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95화 (95/350)

95화

* * *

깊게 내려앉은 구멍 속, 온몸이 삐걱거리는 당율기가 고통을 참고 몸을 일으켰다.

“…다들 괜찮습니까?”

“으으… 난 괜찮아.”

“…나도 괜찮은 것 같소.”

“…나도 괜찮… 꾸엑!!”

“넌 안 괜찮아도 돼, 새꺄!!”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 날아 차기를 얻어맞은 당지명까지 포함해 모두가 한곳에 모여 있었고 다들 큰 부상은 없는 듯했다.

얼마나 아래로 떨어진 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해치운 천년혈주의 시체가 충격을 완화시켜 줬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사람 양심이 있는지 꾸벅 고개를 숙이는 당지명에게로 죽일 듯한 시선이 쏟아졌다.

“하… 됐다, 말을 말자.”

마음 같으면 당장에라도 더 쥐어패고 싶은 당유혼이었지만, 그래도 할 게 많아서 일단은 참았다.

“깊이도 떨어졌군.”

고개를 드니 번쩍이는 빛이 저 높이 있다.

대충 짐작해도 수십 장 깊이는 떨어진 것 같은데, 아직도 주변에서 돌 부스러기가 부스스 떨어지고 있어 암벽 등반으로 탈출하기는 글러 보였다.

그곳에서 한숨을 쉬고 일어선 당율기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아까 먼젓번의 폭발로 지반이 많이 약해진 듯합니다. 그 위에 충격이 더해져서 그대로 무너졌고.”

“내 생각도 그와 같다.”

천년혈주를 위에서 올라타 때려죽였다는 건, 그만한 압력이 수직으로 내리꽂혔다는 뜻이다.

그 거대한 동체와 그 거대한 동체를 때려죽일 만한 힘이 아래로 가해졌으니… 약해진 지반이 무너져내렸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문제는, 그 이상할 게 없는 곳을 어찌 탈출하냐는 것이지만.

“저… 화섭자로 불이라도 켜봅니까?”

위에서 빛이 들어오지만, 이 공간을 전부 밝히기에는 부족했다.

당율기가 조심스레 묻자 당유혼은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그러다 또 폭발이 일어날라.”

그 말에 아까의 폭발이 보인 위력을 잘 실감했던 당율기의 입이 다물렸다. 그런 그를 대신해, 적웅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형제. 우리가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주변을 탐색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불이 필수일세.”

“괜찮아요. 불이 없어도 빛은 만들 수 있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가?”

“이렇게요.”

당유혼의 전신에서 푸른 빛이 솟구쳤다.

그는 마치 반딧불과 같았고, 그것이 괜히 나그네의 길라잡이라는 이명을 가진 게 아님을 증명하듯 어둠을 비추었다.

“어, 어떻게 한 건가?”

“무공으로 했어요.”

“무공이란 굉장하군……!”

절대 대부분의 무인은 할 수 없는 기예지만, 무공을 모르는 적웅은 얌전히 납득했다. 그리고 무공을 잘 아는 방계들은 그들의 대형이니까 그럴 만하지, 라며 또 납득했다.

그렇게, 모두에게 일차적 안심을 선물한 당유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선, 할 일부터 하죠.”

“응? 그게 무엇인가?”

“이놈의 내단… 아니, 독단을 캐내죠.”

“독단…이요?”

지금? 여기서? 이놈을?

모두가 벙찐 표정을 짓자 당유혼은 오히려 역정을 냈다.

“아니, 그럼 여기서 안 캐면 언제 캐? 이 덩치 큰 놈을 사천까지 옮길까?”

붉은 바위 일족이 사는 마을까지만 옮겨도 역사에 남을 기적이겠다.

“…그리 말하면 또 할 말은 없긴 한데.”

“없으면 캐, 인마. 아저씨. 그것 좀 줘보세요.”

당유혼이 가리킨 것은 적웅의 허리춤에 매달린 수렵용 엽도(獵刀)였다.

밀림이나 오지 등에 사는 이들이 쓰는 것으로, 거친 넝쿨을 제거하기 위해 날은 좀 뭉툭해도 단단하고 칼이 무거운 게 특징인데,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저것보단 적웅의 두 주먹을 더 많이 썼기에 지금까진 장식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 빛을 발할 때가 왔다.

