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살려줘!!!”
사알려줘어어―
사알려줘어어어어―
사아아알리어어주어어어어―
힘껏 외친 소리는 점점 길게 늘어지다가 사라졌다.
과연 자신의 소리가 저 지상까지 닿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아득한 높이의 봉우리. 그곳에 당불퇴가 있었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제아무리 무시무시한 적을 향해서도 머리를 들이밀며 달려들 배짱이 있는 당불퇴였지만, 지금은 서 있기만 해도 두 다리가 달달 떨렸다.
당연한 말이었다.
‘이, 이건 싸울 수도 없는 거잖아……!!’
수많은 기암절벽을 오르내렸다고 자부하는 당불퇴지만, 단언컨대 이만한 절벽에 반의반도 해당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어, 어떻게 하지?!”
답은 어미 새에게 내려다 달라는 것이겠지만, 어미 새는 독과 싸우느라 대부분의 생명력을 소진한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하고 떨쳐 일어나겠지만,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미지수.
당불퇴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 * *
당불퇴가 절망에 빠져 있는 동안, 다른 방계들이라고 상황이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율기야. 표정 좀 펴라.”
“형님…….”
당지명이 의기소침해 있는 당율기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벌써 몇 번이나 말했지만, 당율기의 안색은 펴질 생각이 없었다.
“…제 잘못입니다. 불퇴 녀석의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는데……. 함께 간 제가 더 신경을 썼어야 했었는데…….”
무언가 울컥 쏟아질 것만 같은 당율기의 말에 함께 걷던 당유혼이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그런 식으로 따지면 상태 안 좋은 거 아는 놈을 여기까지 끌고 온 내 잘못이지.”
“대형…….”
“불퇴, 그 녀석이 어디 쉽게 뒈질 녀석이냐? 내가 볼 때 그 녀석은 안 죽었으니 그만 구시렁거려라.”
“하지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에 당유혼은 쯧― 혀를 찼다.
“여기 없는 녀석 신경 끄고, 네 앞길이나 똑바로 봐. 녀석보다 더 위험한 건 우리일 테니까.”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그 괴물이란 놈이랑 필히 마주치게 될 거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슬슬 녀석의 영역에 접어든 것 같아.”
당유혼이 손을 들어 저 앞을 가리켰다.
일행의 시선이 그 손끝을 향해 따라가자, 높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 무언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의 정체는,
“…호랑이?”
몸통의 크기가 삼 장에 달하고, 가죽이 핏빛처럼 붉은 거대한 대호(大虎)였다.
하지만,
“무슨 호랑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거지?”
“저건 평범한 호랑이가 아니요.”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적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놈의 이름은 혈호(血虎). 그 가죽이 피처럼 붉으며 가진 힘도 일반적인 호랑이보다 몇 배는 강한 놈이요.”
“그래서, 그 대단한 혈호라는 놈이 하늘을 날아다닌 답니까?”
“…그건 아니요.”
뭐야, 이 양반?
어이가 없는 시선들이 막 쏟아질 때, 당유혼이 비수 하나를 꺼내 들더니 그대로 집어 던졌다.
피잉―
비수는 호랑이의 근처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놀랍게도 혈호는 실 끊어진 연처럼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웅―
그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거대한 동체에 방계들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무, 무슨?! 어떻게 한 겁니까?”
“어떻게 날아다니는 호랑이를…….”
“니들 눈은 무슨 옹이구멍이냐? 잘 봐. 저게 진짜 날고 있던 건지.”
“그게 무슨…….”
당유혼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방계들은 떨어진 혈호의 상태를 살폈다. 놈은 이미 죽어 있는 상태였는 데다, 몸 주변에 투명에 가까운 은실이 걸려 있었다.
“이건… 거미줄?”
당지명은 스스로 그리 말했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무슨 거미줄이 이런 거대한 호랑이를 잡아다 허공에 매달아 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에 멍하니 있을 때 당유혼이 앞으로 나서더니 비수를 하나 더 꺼내 혈호의 옆구리를 쭈욱 갈랐다.
주르륵 흘러나오는 핏물을 가죽 주머니에 듬뿍 받더니 이내 허공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자,
파악!!
