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99화 (99/350)

99화

당가의 어린 가주 당위혼이 당가의 입구로 향했을 때는 많은 이들이 몰려 있었다.

당유혼을 필두로 수십 명에 이르는 인파가 있었고, 그 앞에 막 달려가 사자후를 내지르려다가 멈춰선 당궁상도 보였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군.’

“여~ 가주님. 나 왔어!”

선선히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당유혼 역시 당위혼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왔다.

“무탈한 모습을 뵈어 다행입니다. 먼 길 여정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그러게, 고생 좀 많이 하긴 했지. 빨리 뜨끈한 물에 몸을 풀고 싶다고?”

“이, 이놈이……!!”

당궁상의 눈을 차지하는 흰자위의 비율이 점점 더 높아져 갔다. 보는 눈이 많아 간신히 억제하고 있는 당궁상의 분노 수치가 수위를 넘길 지경.

당위혼이 재빨리 둘 사이로 끼어들어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준비해 놓으라고 하겠습니다. 헌데, 처음 뵙는 분들이 많군요.”

“아, 이 사람들?”

그제야 뒤를 돌아본 당유혼이 붉은 바위 일족을 차례로 소개했다.

“인사들 하세요. 저희 사천당가의 자랑. 고금제이(古今第二) 가주 당위혼 가주님이십니다.”

‘…고금제이라고?’

‘보통 고금제일이라 하지 않나?’

당위혼에게 있어 당연 고금제일 가주는 전전대 가주였던 당사유였지만, 그 속사정 모르는 붉은 바위 일족들은 대충 자신들의 한어 실력이 모자라 그런 갑다… 하고 고개를 숙여왔다.

“가주를 뵙습니다. 붉은 바위 일족의 장로 적철성입니다.”

조부뻘의 적철성이 먼저 고개를 숙이자 당위혼 역시 마주 고개를 숙였다.

“당가의 가주 당위혼입니다. 본가에는 어인 일로 방문하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자, 자, 그 얘기는 여기서 할 게 아닌 듯하네요.”

짝짝―

중요한 순간에 끼어든 당유혼이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우선 다들 피로가 쌓였을 테니까, 우리 얘기할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좀 쉬죠.”

‘하긴…….’

뒤편에 도열한 이들의 눈빛이 무척이나 불안해 보인다. 그 눈빛을 보고도 밖에 서 있으라 할 만큼 모진 사람이 되지 못하는 당위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들에게 머무를 곳을 안내해 주십시오.”

* * *

빠질 사람은 빠지고 실무진이라 부를 만한 이들만 회의실로 향하게 되었다.

당가의 가주 당위혼.

당가의 총관 당궁상.

붉은 바위 일족 장로 적철성.

붉은 바위 일종 대전사 적웅.

그들 사이를 총괄하는 당유혼과…….

‘…우, 우리는 왜 여기에…….’

‘나… 나도 쉬고 싶어…….’

‘나라고 다르겠냐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불편함을 잔뜩 느끼고 있는 당지명, 당율기, 당불퇴 셋까지.

그들을 불러 모은 당유혼은 간단한 상황과 어이하여 이리 오게 되었는지까지를 전달했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뒤 사정을 이해한 당위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제가 비록 모든 중원인을 대표할 수는 없지만…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가주님.”

일족이 노예로 납치될 뻔했다는 이야기에는 당위혼 역시 분노치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당가의 가솔들이 그런 일을 겪었다면, 당위혼이 느낄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테니까.

하나, 그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사죄를 표하며 고개를 숙이자 적철성은 적잖이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우리 일족이 은혜를 입은 바가 적지 않은데 어찌 그리 표하십니까?”

“고럼, 고럼.”

어질어질한 개족보를 만들어 낸 당유혼이 껄껄 웃었다.

당유혼은 적철성에게 존대하고, 적철성은 당위혼에게 존대하는데, 당위혼은 또 당유혼에게 존대한다.

당궁상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으나, 붉은 바위 일족의 사연을 듣고 차마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는 없어 가까스로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다만…….

“헌데, 당가에 의탁하고 싶다고 하셨소?”

