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자리를 옮긴 곳은 주변이 탁 트인 공터였다.
당가 밖으로 나가 사천 뒷산의 어느 야산으로 오른 당유혼은 평소 봐둔 장소 중 하나로 적웅을 인도했고, 그곳에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일족의 비술을 먼저 보여주실래요?”
이미 여러 번 봤을 테지만 굳이 요구하는 이유가 있을 터. 적웅은 가타부타 첨언 없이 곧바로 일족의 비술을 발동시켰다.
쿠웅―
무언가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듯한 강렬한 파동이 일며 적웅이 붉은빛으로 뒤덮였다.
혈웅(血熊).
영물로 불리는 상위 존재가 그의 전신에 강신한 것이다.
“어때요. 이성이 유지가 가능한가요?”
“…힘들지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적웅은 잔뜩 핏발이 선 눈으로 겨우 답했다. 하지만, 그건 그라서 가능한 거지, 다른 전사들에겐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다는 듯 당유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제 해제해도 돼요.”
스르르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적웅을 감싸 안았던 붉은 혈기가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에도 제법 부담이 갔는지 적웅은 숨을 거칠게 쉬었고, 곧게 묶었던 머리는 산발이 되었다.
‘과연 부하가 많이 걸리는 수법이란 말이지.’
상위 존재의 힘을 하위 존재의 그릇에 담는 것인 만큼 강신술은 술법 중에서도 비효율적인 면모가 컸다.
‘나는 술법사가 아니라 술법적인 관점에서 해석과 식견을 보이는 것은 실수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무공이라는 관점에서는 다르지.’
당유혼은 닳고 닳은 노강호였으며, 동시에 천하제일의 칭호가 과찬이지 않을 무공에 대한 지식을 가진 무학자(武學者)였고, 또한 고금제일에 도전할 만한 무인이었다.
그 세 가지를 전부 갖춘 당유혼은 눈을 감고 조금 전에 일어났던 현상을 내면의 심상 공간에서 분석했다.
적웅은 상대방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호흡마저 집중하며 그 과정을 전부 지켜봤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당유혼은 눈을 뜨며 빙긋 웃었다.
“이거, 할 만하겠네요.”
“…정말인가?”
조금은 반신반의한 질문.
그에,
“그럼요.”
당유혼은 백 마디 대답보다, 단 한 번의 행동을 보였다.
쿠웅―!
“……!!!”
무언가 강림하는 듯한 기운이 요동쳤다.
하지만 그건 적웅의 그것보다 훨씬 광폭했고, 난폭한 흐름이 온 주변을 때려 부수듯 몰아쳐 산천초목이 비명을 내지르는 듯했다.
‘저, 저건……!’
적웅은 그 장면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아니, 다르다……! 그때보다 훨씬 더……!!’
검고 푸른 기운이 당유혼의 전신을 휘감은 채 뭉클거리고 있었다.
그건 마치 거대한 대망(大蟒)과 같았고, 금방이라도 승천(昇天)의 때를 기다리는 듯한 존재가 아직 이 지상에 발이 묶였음에 짜증스럽게 분기를 흘리는 것과도 같았다.
‘어찌 저런 게…….’
눈앞의 어린 소년을 감싼 존재는 결코 자신을 가호하는 혈웅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혈웅은 자신에게 훨씬 무신경했기에, 그 존재가 광포해도 딱히 적웅에게 적의를 내뿜는 일은 없었다.
하나, 저 존재는 당장에라도 당유혼의 목을 물어뜯을 것만 같이 흉흉해서 적웅과 같은 강신술사는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자, 자네…….’
그 상위 존재의 존재감에 적웅은 몸이 바짝 얼어 괜찮냐는 말 한마디 내뱉기가 힘들었다.
그때,
“흐… 이거 상당히 효율이 좋은데?”
그 거칠고 사나운 기세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날리는 듯한 모습에도 당유혼은 만족스레 자신을 노려보는 탐(貪)과 시선을 마주했다.
- 크르르르…….
