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뭐지? 진짜 미친놈인가?
근 반백 년을 살아온 선현진인.
강호에서도 어른 취급을 받을 만한 경험을 쌓았고, 그 와중에 이런저런 미친놈을 다 봤다고 생각해 왔지만, 단언컨대 눈앞의 괴인만큼 혁신적인 미친놈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당 소… 태상이 본인과 비무를 하겠다… 이 말씀이신가?”
“그렇다니까요? 거참, 진짜 연로하셔서 가는 귀가 먹으신 건가?”
다시 한번 자신의 건강을 몸소 걱정해 주는 모습에 선현진인은 이마에 힘줄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이… 이… 거, 건방진……!!”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는 게 이런 걸까?
입 안에서 토해질 분노가 자꾸만 병목 현상을 일으키며 언어로 순환이 되지 않아 마침내 그의 두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추풍대라고 했나? 같잖은 사파의 패잔병 무리들을 상대하다 보니 이 몸이 그렇게 우스워 보였나?!”
선현진인.
현재 영향력을 떨친다 할 만한 곳이 청성산밖에 없지만 젊었을 적에는 그 역시 강호가 좁다 주유하던 무인이었다.
사천당가가 멸망하고, 사천 땅에 들끓던 사파 무리의 거두들을 직접 그 손으로 때려잡고, 사천뿐 아니라 주변 지역에서 악명을 떨치던 산적과 흉명을 떨치던 마적 떼들을 직접 단죄했던 청성의 검수.
그가 분노를 표출하니 어마어마한 기세가 좌중을 짓눌렀다.
쿠구구구…….
‘이, 이게 구대 문파의 장로?’
곁가지로 밀려나기만 기다리던 당지명은 그 강렬한 압력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당유혼이 종종 구대 문파라는 놈들이 또래 나이대의 사파 놈들보다 만만해 보여도, 그 연차가 쌓이다 보면 감히 우습게 볼 수 없을 거라는 말을 해왔지만…….
‘이 정도의 위압감이라니…….’
조금 전까지 사람 좋아 보이던 웃음으로 감춘 진면모를 직접 마주하게 됐을 때, 당지명은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대형을 지켜야 해……!!’
자신도 이 정도인데 대형에게 향하는 압박은 어느 정도일까.
자연스레 걱정과 저런 기세를 한 사람에게 쏟아놓는 이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고개를 돌려 당유혼을 바라보는데,
“우와, 정말 대단한 사람이신가 보네.”
정작 그 당사자는 박수를 치고 있었다.
긴장? 그딴 건 먹는 거냐는 듯한 얼굴로.
“그런데, 그 대단한 양반이 겨우 이립도 안 된 우리 가주님을 쥐어패려고 하신 건가?”
“뭐, 뭐라고?”
쥐어패다니?!
“사람을 무슨 무뢰배로 보고!! 본인은 가주에게 친선 비무로 가르침을 주려 했을 뿐이오!”
“이야, 가르침? 그럼 그 가르침 저나 좀 나눠주시죠?”
언제는 태상 장로니, 뭐니 하더니, 이제는 애처럼 군다.
그 모습에 선현진인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이놈이랑 말 섞으면 나만 손해다!’
자신은 체통이나 체면 등을 신경 쓰며 입을 여는데, 이놈은 그딴 건 개나 줘버린 듯 막말을 해댄다.
가진 게 많은 이일수록 잃을 게 많다고, 이렇게 언쟁을 나눴다가 불리한 쪽은 뻔한 노릇. 알아서 입을 꾹 다무니 당유혼이 씨익 웃으며 계속해서 긁어댔다.
“왜 답이 없으시지? 이왕 하는 거 나도 좀 가르쳐주시죠? 기다리는 우리 사천의 동도들이 이리 많은데.”
“다, 당신에게 말이오?”
“그럼요. 대신, 그냥 친선 비무를 하면 내가 너무 불리하니까… 세 가지 조건만 양보해 주는 게 어때요?”
‘세 가지 조건?’
그 말에 흠칫한 선현진인은 눈앞의 미친놈을 경계 가득한 시선으로 훑었다.
‘그러고 보니 용독문주도 저놈들과 세 가지 조건을 걸고 비무를 해서 손해를 봤다고 했다. 보아하니 보통 간교한 놈들이 아닌 것 같은데…….’
승낙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거부 의사를 표현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왜…….”
“설마, 겁먹은 건 아니시죠? 대 청성파의 장로께서……?”
‘저, 저 샌 발음은 또 뭐야?!’
놈은 더더욱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묘하게 사람 자존심을 긁어대는, 게다가 문파의 자존심까지 긁어대는 말에 선현진인은 외통수에 빠진 걸 느꼈다.
그리고, 그때 당유혼은 더더욱 간교한 목소리를 새겨넣었다.
“아이, 물론 당연 그럴 리 없겠죠?”
“물론이ㄷ……. 헙!”