“예, 그렇습니다.”

한 가지 부분만은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수십 년 당가의 쇠락 속에 최후의 주춧돌로 가문을 지탱해 온 당궁상에게 그것은 단순 인정을 넘어서는 문제였다.

“…그 말은, 식객으로 머무르고 싶다는 소리요. 아니면 당가의 방계로서 일원이 되고 싶다는 뜻이오?”

그들의 사정은 들어서 알고 있다.

붉은 바위 일족의 맥을 유지하고 싶다면 존중해 주는 게 맞지만, 당가의 방계로서 일원이 되고 싶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느 쪽이든 함부로 허락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쪽이든 해야 할 게 많다.’

삼십 년 전만 해도 이런 일들이 많았다.

그 혼란의 시기 당가에 의탁하려는 이들이 줄을 섰고, 수많은 인력이 각종 행정 처리를 분담해서 해주었기에 막힐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끊긴 지 어언 삼십 년이 넘은 지금에서는 당궁상은 이제 첫 선례가 될지 모르는 일에 표정을 굳히고 진중히 물었다.

‘녀석.’

그걸 잘 아는 당유혼이기에 얌전히 팔짱을 끼며 그 대화를 관망했다.

과연, 적철성 역시 깊게 눈을 감았다 뜨더니 심사숙고를 끝낸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 일족의 처우가 달라진다고 보면 되겠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렇지 않다고 하기가 힘들구려.”

식객과 가족이 되는 건 그만한 차이가 있으니까.

그러나…….

“하나, 그렇다 해서 그대들에게 불이익이 될 만한 일을 만들 생각은 없소. 비록 본가가 예전만 못하다고 하나… 그 의기(義氣)만은 쇠락한 적이 없다고 자부하오. 본가의 그늘 안에 들어온 이들을 외면할 생각이 없소.”

“후후, 애초에 어느 쪽이든 받아주신다는 생각이었소?”

“뭐… 이 노인네가 반대한다고 해도 우리 가주님께서는 차마 그대들의 사정을 듣고 외면하실 분이 아니라서 말이오.”

가만 듣고 있던 당위혼이 옅게 웃었다.

그 모습에 허허, 하고 웃은 당궁상이 이어서 당유혼을 응시했다.

“게다가… 저 놈팡이 놈이 빌어먹은 놈이기는 하지만… 아무나 데려왔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소.”

난 또 왜?

잘 나가다 삐딱해지는 당궁상의 말에 당유혼이 왈칵 인상을 찌푸렸지만, 당궁상은 신경도 쓰지 않고 붉은 바위 일족의 두 대표를 보았다.

“그러니 편히 말씀하시오.”

선택은 자유.

총관으로서 당가를 대표하는 말에,

“과연.”

적철성은 깊이 감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세상은 당가를 잊었다고 들었으나… 나 같은 늙은이는 아직 그때를 기억하고 있소.”

삼십 년도 더 전.

만가쟁패의 시대 이전, 나타협의의 시대 이전.

“협의제일(俠義第一) 사천당가. 아직 그때 귀가의 붉은 의기가 바라지 않았음을 이 두 눈으로 보았으니… 쇠락한 일족의 대표로서 감히 부탁드리겠소.”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중원식으로 힘껏 포권을 취하며 말한다.

“부디, 우리 일족이 귀가의 그늘 안에서 맥을 잇도록 도와주시오.”

* * *

붉은 바위 일족은 결국 식객의 형태로 당가에 머무르게 되었다.

식객은 방계와 달리 당 씨 성을 쓰는 게 아니라 적 씨의 성을 쓰는 형태로 남게 되는 것이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을 남이라 배척하는 일은 없었다.

장인촌을 구축하고 사는 야장들의 구역이 따로 있는 것처럼, 가지고 있는 부지 크기는 엄청나게 넓은 당가의 세력권 안에 그들만의 마을을 만들어주고 그 이름도 적석촌이라고 지어주었다.

“다행히 빈집은 많으니 일단은 거기서 비바람을 피하시면 돼요. 마음에 안 들면 싹 다 밀어버리고 천막을 만드셔도 되고, 아니면 유지보수하셔서 계속 쓰시면 되구요. 수십 년 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곳을 드려서 미안하네요.”

