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111화 (111/350)

111화

* * *

곡소리가 울려 퍼진다.

저들 중 진짜로 슬퍼 우는 이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제 막 청년이 된 소년은 덤덤히 자리에 올려지는 위패를 바라본다.

“저놈, 저거 봐라. 스승이 먼 길을 떠나는데 눈물 한 방울, 곡소리 한 소절 흘리지 않는군.”

“쯧쯧, 청운 녀석은 말년까지 불쌍하군.”

“저런 놈이 일검(一劍)의 칭호를 얻다니…….”

“독한 놈이지 않소. 그러니 친선 비무에서 그리 흉악한 검을 휘두를 수 있겠지.”

귓가에 들려오는 뱀들의 속삭임이 심기를 어지럽히지만, 소년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오로지 위패만을 향할 뿐.

“적하야. 아니, 혁수야, 너도 참 무공을 좋아하는구나.”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다 못해 온몸이 비 맞은 듯 흠뻑 젖을 때까지 검을 휘두르던 소년에게 문득 그의 스승이 뱉은 말.

그에 진혁수는 검을 휘두르다 멈추고 자신의 스승을 돌아보았다.

“제가 말입니까?”

“아니라고 하고 싶으냐?”

“훗. 제게 무공은 수단일 뿐입니다. 저는 입신양명을 위한 수단일 뿐이지요.”

도인으로서 도저히 할 말은 아님에도 그리 평하는 제자의 모습에도 스승, 청운자는 피식 웃었다.

“이 늙은이를 위해서?”

“…….”

“아니라고 부정은 못하는구나.”

끌끌 웃음소리에 적하자라는 도호를 받은 진혁수는 괜스레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며 다시금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가 선 마당 주변엔 얼마나 많은 칼질을 해댔는지 온 바닥이 다 파이고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흘깃 보던 스승은 말했다.

“너도 참 솔직하지 못하구나. 그게 아니더라도 너 역시 무공이 좋으면서 말이야. 특히, 이 청성의 무공이 말이야.”

“…별로 안 좋습니다만.”

좋을 게 있나.

특히, 청성이라는 집단은 그에게 있어 더더욱 혐오의 상징이라 생각했다.

‘도문이라는 집단의 것들이 어찌 이리 세속의 집단보다 더욱 사사로울 수 있는 거지.’

배때기에 기름만 낀 돼지들.

자칭 장로라는 이들을 보는 진혁수의 시선은 딱 그 정도였다.

“흘흘, 그렇더냐?”

하지만, 제자의 시선에 그런 분노가 가득함에도 스승은 구태여 그 분노를 져버리라 말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와 같은 여상한 표정을 지으며 웃을 뿐이었으니까.

그래서였다.

“스승님! 스승님!”

진혁수가 청성파 일대 제자들 사이에서 열리는 친선 비무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당대 청성일검(靑城一劍)의 자리를 차지했을 때도 스승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냈습니다! 이 제자가 청성일검의 자리를 따냈습니다! 하하핫!!”

웃음을 잘 보이지 않는 진혁수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광소를 터트리던 그 날에도 스승은 여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승님도 그 돼지놈들의 표정을 봐야 했습니다!! 다들 자신들의 제자가 청성일검의 자리를 차지할 거라고 시작 전부터 떠들어대다가, 스승님의 제자인 제가 우승을 차지할 때 입이 쩍 벌어지던 그 표정을 말입니다! 하하하하!!”

진혁수는 껄껄 웃으며 그의 스승에게로 걸어갔다.

푸른 구름이 저 하늘을 유유히 흘러가는 그런 운수 좋은 날에, 진혁수는 스승에게 다가가 두 손을 잡았다.

“하하, 스승님도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럴 때는 좀 더 크게 웃으셔도 됩니다! 그런 웃음 말고… 조금 더… 조금 더 크게 웃음을 터트리셔도 된단 말입니다!!”

뚝… 뚜욱…….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에, 구름마저 화창한 날에…….