가죽 주머니가 터져나가며 그 안에 담겨 있던 핏물이 물방울이 되어 허공 여기저기에 맺혔다.
“지, 진짜 거미줄이잖아?”
“한둘이 아닙니다!”
그들의 예리한 감각에도 잡히지 않다시피 했던 거미줄들은 핏물이 맺혀 빛에 반사된 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천년혈주(千年血蛛)라는 놈이다.”
그중 유일하게 침착을 유지한 당유혼이 입을 열었다.
“피를 먹고 자라는 거미가 천년을 살면 괴물이 되지. 그 크기가 집채만 해지고, 한 방울로 소 한 마리도 거꾸러트리는 극독을 머금게 된다. 그런 주제에, 뿜어내는 실은 얼마나 질긴지, 이런 거대한 호랑이도 허공에 매달아 버릴 수 있을 정도다.”
“우리 일족을 습격한 괴물의 정체가… 천년혈주라는 놈이오?”
적웅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런 듯하네요.”
“그런… 그 정도 크기라면 일족의 사냥꾼들이 어찌 흔적 말고는 놈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오?”
도저히 믿기지 않아 묻자 당유혼은 그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거미의 사냥 방법을 알아요?”
“그… 거미줄에 걸린 벌레들을 잡아먹는 방식 아니오?”
“기본적으로 그렇죠. 하지만, 녀석의 사냥 방식은 알면 알수록 경이로운 수준이죠. 놈은 영악하고 치밀하며 질긴 인내를 가진 사냥꾼이니까.”
단순히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을 먹는다고 말하면 그건 너무나 오만한 표현이다.
“놈은 깊은 굴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몸을 숨기죠. 그리고 자신의 영역 근처에 보이지 않는 함정들을 수십, 수백, 수천 개를 설치해요. 그것들은 함정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놈에게 정보를 물어다 주는 정보원이기도 하죠.”
“우리가 놈을 찾지 못한 이유는, 결국 녀석의 진짜 거처를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란 뜻이오?”
“그렇죠.”
일반적인 거미 굴도 거미의 몸체가 완전히 숨겨질 정도다. 그런데, 집채만 한 크기의 천년혈주 정도 되는 동체를 숨길 구멍은 얼마나 거대할까?
“녀석은 대단한 각력을 지니고 있어 도약력이 엄청난데, 저 거미줄 위에서는 그것이 몇 배나 더 강력해져요. 그것들이 합쳐지면 아저씨가 말한 일족들이 발견한 흔적이 되는 거죠.”
거대한 동체인지라 족적이 남은 구덩이는 상당히 깊게 파여 있는데, 그것들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박혀 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거대한 놈이 거미줄을 타고 허공을 반쯤 날아다닌다라…….”
끔찍하다 싶은 현실이었다.
“…저, 그런데 대형. 불퇴를 구하기 위해서 그 괴물과 마주쳐야 한다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당율기가 아까 했던 말을 상기하며 묻자 당유혼이 혈호의 시체에서 손을 털고 일어서며 답했다.
“벽력조는 높은 고지대에 산다.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에 둥지를 트는 습성이 있는데, 암만 봐도 저게 녀석의 둥지 같거든.”
당유혼이 가리킨 것은 아까부터 보이는 높디높은 어느 산의 봉우리. 그것은 마치 하늘에 닿는 기둥처럼 높게 치솟아 구름 사이를 관통해 있었다.
“그런데, 천년혈주의 흔적 역시 저곳으로 이어져 있으니… 천년혈주가 벽력조를 노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둘의 생활권이 겹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하나를 만나려면 둘 다 만나게 될 거란 뜻이다.”
“…….”
결국은 마주치게 될 것이다.
당유혼의 말에 자리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물론, 그건 단순히 놈을 만나야만 한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 괴물을 잡기 위해 이 산에 들어선 것이니까.
그럼에도 그들이 침묵한 이유는 다른 것.
‘불퇴야. 무사하거라…….’
방계 둘은 그들의 형제가 부디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드디어… 꼬리를 잡았구나!’
