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적석촌(赤石村).
이름도 직관적인 이곳은 붉은 바위 일족이 모여 사는 곳이다.
마을 초입부터 그들이 거주하는 전통적 가옥이 버섯처럼 우후죽순 자라나 있었다.
그리고 그 입구에 선 땀내 나는 근육질 아저씨가 하나.
“굉장히 실례되는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이군.”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일족의 비술을 익힌다더니, 드디어 독심술의 영역에라도 들어선 걸까? 혈웅, 아니, 적웅의 등장에 당유혼은 손사래를 쳤다.
“찾으신다면서요?”
“흠, 그렇게 말하면 미안하게 됐네. 은인을 만나고 싶은 것은 맞지만, 내가 괜히 바쁜 시간을 방해할까 봐 눈치만 본 건데… 오히려 은인을 여기까지 불러오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군.”
“뭘 그렇게 복잡하게 말해요? 그냥 같은 집에 사는 식구끼리 밥 한 끼 먹는 겸 만나는 거지.”
“그렇게 말해 주니 또 고맙군.”
훗 하고 웃은 적웅은 팔짱을 풀며 말했다.
“그래서, 시간이 괜찮은가?”
“그러니까 왔겠죠?”
“그렇다면 따라와 주시게. 새롭게 건설된 적석촌도 안내할 겸, 할 얘기가 좀 있으니.”
적웅의 안내를 따라 적석촌으로 들어갔다.
“아까부터 함성 소리가 엄청 들리네요.”
“음, 자네 가문에 의탁하여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덕분이네. 지금은 한창 전사를 양성 중이지.”
과연.
들어오자마자 자꾸만 오감을 자극하는 듯한 시선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자네도 느껴지는가?”
“아무렴요.”
뱀, 새, 호랑이, 곰…….
‘참 다양하기도 하군.’
붉은 바위 일족이 숭배하는 초자연적인 상위 존재. 그들이 일족의 몸을 빌려 강신하고 있었고, 당유혼이 지나가는 길마다 흘긋흘긋 쳐다보고 있었다.
‘뭘 봐?’
예전 같으면 한판 붙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래봐야 처맞는 것은 자신일 게 뻔하기에 그리 생각만 할 뿐, 못 본 척 걸었다.
“과연. 상위 존재들께서는 자네를 무척이나 신비로워하는 것 같네.”
“철창 안에 갇힌 희귀 동물을 보는 기분이란 거죠?”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네만.”
적석촌 중앙으로 들어오니 적웅의 숙소가 나왔다.
다만, 그 안까지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입구의 넓은 마당에서 멈춰 섰다.
“은인. 우선은, 다시 한번 자네에게 감사를 표하려 하네. 자네 덕에 일족을 구할 수 있었고, 지금과 같이 새로운 시작을 할 기회를 얻었다네. 그리고… 자네들 표현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네.”
“깨달음이라면?”
“자네가 알려준 ‘무공’이란 것으로 전사들을 수련시키던 중, 비수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지.”
“오호.”
그건 분명 호재다.
붉은 바위 일족이 이곳 사천당가에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될수록, 그들은 당가를 지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서게 될 테고 그들의 선봉장이라 할 수 있는 대전사 적웅은 그 선두에서 서게 될 것이다.
‘뭐, 꼭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슬금슬금 감각을 자극하는 또 다른 기운에 당유혼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서요?”
“알면서 묻는군.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흐음…….”
서서히 투기를 끌어 올리는 적웅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한 판 붙을 기세였다.
“왜 굳이 저를 기다리셨어요? 대련이라면 좋다고 받아줄 방계 녀석들이 쌓여있는데?”
“내가 필요한 건 대련이 아니라 경험일세. 우리 일족이 이곳 중원 땅에 새로이 뿌리 내리게 된 이상, 우리는 무공을 익힌 무인(武人)이라는 이들과 경쟁하게 될 터. 단순히 그들이 보일 수 있는 무공뿐 아니라, 여러 실전적인 측면의 경험이 필요하다네.”
“그래서 저를 찾아오셨다?”
아주 잘 찾아오셨구만.
외면은 아직 스물도 되지 못한 애송이처럼 보일지라도, 그 내면은 명실상부 현 무림 제일의 경험을 지닌 노강호.