발악적으로 소리치자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막아보지만,
‘늦었…다…….’
자신이 승낙해 버렸음을 깨달은 그의 두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여윽시! 대청성파의 장로님이십니다! 아주 호쾌한 승낙 감사합니다!”
혹시나 발을 뺄까 봐 아예 못을 박는다.
“일단 조건이라도 한번 들어보시죠?”
무슨 길거리 약장수가 좌판을 깔듯 손을 벌리는 모습까지.
당했다는 걸 깨달은 선현진인은 이를 갈며 말했다.
“…으득, 말해 보시오.”
“에이, 별거 아니에요. 진짜 기본적인 조건들이니까요.”
딱 세 개.
첫째. 내가 하수니까 삼 초를 양보해 줄 것.
둘째. 살초는 사용하지 않을 것.
셋째. 항복하면 그 즉시 그만둘 것.
손가락 세 개를 세우며 제시한 조건들은…….
‘…너무 정상적인 조건이 아닌가?’
지금껏 자기 원하는 대로 판을 주무르던 놈치고는, 너무나 기묘할 정도로 정상적인 조건이었다.
아니, 그 수준이 아니라……,
‘원래 친선 비무라면 당연하게 적용되는 규칙일 텐데?’
하수에게 삼 초를 양보하는 것은 암묵적인 법칙이고, 비무에 살초를 사용하는 건 당연히 금지된 일이며, 항복할 시 그만두는 것은 기본적인 전제 조건에 불과하다.
“…정말, 그게 끝이오?”
“간단하다니까요? 대신, 무조건 지켜주시는 거죠?”
“그야 뭐…….”
그렇다고 대답하려던 선현진인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지만, 나를 너무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요.”
“허허, 우습게 보다니요. 대청성파의 장로님을 어찌 저따위가 우습게 보겠습니까?”
낄낄낄낄.
저 새끼 저거, 웃음은 좀 멈추고 저러지…….
지켜보던 방계들이 오히려 더 걱정이 되는 순간,
“형님.”
대화의 양상을 가만 듣고만 있던 당위혼이 입을 열었다.
“응?”
“제가 하겠습니다.”
그가 뱉은 말은 담백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과 불안, 그리고 어린 대형을 위하는 마음은 너무나 짙었다.
그래서,
“흐, 됐수다. 가주님.”
당유혼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가주님의 자리를 뺏어서 미안하지만, 나도 이래저래 보여주고 싶은 게 많거든.”
“형님.”
“우리 가주님은 나 믿어주시겠지?”
믿는다면 이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한쪽 다리는 짝다리를 짚고 모가지는 삐딱하게 꺾은 주제에, 뒤로 대충 묶은 머리가 마치 길거리 파락호를 보는 듯함에도, 당위혼은 그 모습에서 무어라 더 말할 수 없는 기백을 느꼈다.
“…물론이지요.”
그에 결국 당위혼이 비무장 아래로 내려가자, 관중들의 흥분은 더더욱 커져 갔다.
“들었어? 저 청년이 당가의 태상 장로라는데?”
“에이, 그걸 믿어? 저렇게 어리잖아.”
“어린 걸로 따지면 지금껏 활약을 보인 이들은?”
“그건 그렇긴 한데…….”
세간에는 당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많이 없었다.
그들이 악명을 날리던 추풍대를 토벌했다는 소문은 전해졌지만, 그래서 그 당가가 어찌 구성됐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문만 무성한 곳의 실체가 지금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스릉―
“준비가 되었으면 시작하시오.”
비무대의 반대편에 선 선현진인이 자신의 철검을 뽑아 들며 경계심을 돋우었다.
‘겉보기는 아직 어리지만… 예사로운 놈이 아니다.’
말본새는 천박하기 그지없지만, 상대방의 약점을 물어뜯는 것은 분명 능력의 영역이었다.
게다가…….
‘내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안색이 태연자약했다. 그건 믿는 한 수가 있다는 뜻일 터.’
결코 방심하지 않겠다는 듯한 상대의 모습에 당유혼은 피식 웃었다.
‘누가 뱀 새끼들 아니랄까 봐 조심스럽기는.’
혹시나 무슨 수작을 부릴까 봐 잔뜩 경계한 모습이다. 그래서 더욱 같잖았다.
‘너희가 간교해 봐야, 난 너희 머리 위에서 놀거든.’
쿠구구구구…….
당유혼은 천천히 기세를 끌어 올렸다.
혼원신공을 운용하며 사지 백해에 잠들어 있던 미증유의 거력들이 고개를 들었고, 그것이 피부 밖으로 표출되니 장중한 기류가 흐를 정도가 되었다.
‘저건……!’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선현진인의 안색도 급변했다.
‘무슨 내공이… 저 정도면 나보다 더한 수준이 아닌가?!’
깜짝 놀란 선현진인은 검병을 쥔 손에 힘을 더했고, 앞으로 날아올 공격에 대비해 더더욱 감각을 예리하게 세웠다.