적웅의 경우는 드디어 일족의 원수의 꼬리라도 잡은 듯한 기분이었다.
일족의 대전사이자 계승자로서,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는 근 일 년에 가까이 가족과 같은 동족을 하나씩 잃어야만 했다.
그 짙은 무력감을 떨쳐내고, 예리하게 갈아온 원한의 칼날을 꺼내올 날이 왔다는 생각에 마음속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래서였다. 침묵 속에서 그가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질문이 있소. 보아하니 그대는 그 천년혈주라는 괴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듯하니, 부디 추가적인 정보가 있다면 내게 알려주시오. 듣자 하니 놈은 천년을 살아왔다고 하는데, 그럼 영물이라 불릴 만한 상위 존재인 것이오? 가진 신이한 능력은 또 무엇이 있겠소? 외형은 또 어떻게 생겼소?”
갈수록 말이 빨라지는 모습에서 적웅의 심리 상태가 드러났다.
하지만 다급해지는 그와 달리 당유혼은 끈적한 웃음을 그리며 입가를 비틀었다.
“영물은 무슨. 천년 동안 다른 존재의 피나 취해 오며 힘을 길렀으면 마물(魔物)이나 다름없죠. 그리고 능력이나 외형이라면… 이제 보게 되겠네요.”
“이제 보게 된다고?”
흠칫!
그 말에 적웅은 본능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하며 투지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과연 그게 헛되지 않게 사방에서 강렬한 적의가 그의 피부를 찔러 오기 시작했다.
“말했죠? 놈은 자신이 깔아놓은 거미줄을 통해 정보를 수집한다고. 내가 아까 그걸 끊어버리고 핏물을 퍼부어 놨으니 침입자에 대한 충분한 신호가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놈이 가진 능력 중 하나는…….”
파파파팟!!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가 엄습했다.
그 수는 하나둘이 아닌 수십에 이르렀으며, 하나하나가 대호(大虎)에 버금가는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오래오래 살아온 만큼, 데리고 있는 떨거지도 많다는 것이 되겠네요.”
“허…….”
어느새 사방을 꽉 채우며 나타난 거대한 거미무리.
끔찍하리만치 거대하고 기괴한 외형에, 방계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때,
“……?!”
“…헛?”
그 소름을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느껴졌으니, 이번에 그들을 움찔거리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적웅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이 괴물 놈들……. 일족의 원수!!!!!”
적웅은 나타난 괴물들의 존재와 숫자가 두렵지도 않은 지, 오히려 더 강렬한 원한과 증오를 불태웠다.
“오라, 혈웅(血熊)이여……!!!”
콰아아앙!!!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고, 적웅의 전신에서 핏빛과 같은 기운이 솟구쳤다.
그것은 마치 불꽃과 같이 피어올랐고, 단정하게 묶어 정리했던 그의 머리가 풀어 헤쳐지며 마치 망나니의 그것처럼 산발이 되었다.
“크오오오오오오오!!”
저, 저게 뭐야! 싯팔?!
이 자리에 당불퇴가 있었다면 분명 그렇게 외쳤을 법한 모습으로 적웅은 돌격을 시도했다.
“크아아아아아아!!!”
그의 주먹이 가장 가까이 있던 거대한 거미의 머리를 때려 부쉈다.
기세 좋게 나타난 선두의 거미는 미처 반응도 하지 못할 속도로 주먹을 내려찍는 그 일격에 그대로 허물어졌고, 적웅을 감싼 불꽃은 거대 거미의 피를 머금고 더더욱 활활 타올랐다!
“커허허헝!!”
다시금 포효와 함께 또 다른 사냥감을 향해 덮쳐드는 적웅! 그 모습을 보며 당유혼이 입을 열었다.
“뭐 하냐?”
“네, 넵?”
“저놈들을 빨리빨리 처리해야, 멍청하게 납치나 당한 불퇴 녀석을 구해 오든, 엉덩짝을 걷어차 주든 할 거 아냐.”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두 방계가 정신을 다잡았다.
“가서, 다 족쳐.”
떨어지는 사냥 명령.
사냥꾼들과 사냥꾼들의 피 튀기는 접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