어째서, 대체 어째서,

“응? 왜 비가 내리는 거지?”

빗방울이 땅바닥에 뚝뚝 떨어질 때 진혁수는 괜스레 하늘을 올려다봤다.

더 이상 비가 내리는 게 싫어 저 푸른 구름이 흐르는 하늘을 바라보았고,

투둑―

그 대신 떨어진 것은, 그의 스승이 이제 네가 가지라며 며칠 전에 물려 준 청운검(靑雲劍)이었다.

“하… 하하하… 하… 하하하…….”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던 진혁수는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졌다.

그때까지도 여상한 웃음을 짓던 스승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으니…….

“…스승님. 당신이 옳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변함없이 여상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스승의 곁에 앉은 진혁수는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왜 하필 이 산골짜기에서도 특히 궁벽한 벽지에 자리 잡았냐고 물었을 때 스승이 답한 말이 떠올랐다.

“이놈아, 여기만큼 저녁노을(赤霞)이 보기 좋은 명당이 또 있는 줄 아느냐?”

“정말로, 흐드러지게도 아름다운 노을입니다.”

결국 또 스승의 말이 옳았다.

그렇게, 스승이 가는 길을 배웅하며, 그 위패 앞에서 진혁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당신이 옳았습니다.’

“적하야. 아니, 혁수야, 너도 참 무공을 좋아하는구나.”

‘예. 당신의 무공이 좋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전쟁터의 고아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도 전부 무공 덕분이다.

청성일검의 별호를 따내고, 자신의 스승을 업신여기던 장로들의 콧대를 눌러준 것도 전부 무공 덕분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물려받은 것 역시, 무공이니까요.’

청운(靑雲)이 흘러 적하(赤霞)가 찾아오듯, 시간이 흘러 만물이 변화하고 만유(萬有)가 변하고 생멸(生滅)하는 것 또한 자연의 이치일지라도, 그 속에서 분명 한 가지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존재하는 법.

“너도 참 솔직하지 못하구나. 그게 아니더라도 너 역시 무공이 좋으면서 말이야. 특히, 이 청성의 무공이 말이야.”

‘이 빌어먹을 개돼지들의 문파라지만, 이 문파가 있어 당신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진혁수는 청운검의 검집을 더욱 굳세게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제가 바꾸려 합니다.’

이 더러운 문파의 썩은 부분을 파내고, 새로운 물이 고이게… 청운이 흘러가고 적하가 찾아오듯,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그 자리 위에 자신이 우뚝 설 것이다.

그렇게 하여,

‘세상이 알게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청성(靑城)이 있고, 그 가장 높은 곳에 청운(靑雲)이 흐르며, 적하(赤霞)가 그와 함께할 것임을.’

청성의 무공으로,

청성의 이름으로,

청운의 무공으로,

청운의 이름으로,

적하의 무공으로,

적운의 이름으로.

다시금 힘든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유일하게 그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그늘이 되어주며 삶의 이정표가 되어주던 이마저 이제 떠나고 없다.

그럼에도 진혁수는 고개를 들어 스승의 위패를 바라보기로 했다.

‘세상사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날은 실로, 푸른 구름이 흐드러지게도 온 하늘에 피어난 날이었다.

* * *

“…아.”

진혁수가 깨어났을 때는 심판이 막 그의 패배를 선언하던 순간이었다.

‘…내가, 졌구나.’

혼절하기 전, 떠올렸던 생각을 한 번 더 되새기며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그의 시야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자.”

그게 삿갓과 누군가의 손이라는 걸 깨달은 것은 조금 뒤의 일.

“정체, 숨겨야 하는 것 아니었소?”

“…흥.”

익숙하지 않은 배려에 진혁수는 코웃음을 치며 당지명이 내민 손을 쳐내고 홀로 몸을 일으킨 뒤 삿갓을 고쳐 썼다.

“내가 그 정도로 허술해 보이는가?”