“여기 있네만…….”

이 큰놈을 진짜 분해할 수는 있나 싶어 하는 건 적웅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반신반의한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일족의 은인이기에, 얌전히 자신의 엽도를 건네주었다.

“오호, 제법 질이 좋은데요?”

“…일족의 야장 기술은 중원의 장인들에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한다네.”

뿌듯함이 드러나 보이는 그 말에 당유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역수로 역도를 짚어갔다.

‘보자. 천년혈주의 내단이 어디쯤 있더라.’

왕년에 마물이란 놈들을 숱하게 도살해 본 당유혼이었다. 개중 지주(蜘蛛)라 불리던 거미 형태의 마물들에 대한 도축 경험도 수두룩했다.

‘지주라는 놈들의 내단은 대개 상단전이 형성되는 머리나 실을 짜내는 기관이 있는 아랫배 쪽에 있다. 그럼 우선 머리부터 갈라볼까?’

급소라 노려지던 점 쪽을 향해 엽도를 내리찍었다.

쩌억― 소리와 함께 천년혈주의 머리가 갈라지고 아직 남아있는 독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휘유…….”

이미 죽었지만 평범한 사람은 이것만 한 모금 들이켜도 중독되어 사경을 헤맬 것이다. 때문에 적웅과 같은 이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좋은데?”

당유혼은 오히려 씨익 미소를 지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시체에서부터 이 정도 독기가 뿜어져 나오면, 내단의 상태는 최상급이겠어.’

적웅이 준 엽도 끝이 살짝 부식되어 푸시식― 소리를 냈지만, 당유혼은 오히려 내공을 더욱 둘러 칼날을 보호하며 안쪽으로 더더욱 깊게 파고 들어갔다.

- 크르르르…….

사방에서 강렬한 독 기운이 뿜어져 나오자 탐 역시 허기진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오늘은 너도 한번 포식해 봐라.’

녀석을 굳이 제어하지 않고 놔두자 독 기운은 자아라도 지닌 듯 당유혼에게로 빨려 들어왔다. 그런 당유혼을 주변으로 탐이 반쯤 형체를 띄며 나타나 아가리를 쩌억― 벌렸고, 흘러 들어오는 독 기운을 벌컥벌컥 마셔갔다.

덕분에 작업 환경은 한층 더 나아졌고, 엽도를 삽처럼 다루며 미친 듯 아래쪽을 파 내려갔다.

“…찾았다.”

팍―

일정 부분에서 엽도의 끝이 멈추어졌다.

“너구나?”

맥동하는 심장처럼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본체는 죽었지만 그 정수는 아직도 짙은 독기를 뿜어내고 있다.

그리고,

후우우우웅―

그 기운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게 온 피부를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못 해도 수백 년은 먹은 놈이라 이거냐?’

마물의 정수는 스스로 의지를 가진 듯 적의를 뿜어내고 있다. 그게 오히려 기껍다는 듯 당유혼은 찌릿찌릿해지는 기운 속으로 손을 내뻗었다.

질척거리는 시체에 손이 닿자 곧 검은 기운들이 뭉클뭉클 솟구쳐 올랐다. 그건 마치 수백 마리의 뱀들이 머리를 들고 아가리를 쫘악― 벌리는 것만 같았는데, 그걸 빤히 지켜보고 있던 탐이 더더욱 강렬한 기세를 내뿜었다.

- 캬아아악!!

그 기세에 천년혈주의 독단이 지닌 기운은 대경해 이리저리 흩어져 버렸다.

‘서열정리 확실하구만?’

탐은 흩어진 기운들마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뒤쫓아 광포한 포식을 시작했고, 한동안 그 작업이 이어지니 천년혈주의 독단은 저항을 멈추고 얌전히 꼬리를 말아버렸다.

그 틈을 타 독단을 파내니, 무슨 놈의 독단이 사람 머리만 한 크기로 쑤욱― 들어 올려졌다.

“크… 왕건이구만, 왕건이야.”

천년을 머금어온 마물의 내단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수확을 올리자마자 곧장 시체 위로 솟구친 당유혼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심 봤다.”

“지, 진짜 캐오셨습니까?”

“그게 천년혈주의…….”

“가능한 거였구나. 이게…….”