“아닐세. 소협.”

적웅은 허허 웃으며 새롭게 터전이 된 적석촌 입구의 비석을 보며 흐뭇한 시선을 던졌다.

“사실, 많은 배척을 예상했소. 세상 모든 사람이 소협과 같이 호연지기가 있으리라 생각하긴 힘드니까. 하지만, 과연 일족의 장로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소협의 가문은 의기로 가득한 곳이군.”

“킁, 멍청한 놈들 집합소이기는 하죠.”

옛날이나 지금이나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그렇게 속이 근질거려서 미쳐 버리겠는지… 두 발 벗고 뛰어들려고 안달이 난 불나방들의 집합소.

당유혼이 그렇게 표현하자 적웅은 결국 껄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소협도 참 이상하군. 말은 그렇게 불퉁하게 하면서 왜 표정은 항상 그렇게 즐거워 보이오?”

“그런가? 그냥 멍청한 놈들 쥐어팰 생각뿐인데?”

“…그것도 진심이란 게 문제군.”

웃는 모습 그대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적웅이 이내 유지보수와 구획 정하기에 바쁜 일족원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 일족은 결코 받은 은혜를 잊는 이들이 아닐세. 귀가에도 많은 장인이 있다 들었는데, 마침 우리 일족도 장인들이 제법 있으니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겠네.”

“헤… 장인들만요?”

“물론 아니지.”

불끈―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적웅은 자신의 팔뚝을 내보이며 말했다.

“우리도 들어 알고 있네. 귀 가문이 처한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일족의 계승자이자 전사로서 힘이 닿는 곳까지 발 벗고 나서겠네. 나뿐만 아니라, 비록 소수에 불과할지언정 일족의 전사들 역시 힘을 보탤 것일세.”

“흐흐, 든든하네요.”

밥값 확실하구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당유혼이 입을 열었다.

“그럼, 그것과 관련돼서 할 말이 있는데. 마침 아저씨 도움이 필요하거든요?”

“응? 내 도움이 말인가?”

“예. 혹시 말인데요. 무공 익혀 보지 않으실래요?”

“무공? 음…….”

당유혼의 제안에 적웅은 난색을 표했다.

“…내 자네의 제안을 거절하려는 것은 아니네만, 자네는 모르겠지만 우리 일족은 무공을 익히지 못하네.”

“아, 그건 알고 있어요.”

“음? 정말인가? 혹시나 싶어 하는 말이지만, 딱히 일족 내의 율법으로 정해진 건 아니고…….”

“일족 전사들이 익힌 비술의 특성상 무공을 익히지 못 한다구요?”

“어…….”

어떻게?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적웅의 모습에 당유혼은 낄낄 웃으며 손을 까딱였다.

“대충 알 것 같은 게 있으니까 그렇죠. 뭐, 그거 관련해서도 아저씨의 도움이 필요하긴 한데, 만약 익힐 수 있다면 익혀보시겠어요?”

“…혹여 그 무공을 익힌다면 우리 일족의 비술이…….”

“실전될 일은 당연히 없어요. 오히려, 일족의 비술에 도움이 될걸요?”

“허…….”

적웅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보통이라면, 일족의 계승자인 나보다 더 자신 있어 하는 이 모습에 오만하다고 분노를 느껴야 하건만…….’

자신만만한 당유혼의 모습을 보자면, 정말 그럴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믿음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믿음에 적웅은 어째서 방계들이 이 눈앞의 작은 소년이 종종 보이고는 하는 막돼먹은 폭거(暴擧)에도 믿고 따르는지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좋네. 그럼 내가 무엇을 하면 되겠나?”

“일단 자리를 옮기죠. 다들 이사하느라 바쁜 곳에서 하기는 좀 그러니까.”

적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당유혼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밥이나 한 끼 하러 가자는 물음에 응하여 따라가는 듯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지만 적웅은 알지 못했다.

훗날, 이 작은 만남과 시작이 무림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되는 무공의 새 지평을 열게 되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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