“하긴. 만약을 대비해 온 얼굴을 붕대로 휘감을 줄은 몰랐는데… 거참, 그렇게까지 해야 하오?”

“흥, 그냥 하는 거지. 인생에 더러운 일이 이것만 있겠나?”

당지명은 그런 진혁수의 반응에 허허 웃으며 물었다.

“한데, 그 무공은 이름이 무엇이오? 귀 문파에 그런 무공이 있다는 건 처음 듣는데?”

“당연히 처음 듣겠지. 이건, 나와 스승님이 만든 무공이니까.”

“호오?”

“청운적하검(淸雲赤霞劍). 잘 기억해 둬라. 아니…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겠군.”

패배했음에도 진혁수는 한 치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온 천하가 기억하게 될 무공일 테니까.”

‘이 양반…….’

우리 대형과는 다른 의미로 대단한 양반이구만?

어지간하구나 싶어 진혁수를 보고 있자니, 진혁수는 그런 당지명에게 입술을 달싹였다.

“됐고, 넌 이제 승자의 권리를 취해라.”

“응?”

“지금 너에게 쏠리는 군중의 시선이 안 느껴지나? 본문은 개쪽을 당했지만, 이제 너희 가문은 온 사천인들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 거다. 이제 네가 뱉는 말들이 그들의 뇌리에 단단히 각인될 거야.”

그게 조언이란 걸 깨달은 당지명은 서둘러 주변을 돌아보았다.

과연.

“와아아아아아!! 최고다!!”

“명승부였어. 역시 당가! 부자는 망해도 삼 대는 간다더니!!”

“멋있다, 당지명!!”

어느새 그의 이름과 당가를 연호하는 사천인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무인으로서, 조금 전 승부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

그제야 당지명은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것은 당가의 부활을 알리는 대대적인 신호탄과 같은 것.

매번 가주님과 총관 어른, 대형의 뒤에 숨어 있던 그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서게 된 순간인지라 긴장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해야지.’

삐딱한 진혁수의 말들을 모두 뼈가 있는 조언이고 현실감 있는 직언이니, 당지명 역시 자신의 말을 저 청중에 각인시키려 했다.

이 사천에, 사천당가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그런데 그 순간,

파팟!

누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가 싶더니, 부드럽게 그의 곁에 착지했다.

‘미친.’

무시무시한 경공술.

그 존재가 저 높은 단상에서 뛰어내려 이 자리에 당도했다는 것을 깨달은 당지명이 자신과 상대방의 수준 차이에 경악하고 있을 때 난입자가 입을 열었다.

“허허, 사천비무대회의 우승자가 결정지어졌구려. 이번 사천지회를 주최한 청성의 장로로서 친히 축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이리 나오게 되었소.”

그는 어느새 당지명에게 갔어야 할 관심과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채 흐름을 주도했다.

“본 도인의 이름은 선현. 비무대회의 우승자를 진심으로 축하드리는 바요.”

선현진인. 현 청성의 장로가 등장하자 당지명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당가의 당지명입니다.”

상대가 먼저 포권을 취해 오자 당지명 역시 마주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그에 선현진인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과연, 당가의 위명은 빛바래지 않았구려. 한때 고난의 시기를 겪었으나, 이리 다시 밝게 빛나며 부활한 모습을 보자니… 함께 사천을 지켰던 동도로서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

무슨 의도지?

당지명은 이 노인네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뭐라 응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당지명이 멍 때리고 있을 때, 선현진인은 자연스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리 기쁜 날, 사천의 홍복을 알리기 위해 가주를 뵙고 사천인들에게 당가의 이름을 알리고 싶은데… 혹 가능하겠소?”

“예? 가주님을요?”

그 말에 당지명은 저도 모르게 당위혼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연스레 그를 따라 모든 이들의 시선은 당위혼 쪽으로 집중되었고, 선현진인은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가주님. 이 기쁜 자리에 혹시 올라와 함께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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