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125화 (125/350)

125화

장강은 넓다.

대륙의 바다라고도 불리는 게 과언이 아닌 듯, 그 광대한 물줄기 안에는 작은 섬들도 수없이 많았다.

그렇기에 그 섬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으니, 그 이름 모를 섬들 중 하나에 다 부서져 가는 배 하나가 정박되어 있었다.

“…크, 마지막에 보는 얼굴들이 네 녀석들이라니. 내가 인생을 아주 헛살았구만?”

“허허, 저희라고 썩 달갑겠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채주. 마지막까지 채주와 함께하다니, 천망회회 소이불실은 전부 다 개소리지 말입니다.”

웃는 얼굴로 훈훈한 덕담을 나누는 부하들.

그 모습을 보자니 백경은 가슴 따뜻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놈들. 잘도 안 뒤지고 살아남았구만.”

“채주께서 안 가시는데 저희가 가겠습니까?”

“가실 거면 먼저 가십쇼. 전 이승에 미련이 아주 많습니다.”

끝까지 한마디 지지 않고 내뱉는 부하들의 모습.

충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수준이었으나, 백경은 그들을 보며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나올 것만 같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멍청한… 이 멍청한 놈들…….’

봉두난발의 헝클어진 머리.

옷가지들은 하나같이 갈기갈기 찢겨 있고, 그 틈으로 피딱지가 눌어붙은 상처들이 즐비했다.

밥을 제때 챙겨 먹지 못한 것을 헤아리는 것은 이미 우스운 수준이었기에, 피골이 상접해 가면서도 웃음을 짓고 있는 그들을 보며 백경은 입을 열었다.

“멍청한 놈들아. 너희들…….”

“말하지 마십쇼.”

“냄새납니다. 입 좀 다물어 주십쇼.”

…이 새끼들이?

말꼬리가 잘린 백경이 어처구니가 없어 눈을 부라리자 부하들은 오히려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뭔 말할지 뻔히 아는데 그냥 가만 계시죠?”

“내, 내가 뭘 말할 줄 알고?”

“말해 봐야 내가 남을 테니 너희는 도망쳐라, 이 정도 아닙니까?”

“니들 같이 못난 놈들이랑 마지막까지도 같이 하긴 싫다. 썩 꺼져라, 라는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릴 수도 있고.”

저마다 한마디씩 뱉는 말에 입이 꾹 다물린 것은 백경이었다.

“…….”

백경(白鯨).

백경채의 우두머리이자 이들을 이끄는 자.

그리고 세상을 바꿔보려 했으나 버림받은 자.

그런 그를 보며 부하들이 입을 열었다.

“대장.”

“…시끄러워, 너희도 같은 말 할 거면…….”

“가십쇼.”

똑같이 말을 잘라보려 했지만, 부하들은 듣지도 않았다.

“지난 전투에서 비목어(比目魚) 녀석이 난관 밖으로 거꾸러지는 걸 본 놈이 있답니다.”

“오기로 약속했던 흑사어(黑鯊魚)는 보이지도 않고.”

“제일 문제는… 육자방(陸子房)이 뱃머리를 돌려 달아났답니다.”

육자방. 백경이 겨우겨우 모셔와 그들 백경채의 군사 역할을 하는 이.

외부에서 포위망을 뚫어야 할 그가 달아났다는 정보는 가뜩이나 외딴 섬에 갇힌 그들에게 끔찍한 이야기였다.

감히 부하들에게 알릴 생각도 못 해 이곳에서나마 말하는 모습들에 백경은 눈을 감았다.

‘…결국, 한바탕의 봄 꿈이었나.’

“가족이 말을 안 듣고 엇나가면, 패서라도 올바른 길로 가게 해줘야죠. 나이도 좀 있는 것 같은데, 애들이 말 안 듣는다고 도망치는 어른이 어디 있어요?”

하룻밤 산중에서 잠을 청하려다 스쳐 간 인연.

그 누군가가 해준 말이 현실에서 도망치려던 백경의 발목을 붙잡았고, 그로부터 그에게 꿈을 꾸게 만들었다.

결국 평생 연을 끊고 살려던 장강으로 돌아와, 괴짜라 불리던 놈들을 하나하나 직접 만나 설득하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진정 그 모든 게 여기까지란 말일까?

“바깥 상황은 어떻더냐?”

“최악이죠.”

“삼 공자의 병력들이 섬을 감싸고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대장의 기함(旗艦)도 개박살이 났으니, 그 포위망을 뚫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겁니다.”

“…그러냐?”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같이 최악을 말하고 있었다.

그에 백경은 크게 숨을 들이쉬다가,

“…쯧. 애들 다 불러봐.”

마지막 한 모금을 뱉으며 그리 말했다.

* * *

웅성웅성.

작은 동굴 밖으로 수십 명의 수적들이 모였다.

백경채의 생존자이며, 그 최후까지 백경과 함께하기로 한 무리들.

그 징글징글한 이들을 바라보며 백경이 입을 열었다.

