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끼기긱―
문이 열리며 안에서부터 짙은 약 내음이 풍겨왔다.
지하에 지어진 공간은 서늘한 냉기가 가득했고, 앞장선 광세운이 등불로 어둠을 밝혔다.
“이곳입니다.”
비고 안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함들이 가득했다.
가장 가까운 아무 함이나 열어봐도 알싸한 약 향이 흘러나오는 것이…….
‘모두 다 진품이구만?’
사람이 워낙 착해서 혹시나 눈탱이라도 맞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어릴 적부터 상인으로서 영재 교육을 받아온 광세운답게 가품은 하나도 없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아유, 훌륭하네요.”
“목록은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광세운이 건넨 두둑한 두루마리에는 창고에 있는 영약들의 목록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고, 그 내용을 확인한 당유혼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혹시 이 많은 영약은 어디 쓰시려는 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질문을 하는 광세운의 두 눈에는 기대감이 잔뜩 차 있었다.
‘말을 조금 거칠게 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지. 이 남자는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
첫 만남 때는 몰랐다. 하지만, 만나는 시간이 길어지고 당유혼의 행보를 겪으며 광세운은 확신하게 되었다.
‘어쩌면, 천하제일 거상(巨商)의 상재(商材)를 지녔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상인으로서 놀라우리만치 수완을 벌어왔다.
첫 번째는 용독문을 사천성주와 반으로 갈라 죽이며 남은 걸 나눠 먹는 면모에서부터였다.
‘현실적으로 용독문은 사천당가가 홀로 먹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먹이였다. 게다가 단순히 거대한 수준이 아니라 독이 들어 있기까지 했지.’
용독문은 사천삼주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곳이다.
이전까지 용독문이 운영하던 사업체에도 사천삼주의 입김이 짙게 묻어 있는 곳이 즐비했고, 그들을 관리하기에 당시 당가에는 인력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사천성주에게 떠넘기며 해결했지.’
그 과정은 단순히 반으로 갈라 나눠 먹었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확히 사천삼주의 입김이 짙게 묻은 것들을 사천성주에게 떠넘겼지.’
이후에 확인해 보니 당가의 인력으로는 도저히 관리할 수 없다 싶은 사업체들만 사천성주에게 넘겼다.
‘함부로 소유했다가는 파업 등으로 수익보다는 유지비가 더 많이 나올 그런 것들을 처분했음에도, 오히려 이득을 봤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두 번째는 우리 광형 상단과의 연계.’
사천성주와 갈라 먹고도 넘쳐나는 자본을 당유혼은 곧장 외부로 유통했다.
‘자본의 순환. 아버님은 말씀하셨지. 진정한 자본가는 얼마나 많은 양의 돈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올바르게 유통할 수 있느냐라고.’
자신들, 광형 상단을 통한 감숙과의 유통 과정은 단순히 사천삼주에게 포위당한 상황에서 활로를 개척할 뿐 아니라, 그간 고립되어 있던 사천 물류 흐름에 변혁을 일으키고 기존 자본의 가치 증식을 불러왔다.
‘거기다 운남에서 이민족을 수용하며 규모의 확대까지 이루어 내셨다.’
자본을 획득, 획득한 자본을 순환시키며 잉여 가치를 생산하고, 그걸 다시 규모 확장에 재투자하기까지!
그야말로 상단 운영의 정석이라 할 수 있으며, 가치 평가를 따지자면 백 배도 우습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성과를 불과 일 년도 안 된 시기에 이루어 낸 것이다.
‘천하 십 대 상단이라 불리는 상단의 상단주들도 과연 당 소협의 나이 때 이만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을까?’
광세운은 생각했다.
자신은 지금 상계의 살아 있는 전설의 현재 진행형을 두 눈으로 목도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런 생각으로 광세운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뭐지? 이 양반, 혹시 나 없을 때 영약이라도 하나 훔쳐먹다 탈이라도 낫나?’
정작 그 시선을 받는 당유혼의 마음에는 불안감이 차올랐다.
“흠흠, 저… 지부장님.”
