
“아, 왜?!”
“그… 아, 아니야…….”
“아니, 이 새끼가 진짜?!”
신개념 짜증 유발인가?
울컥해서 한 대 치려다 꾹 참고 다시금 독물을 캐려 하는데,
“어, 어? 유, 율기야?”
또 목소리가 들려온다.
“…….”
이번에는 무시.
“유, 율기야!! 나, 나!!!”
이번에도 무시.
“율기야!! 나, 나 좀!!!”
계속해서 무시하려는데…….
“나, 나 떠오르고 있어! 나, 날고 있다고!!!!”
“아니, 그게 무슨 개 헛ㅅ… 야, 야? 부, 불퇴야?!”
이번엔 무조건 한 대 갈긴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리니, 시선에 보이는 것은 당불퇴의 발뿐이었다.
그게 뭐… 날아 차기를 갈겼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고,
“우와아악!! 이, 이게 뭐야!!!”
어느새 저 멀리 날아가는 당불퇴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녀석의 어깨에 쥔 커다란 새 한 마리도.
그러니까,
“율기야!!!!”
“불퇴야!!!!!”
당율기.
당불퇴.
두 형제의 생이별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