“다들 뭐 알고 있을 거다. 구차하게 얼마나 X됐는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망했다. 그것도 아주 크게 망했지.”

이보다 더 망할 수 있을까 싶다. 어떤 악덕 고리대금업자들도 돈을 빌려주지 않을 정도까지 망해 버렸다.

“그래서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뭐… 야음(夜陰)을 틈타 헤엄쳐 간다면 또 모를 일이다만… 나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

살고 싶은 대로 살아왔고, 이젠 죽을 때다. 그렇다면 죽을 때 역시 죽고 싶은 대로 죽어야 옳지 않을까.

“나는 이제 저놈들과 마지막까지 싸워볼 거다. 괜히 살려달라고 구걸하고 싶지도 않고, 살아남아서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까. 그래서 너희한테 내가 시선을 최대한 끌어볼 테니 도망치라 하고 싶은데…….”

그리 말하며 슬쩍 눈치를 보는데,

“우우우우우우!!”

“개소리하지 마십쇼!”

“돛대에 매달아 버려라!”

들려오는 야유를 보니 역시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인 듯하다.

“…그래, 됐다. 너희한테 뭘 바라냐.”

가뜩이나 반골 놈들만 모아놨더니, 역시 마지막까지 죽어라 말을 들어 먹지 않는구만?

“좋다. 그럼 내가 할 말은 하나다.”

챙―

거대한 박도를 꺼내든 그가 소리쳤다.

“가자. 죽으러.”

* * *

물안개가 어슴푸레 피어나는 새벽.

포위망의 동북 측을 담당하고 있던 비사채 채주 유월도는 싯팔싯팔 욕지거리를 뱉고 있었다.

“빌어 처먹을 삼 공자놈. 제깟 놈이 다음 용왕(龍王)이면 용왕이지, 채주나 되는 나에게 직접 포위망을 구축하라고 시켜?”

용왕(龍王)이란 장강수로채의 열여덟 개 수적채를 모두 이끄는 자의 이명이다.

비록 지금은 공석이지만, 전대 용왕의 세 번째 제자인 삼 공자가 그 자리에 오를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이미 두 번째 제자인 이 공자를 따르는 백경채를 제외한 모두가 삼 공자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삼 공자는 자신의 사형이자 적수인 백경을 밀어붙여 동정호의 외딴 섬에 가둬 놓고, 열 명의 채주들을 직접 부려 그곳을 포위하게 시켰다.

직접적인 전투를 하지 않고, 백경을 아사시키겠다는 전략적 선택이지만, 정작 그걸 따르는 채주들은 자존심이 상해 다들 안색이 좋지 못했다.

으득―

‘어른 보기를 아주 종놈으로 보는구나.’

이미 불혹을 넘어서는 유월도는 이제 갓 서른이 된 삼 공자를 떠올리며 그렇게 한참을 씹어댔다.

백경 놈이 여기로 쳐들어올 리가 있겠냐고 생각하며.

그런데…….

“배, 배다!!”

“이 공자의 기함이다!!”

포위 임무를 맡았으나 정작 자신은 초호화로 꾸민 선실 밖으로 나갈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고 있던 유월도의 귀를 때리는 외침!

그에 유월도는 깜짝 놀라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슨 소리냐! 이 공자의 기함이라니… 젠장, 진짜잖아?!”

멀리서부터 보이는 ‘백경(白鯨)’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거대한 돛이 특히 인상적인 선박.

이 공자의 기함인 백경이 분명했다.

“왜 하필 이쪽으로…….”

평범하게 전장에서 이 숫자로 마주친다면 공을 쌓을 기회라고 좋아라 하겠지만, 지금은 이미 전세가 확실하게 결정이 난 지 오래다.

여기서 저놈과 마주쳐 봐야 공을 세우긴 개뿔, 죽을 각오를 한 저놈과 동귀어진밖에 더 할까?

“…거지 같네.”

욕지거리를 뱉고 있자니 부쩍 가까워진 선두에서 백경이 모습을 보였다.

온몸에 붕대를 둘둘 감은 게 딱 봐도 골골거리는 환자의 모습이었지만, 이름 그대로 고래 같은 풍채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조금도 꺾임이 없었다.

“이놈! 유월도!”

“뭐, 뭣?”

삼 공자보다 나이가 많은 이 공자라 해봐야 여전히 자신보다는 한참이나 어린놈이 반말을 찍찍 해대니, 자연스레 유월도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이 시부랄 잡놈이!! 누굴 함부로 부르느냐!!”

“누구긴 누구야, 비겁하기 짝이 없는 수적놈 우두머리를 부른다!!”

커다란 북이라도 두드린 듯 바다를 울리는 목소리.

자연스레 대장들끼리 마주 서게 되자 백경이 다시금 소리쳤다.

“네놈도 부끄러움을 알면 사람답게 행동해라! 우리가 아무리 근본 없는 수적 새끼들이라지만, 네놈들이 하는 짓은 선을 넘어도 세게 넘었지 않겠냐!!”

폭력, 방화, 밀무역, 고리대금업은 귀여운 수준.