“네! 말씀하십시오!”
“그… 지부장님이라면 영약 몇 개 정도는 먹어도 돼요.”
“옙?”
“…복용법 알려드릴 테니 말씀하시고 드시라구요.”
당신만 한 투자처 찾기 힘들다고?
잠시 알 수 없는 오해의 시선들이 지나갔지만, 둘은 다시금 사업 얘기로 돌아갔다.
“해서, 여기저기 상단에서 영업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구요?”
“상단뿐 아닙니다. 포목점, 도축점, 약재방 등등 가릴 것 없이 여러 업체에서 문의가 들어오고 있고, 표국들도 혹시 위탁 맡길 일이 없나 문지방을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흠, 행복한 고민 중이시겠네요.”
“행복하다면 행복하기는 한데…….”
광세운은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아… 말 그대로 너무 사치스러운 고민이라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만…….”
“에이, 저희 사이에 뭘 곤란해요. 마음 편히 말씀해 보세요.”
“그… 어느 업체와 계약을 맺어야 할지 선정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듯합니다.”
“예? 왜요?”
계약 업체의 선정은 상단 운영의 기본 중의 기본.
아직 한 집단의 장을 맡기기에는 분명 어리다고 할 수 있는 광세운이지만, 당유혼이 보기에 썩 능력이 부족하지 않다 여겨 맡겼었는데…….
“비록 이 한 몸 부족하지만, 소협의 과분한 신뢰와 후광을 등에 업고 당가의 사업 대부분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양질의 업체를 고르려 하는데, 첫 계약 업체로 꼽을 만한 이들이 너무 적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왜요? 사천에 널리고 널린 상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사천이 어지간한 성도여야지. 사천 정도면 황제가 사는 제도(帝都)를 제외하면 전 중원에서도 한 손에 꼽힐 수준인데?
“상인의 숫자는 많습니다만… 대부분이 떳떳하지 못한 이들입니다.”
“…넹?”
떳떳하지 못하다니요?
광세운은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만나자마자 촌지니, 성의니, 하며 목함과 주머니 등을 건네오더군요. 그런 이들이 구 할 이상이고, 그들을 걸렀다 해도 남은 구 할은 대담을 잘 진행하다가도 또다시 무언가를 건네옵니다.”
“……?!”
싯팔, 그게 뭔 소리여?
“아, 아니 잠깐만요. 그럼 여기 쌓인 것들은 뭔데요?”
“이것 말입니까? 아아, 그나마 한 줌 양심 있는 이들과 거래하며 그들에게 대금으로 요구한 것들입니다.”
뿌듯한 미소를 짓는 광세운의 모습에 당유혼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다.
‘뭐지? 내가 분명 적당히 받아먹으라고 했는데…….’
“…저, 지부장님?”
“예. 말씀하십시오.”
“제가 분명 적당히 해두시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셨지요?”
그런데 그게 왜요?
두꺼비처럼 두 눈을 껌뻑이는 광세운의 모습에 당유혼은 마치 아득한 평행선상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혹시, 그게 무슨 뜻으로 해석되었는지…….”
“그야 적당히 뇌물을 받아먹지 않는 이들은 목을 분질러 버리겠다…라는 뜻 아니셨습니까? 저는 정말 감탄했습니다.”
역시 협의지문(俠義之門)이십니다!
연신 감탄하는 모습에 당유혼은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대리인을 잘못 선택한 게 아닐까?’
하윤호였다면 좋다고 뇌물과 촌지는 있는 대로 받고 허리가 부러질 폭리를 때려 박아 골수까지 뽑아냈을 텐데…….
잘했죠? 하며 칭찬을 기다리며 꼬리를 흔들고 있는 개새끼처럼 웃고 있는 광세운을 보자니 지끈한 두통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예, 뭐… 지부장님이 알아서 하세요…….”
“앗? 벌써 가시려 합니까?”
“아직 할 게 많아서요…….”
더 있다가는 체할 것 같아서요.