“재밌네요.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바로 시작할까요?”
“잠깐, 부탁하는 김에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되겠나?”
“뭔데요?”
“말 그대로 ‘경험’을 쌓고 싶은 것일세. 수련 중인 일족의 전사들을 전부 모아 함께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네.”
호오라.
“괜찮으시겠어요? 원하시는 게 경험이라면…….”
“상관없네.”
적웅은 정정당당한 결투나 비무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시다면야.”
그에 당유혼은 고개를 끄덕였고, 곧 적웅이 수련 중이던 부족의 전사들은 전부 불러 모았다.
“자, 시작할까요?”
둥글게 모여 앉은 일족의 전사들이 기대감을 가득 담은 눈빛을 보내오는 한 가운데에서 당유혼은 적웅과 마주한 상태였다.
“부탁하네.”
적웅은 중원식으로 포권을 해 보였고, 이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긴장되는군.’
일족의 대전사로서 붉은 바위산의 온갖 흉흉한 맹수들과 맞서 싸웠다 자부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이 싸웠던 어떤 괴물보다도 더한 놈이었다.
‘천년을 살아왔다는 마물인 천년혈주마저 더욱 치밀한 계략으로 사냥한 자. 이자는 끈기 있고 영리한 사냥꾼이다.’
적웅의 부리부리한 눈빛이 깊게 잠겼다.
지금까지는 아군이라 생각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직접 싸운다고 생각하자 자연스레 긴장이 곤두섰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
붉은 바위 일족의 대전사 적웅.
그는 이 순간 일생일대의 대전(大戰)을 앞둔 마음가짐으로 일종의 비술을 발동시켰다.
구구구…….
가슴이 열리며 그 안으로 세상의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그들의 비술은 무림인들처럼 내부에 쌓아두지 않고 열어젖혀 발산하고 또 받아들이는 것!
자연과 하나 되는 그의 비술이 저 높은 곳에 있는 상위의 존재를 불렀고, 그에 호응하듯 하늘에서 붉은 벼락이 내리쳤다.
콰르르릉!!
“오오오오!!”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방언과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고, 그의 두 눈에서 줄기줄기 혈광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게 오시오!!”
서서히 그의 등 뒤로 생겨나기 시작하는 거대한 존재의 형상!
그것이 마침내 웅지를 펴는 순간,
“빈틈!”
“혈ㅇ… 크후에에에엑!!”
콰앙!!
당유혼의 날아 차기가 먼저 박혔다.
꾸에에에엑!
거대한 존재도 적웅과 비슷한 비명을 내지르며 나타나려다 사라져 버렸다.
“아니, 뭔 병신도 아니고 변신이 왜 이렇게 길어요?”
누가 그걸 기다려준다고…….
“끄으으…….”
“괜찮아요?”
“괜찮아 보이는가……?”
비술이 강제로 중지된 반동으로 적웅은 피를 토하며 기절했고, 정신을 차리는 데만 한 시진이 걸렸다.
“말 잘하는 거 보니 괜찮으시네.”
“…….”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고?
“일단 아저씨의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알겠어요?”
“…조금 전에 확실히 느꼈네. 일반 무인들에 비해 발동 시간이 확실히 오래 걸리는군.”
강신의 순간에 필요한 시간은 사실 한 호흡 남짓이다.
그게 뭐 얼마나 긴 시간이냐 할 수 있겠지만…….
‘이리 보니 아주 긴 시간이었군.’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적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저씨 기술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저게 뭔가 싶어서 멈칫할 수 있겠지만, 두 번만 보면 지금이니! 싶어서 달려들 거예요. 그 발동 시간 좀 줄일 수 없어요?”
“…노력해 보겠네.”
암만 강한 기술이고 나발이고, 발동이 돼야만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건 실전에서 그냥 쓸모없는 것과 다름이 없다.
가장 우선시 되는 걸 지적한 당유혼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쉬었으면 일어나시죠.”
“벌써 말인가?”
“덜 쉬었어요?”
“아니. 충분히 쉬었지.”
늑골 어딘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팔다리는 멀쩡했다.
다시금 마주 서자 당유혼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은 채 말했다.
“이번엔 비술을 발동시킨 뒤에 시작해 보죠.”
“알겠네.”