인신매매에 청부살인 등등, 사람이 사람을 사고파는 일에까지 손을 대는 것이 삼 공자라는 놈이 하는 짓거리였고, 용왕 사후 장강수로채는 하나둘 삼 공자의 행동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에 분노한 백경이 이게 사람 새끼가 할 짓이냐 소리쳤으나, 돌아온 대답은 하나같이 싸늘했다.

“선? 개같은 소릴 하는군. 수적 새끼들이 정도가 어디 있고, 법도가 어딨느냐? 돈이 법이고 협의이며 정의다!”

그래, 그게 바로 백경이 외톨이가 된 이유였다.

“수적이 수적답게 수적질하겠다는데 훈장질하는 네놈을 따를 놈이 어디 있겠느냐? 네가 오늘날 그 모양 그 꼴이 된 것도 다 그 위선과 가식적인 행동 때문인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유월도는 한때는 위풍당당한 기세를 뽐냈음에도, 이제는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만 같은 유령선이나 다름없어진 백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군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네놈의 목을 이 내가 직접 쳐주마!!”

외침과 동시에 유월도의 등 뒤로 인영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영평, 장마동.’

그들은 각기 다른 수척 채들의 채주.

백경을 잡기 위해 한 척에 세 명이나 되는 채주가 승선한 채 기다리고 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질어질하네.’

지금 몸 상태로는 한 놈 제치기도 더럽게 힘든데, 다른 채주 놈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있는 다른 수척 재들의 물량은 말할 것도 없는 수준.

그럼에도 백경은 당당히 소리쳤다.

“편이 없긴 왜 없어! 뒤쪽을 봐라!!”

“…뭐?”

편이 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예상치 못한 대답에 유월도가 당황해 돌아보니,

“…뭐야, 없는데?”

있긴 개뿔. 뒤편에는 마찬가지로 당황해 뒤를 돌아보다 아무것도 없어서 당황해하는 영평과 장마동이 있을 뿐이었다.

그때,

“지금이다! 돌격!!”

백경이 박도를 뽑아 들며 버럭 소리쳤다.

그들의 두 기함은 대화를 하느라 어느새 슬금슬금 가까워진 상태였고, 당황하는 틈을 타 돌격을 선언하니 이미 대기하고 있던 백경채의 수적들이 있는 힘껏 노를 저어 그 얼마 안 되는 거리마저 바짝 좁혀 버렸다.

콰앙―

충각(衝角)이 선박의 선두를 때려 부수며 박혀 들었다.

“다 쓸어버려라!”

백경이 선두로 달려 적선으로 건너갔다.

“이 구라쟁이 새끼!!”

“저놈만 죽이면 된다!!”

그 모습에 수적들은 당황했지만, 그건 아주 잠시에 불과했다.

충각 전술은 수적들에게 있어 아침 인사나 다름없었으니, 이미 이런 수전(水戰)에 잔뼈가 굵은 세 명의 채주들은 오히려 넘어오는 백경을 향해 좋다고 마주 달려들었다.

“목을 내놔라, 백경!”

“오늘 아침은 고래고기다!!”

“헉?!”

그래도 조금은 당황할 줄 알았는데, 진짜 조금만 당황하고 곧장 달려오는 세 명의 채주들의 모습에 백경은 당황해 박도를 휘둘렀다.

카카카캉!!

지쳤다고는 해도 어마어마한 거력이 담긴 도격이 날아들었다.

채주들의 수준에서도 괴력(怪力)이라 할 만한 강격이었으나, 그들은 노련하게 대응했다.

두 명의 채주가 각자의 병장기로 그걸 막아내면, 다른 하나가 옆으로 돌아 빈틈을 노리는 것이다.

“이놈! 네놈과 한두 번 부딪쳐 보냐!!”

백경과 백경채가 벌인 일 대 십칠의 수전이 일어난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이제 채주들 사이에서 백경을 상대하는 법은 공공재와 같았다.

덕분에 백경의 손은 순식간에 어지러워졌으니,

“이, 이 새끼들…….”

기껏 죽을 각오하고 왔는데, 역시 세상은 만만치 않다는 건가?

백경은 결국 마지막 순간이 성큼성큼 다가옴에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뒤, 뒤에……!!”

어찌 한번 들어본 것 같은 말.

“이 거짓말쟁이 새끼!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그냥 뒈져라!!

이젠 고개도 돌리지 않는 유월도의 칼날이 날아드는 순간이었다.

한데 그때,

콰콰콰쾅!!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굉음.

그리고,

“으아아악!!”

“스, 습격이다!!”

들려오는 비명 소리.

절대 백경채 수적 놈들과의 싸움으로 벌어질 수 있는 소리는 아닌 것이 들려오자 세 명의 채주들은 깜짝 놀라 뒤쪽을 쳐다보았다.

놀랍게도, 절벽 위에서 커다란 쇠사슬이 날아와 꽂혀 들고 있었으니…….

‘저, 저게 뭐야?’

왜 진짜 기습이 날아오지?

제일 놀란 건 일단 백경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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