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97화 (97/350)

97화

【 금의환향 】

일천 년 동안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 최악 최강 최흉의 마수 천년혈주를 격파했다.

이제 붉은 바위 일족에게는 행운과 광명만 도사리고 있을 것이니, 그들의 미래는 탄탄대로가 될 것이다.

만세! 만세 만만세!

…라는 일은 당연 일어나지 않았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거잖아?’

실종된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그 괴물 놈을 척결하는 와중 그들의 생업을 책임져 주던 붉은 바위산은 무너져 내렸다.

“그건 대형이 범인… 끄아악!!”

참으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맞잖아? 집채만 한 걸 넘어서 산만 한 괴물을 때려잡는 데 그 정도 피해쯤은.

그래도 사람인지라 다들 불편한 마음은 어찌 못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특히 불편함을 숨기지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뭐, 인마.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지 말고 그냥 말해.”

“악!!!”

전전긍긍 눈치만 보다 한 대 얻어맞은 당불퇴는 결국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눈망울을 글썽이며 입을 열었다.

“저… 대형… 저들은 어떻게 될까요?”

“누구? 저들 일족?”

“네…….”

“글쎄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 그런가요…….”

역시 그렇구나.

시무룩해진 당불퇴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건 결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걸 포기한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또 처맞아도 할 말 다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것과 같았으니, 결국 두 주먹을 꽉 움켜쥔 당불퇴가 고개를 번쩍 들고 입을 열려 할 때,

“안 돼.”

답은 곧바로 들려왔다.

“옙?”

나, 벌써 뭐라 말했던가……?

“뭐, 뭐가 말입니까?”

“니가 하려는 말. 뭐든 안 돼.”

“아니, 왜요?!”

그래도 말은 들어봐야 할 거 아냐?!

울컥한 당불퇴가 반기를 들고 시위를 시작하려 하는데…….

“해봐야 뻔하지. 저들을 사천당가로 데려가자는 것 아니냐? 그곳에서 저들을 보호하자고?”

“그, 그걸 어떻게……?”

“쯧쯧.”

니가 생각해 봐야 내 손바닥 안이지.

전설의 제천대성을 손바닥 위에서 주물렀다는 석가여래처럼, 당유혼은 한낱 중생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넙죽 엎드리고 있던 당불퇴를 내려다보았다.

“네 생각이야 뻔하지만… 네가 생각하지 못한 두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게 뭡니까?”

“첫 번째는 우리의 상황이다.”

“저희의 상황이면… 그래도 저들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당장 생업의 터전을 잃고, 이민족을 노예로 들이려고 호시탐탐 눈치를 보이는 이들에게 위협받는 붉은 바위 일족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어 묻자 당유혼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누구랑 싸워야 되는지 잊었냐?”

“…아.”

노예 사냥꾼들이 얼마나 강하든, 그게 사천삼주보다 강할까?

게다가…….

“그거야, 우리가 곧 무찌른다 해도. 저들이 그걸 반기겠냐?”

“…네?”

“너, 소림에서 사천당가의 상황이 힘들어 보인다고 떠나오라면 떠날래?”

“그건…….”

그제야 당불퇴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쩍 벌렸다.

“뿌리라는 건 그런 거다. 나뭇잎이 다 시들고, 줄기가 위태위태하다 해서 그 뿌리가 자신이 내린 땅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더냐?”

“그, 그렇지만…….”

가뭄이 든 땅이다. 황폐화되다 못 해 재해가 연신 들이닥치는 그곳에 가만있다가는 모두 말라 죽게 될 판.

그곳에서 그들을 그저 방치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쉽지 않은 일이겠지. 하지만 그건 그들 스스로가 결론을 내릴 문제지, 우리가 결론을 내릴 문제는 아냐. 마음대로 구원이랍시고 그런 제안을 하는 것부터가 그들에게는 무시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꾸욱―

주먹을 움켜쥔 당불퇴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 모습에 가만 지켜보고 있던 다른 방계들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그래도 대형. 저 녀석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저희가 그래도 아주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닌 듯한데…….”

당지명과 당율기의 지원 사격이 이어졌지만, 당불퇴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모습이 못내 안타까워 다른 형제들이 적잖이 씁쓸한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불퇴야.”

당유혼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이 멍청하고 멍청한 녀석아. 너는 내가 무슨 말을 한 지 모르겠느냐?”

“…네?”