한 대 처맞으니 침착해진 적웅이 다시금 비술을 발동시켰다.
- 크르르…….
혈웅의 사나운 울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뭔 상위 존재가 저렇게 속이 좁아?’
딱 봐도 한 대 처맞았음에 잔뜩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쒸익쒸익거리는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림에 당유혼은 가볍게 손을 털었다.
“시작하죠.”
“크으으… 우오오오오오!!”
적웅이 뱉는 건지, 아니면 의식을 잠식한 혈웅이 내지르는 건지 모를 포효와 함께 핏빛 돌격이 시작되었다.
쿠구구구구!!
땅을 파헤치며 달려드는 돌진!
‘확실히 힘 하나는 무시무시해 보이는데…….’
정면에서 맞상대했다가는 뼈까지 갈려 나갈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에잇!”
당유혼은 가지고 있던 독주머니를 던졌다.
“크오오… 웁푸후웨에에엑!!”
맹렬히 달려들던 적웅, 아니, 혈웅은 그 독주머니마저 찢어발겼고 그 즉시 뿜어져 나오는 독무(毒霧)에 뒤덮여버렸다.
푸화와아아아악!!
전신을 휘돌며 타오르는 핏빛 기운이 독무 중 절반을 불태웠지만, 그 나머지 절반이 혈웅의 가호를 상쇄시켜 버리고 체내에 침투하자 적웅은 피를 내뿜으며 고꾸라졌다.
“끄우에에엑…….”
“대, 대전사님!!”
“대전사님!!”
주먹 한 번 내뻗지 못하고 일족의 대전사가 쓰러지자 붉은 바위 일족의 전사들이 후다닥 달려왔다.
그리고,
“우우웨에에엑!!”
“꾸에엑!!”
단체로 중독 증상을 일으키며 거꾸러졌다.
“…….”
뭐 이런 병신들이 다 있지?
* * *
적석촌의 앞마당에는 돗자리 위에 드러누운 전사들로 가득했다.
기껏 분위기 잡고 일생일대의 대전을 치르려던 적웅은 땅을 파고들 기세로 부끄러워하며 입 안에 든 해독 성분이 있는 약초를 잘근잘근 씹었다.
“일단, 아저씨들은 너무 단순해요.”
“…면목 없네.”
당유혼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들 일족이 야생에서 간교한 맹수들을 상대한 건 알겠는데… 일단 인간이란 종족은 어떤 맹수들보다 더 간교한 족속들이거든요? 그들에 맞춰 상대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
붉은 바위산에서 그들 일족은 언제나 사냥꾼이었다.
맹수들이 간혹 숨어 있다 덮치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부분 함정을 파고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니 정반대의 경우가 생겼다.
“발동이 오래 걸리는 기술은 둘째치고, 그 무식하게 힘만 믿고 돌진하는 건 또 뭐예요? 제 주특기가 독이랑 암기인 거 잊었어요?”
“…….”
솔직히 말하자면 잊었다.
여기 와서 본 풍경이 워낙 주먹으로 방계들을 두들겨 패는 것이다 보니, 그 주특기를 깜박했던 것이다.
“무림인들 간의 혈투는 다 수 싸움이에요. 서로 준비 시간 다 줘놓고 일, 이, 삼 하고 숫자를 센 뒤 서로 가장 강한 기술로 쾅― 하고 붙었다가 진 놈이 윽 하고 쓰러지는 게 아니라구요.”
신랄한 비판!
적웅은 폐부를 파고드는 비판에 더더욱 속이 쓰렸다.
“막는 건 최소로 하고, 피할 거 다 피한 뒤에 한칼 제대로 먹여서 억 하고 거꾸러트리는 거. 그게 무림인들의 혈투예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약하다.
팔 척 장신의 몸뚱이를 가진 양반도, 한 치 길이의 바늘에 잘못 쑤셔지면 뒈져 버리는 게 인간이란 종족이다.
“내가 볼 때, 아저씨는 기본부터 다시 해야 해요.”
“…면목 없네.”
제대로 눈높이 교육이 됐다.
무림인들과의 경험을 위해 당유혼과 붙어본다? 개뿔…….
“가서 우리 방계 애들이랑 놀다 오세요.”
땅땅땅!
판결 완료!
붉은 바위 일족은 숙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