사나운 울음소리가 더더욱 가까이서 들려오는 이 감각. 하지만 손을 몇 번 젓는 것만으로 그 기운을 날려 버리고 다시 원 상태로 돌아온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권역을 형성시키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군. 대신 권역 전체를 지배하는 것보다는 범위가 좁아지겠지만, 개인의 위력을 상승시키는 데는 몇 배나 뛰어나겠어.”
알 수 없는 말들을 하는 당유혼의 모습.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호흡이 원상태로 돌아온 적웅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 자네, 괜찮나?”
“아무렴, 안 괜찮아 보여요?”
“…믿을 수 없군. 내 일족의 계승자로서 몇십, 몇백 번의 강신 과정을 거쳤고, 그 현상을 보아 왔다지만… 자네와 같이 상위 존재와 접촉하고도 그리 여유로운 경우는 본 적이 없네.”
“흥, 상위 존재는 무슨. 그냥 힘이 더 센 거죠.”
게다가 상위 존재를 업신여기는 반응까지.
적웅은 애써 쿵쿵 떠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혀를 내둘렀다.
“경이로움의 연속이군. 해서, 무언가 자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있었는가?”
“예. 대충 일족에 도움이 될 만한 무공을 알겠네요.”
당유혼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아랫배를 가리켰다.
“일반적인 무공은 하단전(下丹田)에 축기를 통해 내공을 쌓고 가상의 기관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죠. 소우주의 시작을 상징하는 행위지만, 그렇기에 강신술사들처럼 중단전(中丹田)을 만들어 상위 존재를 받아들이는 이들과는 상극이에요.”
그 이유는 간단했다.
“중단전은 그릇이니까. 상위 존재가 와서 자리를 잡을만한 장소이기에, 하단전이 존재하는 이들은 상위 존재의 화를 부를 수 있기에 그 상극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게다가…….
“뿐만 아니라, 하단전은 수렴의 성질을 지닌다면 중단전을 지닌 이들은 발산의 성질을 지니기에 기를 모으려는 이들과 기를 방출하여 비우고 넓힘으로써 상위 존재의 힘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무조건 충돌할 수밖에 없어요. 단전에 축기를 하려 해도 알아서 기가 빠져나간다고나 할까?”
연구 결과를 덤덤히 말하는 당유혼의 말에 적웅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 잠깐… 미안하네만, 우리 일족의 비술은 자네처럼 지식과 학문으로 쌓는 게 아닐세. 좀 더 감각적인 부분이라…….”
알아먹기 힘들다고!
적웅의 당황스러운 항변에 당유혼은 아―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네요, 오랜만에 무학에 대한 연구라 혼자 신나서. 뭐 어쨌든, 일반적인 무공으로는 강신술사에게 적합하지도 않고 아저씨네 일족에게는 극독이나 다름없다 싶을 정도예요. 하지만, 그렇다면 일반적이지 않은 무공이라면 괜찮겠죠. 잠깐 등 좀 대보실래요?”
“으응?”
뭐라 하기도 전에 적웅의 뒤로 돌아간 당유혼이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당황하기도 전에,
“잠깐 뜨끈할 거예요.”
짧은 경고와 함께,
쿵―!
거대한 종을 치는 듯한 소리가 적웅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허어억……?!’
그건 너무나 경이로운 일.
갑자기 그의 영혼이 육체 밖으로 튀어 나가는 듯하더니 주변 세계가 훨씬 넓어지는 듯했고, 가슴이 뻥― 뚫리며 그 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헉……!!”
찰나의 유영을 끝내고 다시금 자신의 육신으로 돌아온 적웅이 헛숨을 들이켰다.
“자, 자네… 조금 전의 것은?”
“본격적으로 중단전을 개통한 거죠. 강신술 자체는 술법이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것은 무학의 이치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육신이니까.”
접근 방식의 차이랄까?
당유혼은 적웅의 가슴팍 몇 군데를 연이어 짚었다.
“심와(心窩) 부위의 혈을 중심적으로 뚫어 개편한다면 이런 일이 되는 거죠. 어때요, 다시 비술을 발동시켜 보는 건?”
“하, 한 번 해보겠네.”