쯧쯧.

슬쩍 고개를 든 당불퇴의 시선에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당유혼이 보였다.

“네 고민은 내게 말할 게 아니란 소리다.”

“그게 무슨… 아……!”

그제야 뒤늦게 대형의 뜻을 이해한 당불퇴가 눈을 크게 떴다.

“그, 그 말씀은…….”

“되든 안 되든 부딪쳐 봐야지. 날아오는 칼날 앞에는 잘도 머리를 들이밀던 놈이 왜 이제 와서 빼려고 해?”

이름값은 해야지, 인마.

“대, 대형……! 가, 감사합니다!!”

넙죽 엎드리는 당불퇴의 모습에 당유혼은 불퉁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고맙긴 개뿔. 뭐가 되기라도 했냐? 빨리 가기나 해.”

“옙! 다녀오겠습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당불퇴는 벌떡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당불퇴는 그들이 배정받은 천막을 지나, 위령제가 다 지나고서 이제는 꺼진 불씨처럼 타닥타닥 조용히 타오르기만 하는 천막들을 지나 당도한 곳은 그가 지난번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던 어느 천막.

그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숨을 헐떡이며 고민하던 당불퇴는 이윽고 이를 꽉 깨물곤 손을 뻗어 천막의 입구를 잡아갔다.

“적 소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천막의 주인은 적세희.

어젯밤 그녀를 위로하고 홀로 보내기 좀 어색해 데려왔던 이곳에 다시금 찾아온 그가 목소리를 높여 적세희를 부르자, 곧 안쪽에서 답이 들려왔다.

“당 소협? 여긴 어쩐 일로…….”

당황한 목소리지만, 곧 목소리를 다듬은 그녀의 허락이 이어졌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허락이 떨어지자 당불퇴는 곧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안의 풍경은 이미 한번 본 적이 있지만… 참으로 소박했다.

‘역시, 이곳은 너무 쓸쓸해.’

원래는 두 명이서 살기 위해 넓게 지은 공간이기에 한 명이 살기에는 너무나 허전한 공백이 많았다.

한동안 쓰지 않아 먼지 쌓인 집기가 많았고, 원래부터 사치품 따위는 없는 곳이라 남은 공간의 여백이 홀로 있는 그녀를 더더욱 외롭게 보이게 했다.

그런 공간에 발을 들인 당불퇴는 어떤 말부터 해야 할까 고민하다 어렵사리 입을 뗐다.

“잘… 쉬셨습니까?”

“네. 소협 덕분에, 그나마 슬픔을 완연히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

눈부신 미소를 짓는 적세희였지만, 그 미소가 참 아파 보였다.

그래서일까? 처음 이곳에 올 때 하던 고민과 달리 당불퇴는 입이 술술 열리는 걸 느꼈다.

“…소저. 소저는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앞으로 말입니까?”

그 말에 적세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군요. 음… 그래도 다시 저희 일족의 산을 되찾았으니… 일족원들끼리 하나둘 힘을 모아 생업을 꾸려보지 않을까요?”

자신은 이렇게 할 거다, 라고 말하지만 그건 자의에 의한 선택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으니 강제로 그걸 고르게 되는 걸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래서, 당불퇴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소저. 저희와 함께 가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예?”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는 듯, 적세희는 눈을 깜빡이다 뒤늦게서야 답했다.

“그건… 너무 당황스럽군요. 그건 정말이지…….”

답지 않게 같은 말은 반복하던 그녀는 고민하듯 잠깐 눈을 감다가, 이내 슬픈 눈망울로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완곡한 거절.

눈치 없는 당불퇴라 해도 충분히 알아먹을 대답이지만,

“당황스러운 건, 거절은 아니군요?”

당불퇴는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못 알아먹은 척 그녀의 양손을 움켜쥐었다.

“다, 당 소협?”

아, 몰라. 싯팔.

이곳까지 오며 당불퇴는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당불퇴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선 가주님.’

나이는 가장 어리시지만, 그분은 진정 인덕(仁德)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었다. 마치 전대의 어르신들을 보는 것만 같이, 사람을 포용하는 기질이 있어 그 존재감을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함께 당가에 살아갈 만한 따스함을 가지신 분이었다.

‘그런데 그건 내게 없는 것이잖아?’

그래서 다음 후보는 대형이었다.