탐에 의해 기세가 억눌렸다지만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독기는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방계들이야 독에 대한 내성이 있어 버텼지만, 적웅은 그 기세를 경시하지 못해 뒤로 몇 걸음을 물러나야 했다.

“이대로 가져가면 부족에 난리가 날 테니까… 좀 처리를 해야겠어.”

그걸 잘 아는 당유혼이었기에 곧장 방계들에게 이번 토벌행 내내 모아왔던 각종 독물과 약초를 내놓으라 명령했고, 그것들이 한데 모이자 꽤 수북한 분량이 되었다.

‘보자.’

그 작업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우선 커다란 나뭇잎이나 풀뿌리 등으로 일차적으로 내단을 감싸고, 그다음에는 땅에다 각종 액체 상태의 독물을 뿜어 질퍽질퍽한 진흙으로 만들어 펴 발랐다.

내공으로 열기를 만들어 그걸 다시 말린 뒤에 거대한 이파리 등으로 몇 겹을 두르고, 또 위에 덩굴을 묶은 뒤에 가져온 가죽 주머니들로 겹겹이 싸 올리니 포장이 완료되었다.

“아주 좋아.”

완성체를 본 당유혼은 만족스레 웃으며 등짐을 메었다.

“가자.”

“어디로 말입니까?”

“어디든 가봐야지. 여기 죽치고 있을 수는 없잖아.”

분진폭발이 일어난데다 저 거대한 천년혈주의 동체가 떨어지며 주변 지형이 대거 변하긴 했어도, 원래 뚫어 놓은 거미 굴의 길은 아직 몇몇 남아있었다.

“그 많은 놈들이 구멍 하나로 올라오진 않았을 테니까.”

“그건… 맞죠.”

어디 거대한 거미 군세가 구멍 하나로만 나왔을까?

나름 합리적인 말에 그들은 거미 굴 여정을 시작했다.

* * *

“그런데, 진짜 지하 굴이 넓긴 하네요.”

여정을 시작하고 몇 시진이 흘렀을까?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지하 굴에 들어왔기에 외부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녀석이 파놓은 것도 있을 테지만, 본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혈이었을 거다.”

“아하.”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자연환경이 만든 아름다운 지형지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끔 수정 같은 게 있어 당유혼이 내뿜는 빛을 반사하여 제법 아름답기도 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는데,

“음?”

적웅이 제자리에 멈춰서더니 무언가를 발견한 기색을 보였다.

“왜 그러슈?”

당불퇴가 따라 멈춰 서며 묻자 적웅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적철일세.”

“오, 진ㅉ… 뭐야, 엄청 많은데?! 저게 다 적철이에요?”

“그렇다네.”

그가 가리킨 곳에는 한 무더기라는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한 어마어마한 광석이 있었다.

물론, 대게 자연 상태의 광물이 그렇듯 돌과 섞여 있기에 부피가 더 커 보였지만, 적철은 자신의 이름이 왜 그러한지 증명하듯 시뻘건 몸체를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대박인데? 이 정도면 수십 년은 쓸 정도겠어.”

당유혼 역시 적철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에 단번에 매장량을 계산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뭐해? 챙겨.”

“…이, 이걸요?”

당지명의 엉덩이를 걷어차 적철 앞으로 밀었다.

“뭐, 그럼 놓고 갈까?”

“아니…….”

“왜, 억울해? 여기 떨어지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억울해?”

“제, 제가 언제 그런 말 했다고…….”

찔끔한 당지명은 억울해하면서도 얌전히 적철 앞으로 다가갔다.

사람이 두 팔을 다 벌려도 안기가 힘들 정도의 크기였지만, 바위 부분만 노려서 비도로 잘 깨니 방계 세 명이 나눠 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대단하시군. 무겁지 않소?”

“뭐… 이래저래 익숙해서요.”

적웅조차 놀랄 정도의 양을 번쩍 든 방계들은 이래저래 많은 감정이 담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운송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아가는데…….

“우와아아악!!”

“까, 깜짝이야!”

“왜 그래?”

별안간 당불퇴가 비명을 질렀다.

“저, 저기……!!”

답지 않게 겁에 질린 그가 가리킨 곳. 거기 있는 것은,

“…해골이잖아?”

이미 뼈만 남은 사람의 유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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