무언가 달라졌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적웅은 다시금 일족의 비술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구우우우웅―
이전번 비술을 발동했을 때와 달리, 아니, 어떤 비술을 발동했을 때와도 다른 현상이 느껴졌다.
그것은 훨씬 더 거대한 흐름이 몰아쳐 오는 과정이었고, 동시에…….
‘……!!’
보였다. 저 너머에서 거대한 존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것을.
그것은 인외(人外)의 존재이되, 인외(寅畏)의 존재이기에 자연스레 두려움과 공포, 경외를 자아냈다.
그때 그 존재가 번쩍 눈을 떠 자신을 응시했다.
- …….
그 존재는 무어라, 무어라 몇 마디를 하였으나, 그 말은 언어로써 적웅의 의식에 닿지는 못했다.
- ……. ……? …….
이후 몇 마디 말을 더하던 그 존재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입꼬리를 비틀었고, 그게 피식 웃는 것임을 알아챈 적웅은 허망한 기운을 느끼는 동시에 짙은 추락감을 느꼈다.
그리고,
“…허어억!”
헛숨을 들이켜며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자신이 바닥에 드러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이, 이건…….”
“봤나 보네요?”
“무, 무엇을…….”
“뭘 봤어요?”
“나는…….”
돌이켜 보니 그 존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혈웅(血熊). 늘 자신의 존재에 그 편린을 흘려보내 주어 막대한 힘을 선사하는 강대한 존재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시선을 준 것이다.
“위험한 힘… 하지만, 이 힘은…….”
적웅은 경험한 새로운 세계에 얼떨떨해하다가 곧 뜨거운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일족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군……!”
일족의 근원이자 일족의 시초.
그 사실을 깨달은 적웅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부탁일세. 이 비술을 우리 일족의 전사들에게 계승하여도 되겠나?”
“뭐, 비술이라 할 것도 없지만 좋아요.”
굳이 이름 붙이자면 중단전 무공이라고나 할까?
당유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부탁을 수용했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알려드릴게요. 어려우면 말씀하세요.”
“곧바로 말인가?”
“싫어요?”
“그럴 리가!”
오히려 고마울 일이지.
“뭐, 너무 고마워하지는 마세요. 저 역시 이 수법을 방계 녀석들에게 알려줄 생각이니까.”
“훗, 그건 당연한 일이지. 나를 뭐로 보는가? 자네가 전수할 것은 결코 우리 일족이 익혀오던 것과 같은 게 아닐 것이며… 그 존재를 강림시키는 방식이 아닐 것을 익히 알고 있는데.”
붉은 바위 일족의 비술은 혈웅을 강림시킴으로써 시작되지만, 당유혼의 방식은 과정만 비슷하지, 결과와 근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당유혼은 계승을 시작했고, 동시에 새롭게 개발한 무류의 재정립을 시작했다.
전승 과정은 구어(口語)로 이루어졌다. 나중에는 필설(筆舌) 양쪽으로 계승이 되겠지만, 지금까지 붉은 바위 일족의 비술은 대부분 말로 전해졌기에 별 상관이 없었다.
실제로도 적웅은 모든 과정을 전해 듣고 기쁜 마음으로 일족들에게 달려갔다.
“기분 좋아 보이는구만?”
아이처럼 좋아라하는 적웅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 이제 우리 차례인가.”
마음 같으면 당장에라도 방계들을 싹 다 불러 모아 이 수법을 알려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방계 녀석들은 아직이었다.
‘몇 차례 재정립이 필요하겠어.’
아직은 너무나 거친 방식이었기에 그동안 계속해서 중단전을 단련해 온 붉은 바위 일족이나 곧바로 효율을 볼 방식이었다.
그러니 어찌할까, 남은 시간 동안 할 것이라고는 방계들을 더 굴리는 것뿐!
덕분에, 사천당가에서는 한쪽은 새 출발로 희망찬 목소리와 한쪽은 악귀의 귀환으로 곡소리가 가득한, 정반대의 양립이 공존하는 기묘한 분위기가 흘러갔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또 흘러가며 사천에는 매년 도래하는 시기가 흘러왔다.
사천지회(四天之會).
바야흐로, 보이지 않는 전쟁이 개전을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