‘하는 짓은 나랑 크게 다를 바도 없어 보이지만… 아니야. 대형은 머릿속에 뱀 수십 마리를 풀어놓은 귀계를 항상 꾸미고 다니시지.’

분명 무식하게 행동하는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그게 다 소름 끼치는 설계의 연속이었다. 하는 짓에 가려져서 그렇지, 대형은 정말 정말 똑똑했다.

‘내가 뭘 할지도 이미 다 예상하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대형처럼도 무리야.’

그 정도로 지능이 좋았으면 이런 고민도 안 했겠지.

자연스레 다음으로 넘어가면 당주 형님이었다.

‘당주 형님은… 섬세하시다.’

당지명은 당유혼처럼 앞에 나서서 사람들을 이끄는 이는 아니었으나, 그 중심에서 단단히 축을 잡고 주변 이들 하나하나를 챙길 줄 아는 남자였다.

다들 근본 없는 고아 출신인 방계들이 당가로 들어온 날을 생일 삼아 매년 꼬박꼬박 선물을 챙겨주었고, 당유혼이 온 뒤로 매일매일 개처럼 구르는 날에도 어디서 꿍쳐온 약초 등을 생일날 머리맡에 몰래 두는 게 당지명이었다.

‘그래도 좀 모자라서, 몰래 한답시고 하는 행동을 나머지도 다 아는 게 문제기는 한데…….’

그래도 삼재진을 구축할 때도 보면 중심에서 어떤 방계들도 다치지 않게 적절한 순간에 지원을 하는 등, 지금까지 한 명도 중상을 입지 않게 해준 것이 다 당지명 덕분인 것을 생각하자면 그 섬세함도 당불퇴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율기는 말할 것도 없고…….’

율기는 그야말로 자신과 정반대되는 수준이라 아예 시도할 수조차 없다.

그 외에 다른 방계들도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오르다 사라지니, 당불퇴는 결국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의 장점도 내가 지금 여기서 본받아 배울 수가 없구나.’

그렇다면 답은 하나.

‘나는 나답게 행동한다.’

불퇴(不退). 결코 물러서지 않는 것이 그 자신의 정체성.

당불퇴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을 더하며 그녀를 불렀다.

“적 소저.”

“네, 네?!”

더해지는 온기에 적세희가 당황할 때, 당불퇴가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우리 가주님처럼 인덕이 넘치지도, 대형처럼 존재 자체가 경이롭지도, 당주 형님처럼 섬세하지도, 율기 녀석처럼 똑똑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모자란 놈이지요.”

“아, 아닙니다… 당 소협은…….”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비하를 쏟아낸 당불퇴지만, 부끄러움 따위, 한점 없다는 듯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런 저이기에, 제 모자람을 가장 잘 아는 저이기 때문에… 단 한 가지는 자신이 있습니다.”

저는 말입니다.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을 것이고, 쪽팔리는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마음이… 제 마음이 시키는 행동에 눈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합시다. 소저도, 다른 일족분들도 전부. 저희 당가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십시다.”

그 말에 적세희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무수한 걱정과 고민이 떠올랐다.

오랜 일족의 터전이었던 이곳을 떠나자고? 다른 곳도 아닌, 중원의 대도시인 사천에서 이민족이라는 핍박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아무런 연고지 없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그런 무수한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적 소저.”

그 고민들을 산산이 부순 것은,

“함께 합시다.”

어떠한 달콤한 말도 아니었고, 완벽한 지략으로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었고, 섬세함으로 그녀를 포용하는 것도 아닌,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거칠기 짝이 없는 투박한 선언.

설득을 위한 말이라면 참 무성의하다 싶은 말이었지만,

“…정말, 이신가요?”

오히려, 마음에 와닿기에 더없이 진실로 느껴졌다.

“물론입니다.”

가공되지 않은 원석의 반짝임. 아직까지 문명이 아닌,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이들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은…….”

그렇기에 적세희는 수많은 감정을 억누르며 그를 꼭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쿵 뛰고, 얼굴을 타오를 듯 붉게 달아올랐지만 이 순간 꼭 해야 할 말임을 알았기에 입을 열었다.

“제게, 청혼을 하신 건가요?”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숭고한 선언. 그리고, 축복.

그걸 재차 확인하는 물음에,

“…넹?”

단순 무식한 남자 당불퇴, 아니, 그냥 무식한 새끼 당불퇴는…….

“…네에에엡?!”

고장나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