하지만,
구구구구…….
공격은 펼쳐질 생각을 하지 않고, 흘러나오는 기세만 더더욱 커져 갔다.
“…이, 이 미친……!! 지금 뭘 하는 것이더냐!!”
가만 놔두니까 아주 온 내공을 끌어다 쓰고 있다.
그에 당황한 선현진인이 소리쳤지만,
“아, 집중하는 중이니까 말 걸지 마쇼!”
삼 초 양보하기로 한 것 몰라?
당유혼을 중심으로 풍겨 나오는 기류의 여파는 이제 옷자락을 펄럭이는 수준을 넘어 부서진 비무장 바닥의 파편들이 휩쓸릴 정도의 와류를 만들 지경이었다.
‘운이 좋았어. 붉은 바위 일족을 만나 중단전을 개방하지 못했다면 시도는 개뿔 쳐다도 못 볼 기술이었지만…….’
이번에 얻은 기연을 통해,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게 된 당가의 전설적인 무공이 당유혼을 통해 재연되었다.
봉형(棒形).
침형(針形).
차륜형(車輪形).
검형(劍形).
창수형(槍首形).
형태도 가지각색의 온갖 암기들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으니…….
이곳에 모인 사천인들 중 연륜이 깊은 이들은 그 현상을 알아채고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건 설마…….”
“만천(萬天)……?!”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이들 중, 가장 불신에 찬 눈동자가 뒤흔들리는 이. 선현진인은 침마저 질질 흘리며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자, 간다.”
당유혼은 자신에게 주어진 합법적 선제공격 삼 초식의 일 초로 시작부터 초필살기를 갈겼다.
“뒈지…지 마쇼!!!”
당가칠대금기(唐家七大禁技), 위(僞) 만천화우(萬天花雨).
슈슈슈슈슉!!
온 하늘(萬天)을 뒤덮는 꽃비(花雨)가 떨어져 내린다.
그 모습은 실로 아름다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유성우가 내리꽂히는 것과 다름없었으니,
‘주,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분노에 찬 선현진인은 필생의 공력을 끌어 올려 검초를 전개해야 했다.
철검십이식(鐵劍十二式), 철검해파(鐵劍海波).
철검을 미친 듯이 휘둘러 허공중에 반투명한 검막(劍幕)을 형성했고, 그 위로 무수한 암기의 세례가 떨어져 내렸다.
콰콰콰콰콰콰쾅!!
전 비무장을 폭격 범위로 휩쓰는 강렬한 굉음!
“헉… 헉… 허억… 헉……!!”
푹―
땅에 칼을 꽂은 채 겨우겨우 몸을 지탱하는 선현진인.
그 미친 강철비를 버텨낸 청성의 장로가 이글거리는 안광으로 소리쳤다.
“이게 무슨 무도한……!!”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역시 대청성의 장로! 이 정도로는 옷깃 하나 못 찢는다 이거죠? 그렇다면 바로 한 발 더 들어갑니다!”
당유혼은 일 번 암기 통을 내다 버리고 이번 암기 통을 꺼내 띄워 올렸다.
‘뭐… 뭐? 아, 아니지?!’
현실 부정을 해보는 선현진인이지만,
당가칠대금기(唐家七大禁技), 위(僞) 만천화우(萬天花雨).
또 한 번 펼쳐진 꽃비는 그에게 인생은 실전임을 각인시킨다.
‘이런 개ㅅ…….’
콰콰콰콰콰콰쾅!!
미친 듯이 쏟아지는 강철비.
“우웨에에엑!!”
피를 토하는 선현진인.
‘마, 막아냈다……. 이, 이제 한 번… 이번에는 또 저 짓을 못 하겠… 허어어억?!’
겨우겨우 고개를 든 그에게 보이는 것은,
“허억… 허억… 한 번 더……!!”
저도 죽으려는 주제 온 내공을 끌어 올려 마지막 한 방을 준비하는 당유혼!
당가칠대금기(唐家七大禁技), 위(僞) 만천화우(萬天花雨).
“야, 이 개새……!!”
초필살기를 연달아 세 번 꽂아버리는 마지막 삼 초식이 펼쳐졌고,
“끄아아아아아아!!”
숫제 비명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광기 어린 검무를 펼치는 선현진인!
그의 일생에 이렇게 필사적인 검무를 펼친 적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끔찍한 시간이 마침내 지나갔다.
‘드… 드디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무력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마음 같으면 이대로 땅바닥에 쓰러져 눕고 싶지만,
‘한 대… 한 대만……!!’
그 모든 무력감을 이겨내는 타오르는 분노가 그의 노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죽이…지는 않으마……!!”
흉신악살과 같은 살기를 넘실넘실 흘리는 선현진인이 마침내 찾아온 복수의 순간, 문득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외마디 외침.
“항복이요.”
그 짧은 네 글자가 비무장 위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