그리 말한 당유혼은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들려오는 광세운의 배웅이 계속해서 메아리쳤지만,
‘…앞으로 쟤는 당궁상 놈한테 맡겨놔야겠다.’
더 마주하고 있다간 속이 뒤엉켜 내상이라도 입을 것 같은 기분에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향한 곳은 야장들이 모여 사는 철기방이었다.
“아이고, 도련님 오셨습니까!”
“아이참, 우리 방주님 또 왜 이러신데.”
언제나처럼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며 인사해 오는 당야철을 일으켜 세우고 나니 그와 함께 있던 또 다른 노인이 아는 체를 해왔다.
“다시 보는구먼. 은인.”
“장로님도 계셨네요.”
함께 있던 것은 붉은 바위 일족의 장로 적철성.
둘은 웃옷을 벗고 노익장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땀에 흠뻑 젖은 실전 압축 근육을 내보이고 있었다.
“적 장로와 야금술에 대해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오호, 서로 통하시는 게 있나 봐요?”
“아무래도 가공과 성형의 분야는 당가의 암기 비전을 가지고 있는 저희 쪽이 낫지만, 순수한 금속의 제련에서는 적 장로가 몇 수나 앞서 있습니다.”
“허허, 과찬이오.”
딱 봐도 땀내 나는 우정을 맺은 듯한 둘은 주거니 받거니 훈훈한 덕담을 나누고 있었다.
가만히 놔두자니 끝나고 오늘 밤에 함께 이두나 조지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지라 재빨리 흐름을 끊으며 물었다.
“방주님! 혹시 지난번에 부탁드린 것은 어떻게 됐을까요?!”
“아아, 용독문으로부터 되찾은 당가 비전의 암기를 말씀하신다면… 오 할 이상 복원에 성공했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철기방주 당야철이 껄껄 웃으며 성과를 자랑했다.
“오 할 이상이요?”
이건 예상보다도 빠른데?
“사실 적철을 비롯한 그동안 만지지 못했던 일부 희귀 금속 제련에 난색을 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 장로를 비롯한 붉은 바위 일족이 도와주어 시간을 대폭 단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장로님뿐 아니라 다른 일족들도 도와줬다구요?”
“모르셨습니까? 붉은 바위 일족은 타고난 장인 일족이었고, 그들 대부분이 저희 철기방에 들어와 함께 대장간 밥을 먹고 있습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었다.
당가가 좀 빠른 속도로 발전해야지, 적당히 당궁상에게 일러두어 결코 섭섭지 않게 해달라고만 했을 뿐, 이후의 일상생활까진 크게 관여하지 않았던 당유혼은 신기해하며 적철성을 돌아보았다.
“부족원들의 자유 의지예요?”
“물론이오. 사실, 일족원들이 고향을 떠나 허전함을 금치 못했는데 이곳에 와서 익숙한 쇳덩이들을 다루게 되니 다시금 활력을 되찾고 있게 되었소.”
“그래요?”
거의 방목 정책이나 다름없었는데, 알아서들 쑥쑥 잘 크니 기쁘기 그지없다.
이게 쑥쑥 자라는 소들을 바라보는 목장 주인의 마음일까?
“그럼 제가 크게 신경 쓸 건 없겠네요. 혹시 불편하거나 필요한 게 생기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허허, 그런 게 있을까 싶네만… 아, 그러고 보니… 혹시 일족의 대전사에게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그 아저씨랑은 왜요?”
“요 근래 깨달음을 얻은 게 있는지,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더군. 다만 은인이 워낙 바쁜지라 눈치만 보는 듯했네.”
“흠, 그래요?”
하긴… 요즘 좀 여기저기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기는 했지.
“알겠어요. 안 그래도 마침 갈 일이 있었는데. 그 아저씨는 어디 있대요?”
“일족이 머무르는 곳에서 있다네. 아마 지금쯤 새롭게 전사들을 키우는 데 한창이겠지.”
“그래요?”
마침 그쪽에도 볼일이 있었는데 잘 됐다.
“알겠어요. 지금 바로 가볼게요.”
“고맙네.”
다시금 둘과도 헤어져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