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동정호에 도달한 당유혼은 곧장 백경채와 나머지 장강수로채의 열일곱 수채들이 최종 결전을 벌인다는 곳으로 이동했다.
중간중간 하윤호가 보낸 하오문 인력의 현지 정보 조달을 받긴 했지만, 얼마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중인지 그게 없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한창 전쟁을 벌이는 중인 전장은 침입하기에 꽤 난이도가 있는 편이었지만…….
‘내가 마교의 광신도놈들이 만든 포위망도 뚫고 들어가 천마 목을 따온 몸인데, 겨우 수적놈들 포위망 하나 못 뚫어서야 말도 안 되지.’
당유혼은 기어코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가장 가까운 봉우리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저기 있군.’
전장의 상황은 일방적이었다.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 것인지, 죽기 전 시원하게 들이박고 가겠다는 것인지. 딱 봐도 쪽수에서부터 밀리는 듯한 이들이 최후의 돌격을 감행한 듯했지만…….
‘턱도 없군. 저 아재는 당장 죽으려 하고 있고.’
백경.
보통 수적도 아니고, 채주급 세 명에게 둘러싸인 그는 상당한 위기에 봉착한 듯했다.
‘채주급은 나도 힘든데.’
녹림칠십이채는 이름 그대로 채주가 칠십이 명이고, 장강십팔채는 이름 그대로 채주가 열여덟 명이다.
그건 단순히 장강의 수적 채주들이 녹림의 산적 채주보다 네 배쯤, 되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부상당한 갈무흔이랑 비슷한 수준이군.’
그런 놈들이 하나가 아니라 셋이라…….
아무리 당유혼이 그때보다 강해졌다곤 하지만, 여기 어디 수적 채주놈들 셋만 있고 끝인 것도 아니었으니…….
“이거 완전 곤란한 상황이잖아?”
한 마디로 답 없는 상황.
하지만, 난색을 표하는 말과 달리 당유혼은 입꼬리는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럼 어쩔 수 없구만. 이래서야, 지옥에서 돌아온 추풍대주 갈무흔이 신병기를 꺼내는 수밖에는.”
최대한 조용하게 처리하고 싶지만, 갈무흔의 지옥참마도가 울부짖고 있으니 도저히 쉽지 않을 듯하다.
크르르륵…….
묵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저히 사천에서부터 가지고 올 만한 물자는 아니라서, 현지 조달한 물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의 정체는 거대한 쇠 구슬!
공성 병기라고 불려도 무방할 수준의 그것을 지게에 싣고 여기까지 올 때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쓸 일이 없었다면, 속상했을 거야.”
그러곤 개중 하나를 집어 들며 당유혼은 천천히 중단전을 개방시켰다.
구우우우…….
검푸른 기운이 심장 어림에서부터 풀어져 나왔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진정 지옥과 심연으로부터 풀려나온 무언가가 아닐까 싶은 풍경이었으나, 정작 당유혼의 안색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역시, 엄청난 효율인데?’
중단전이란 다른 존재의 힘을 빌려오는 것.
당연히 빌려올 대상은 하단전에 똬리 튼 성질 더러운 탐(貪)의 힘이었고, 이걸 중단전을 통해 빌려오는 방식은 그전까지 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효율을 보여주었다.
‘나 혼자 진법을 발동시키고, 신체에 온갖 부담을 주며 했던 것과 달리 훨씬 안정적이고 빠르게 힘을 끌어올 수 있다.’
물론, 그 때문에 빌려오는 힘의 총량 자체는 줄어들긴 하지만.
스스스…….
그렇게 줄어든 힘이라 할지라도 수십 근에 달하는 철구를 들어 올릴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충격과 경악을 선사하기에는 충분한 힘일 테지만…….
‘당장 이 힘으로만 해도 이 철구를 들어 던지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래서야 한계가 있지.’
우우웅…….
당유혼은 자신을 둘러싼 검푸른 기운을 철구를 앞뒤로 둘러싸는 다중의 고리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쭉한 나선의 회랑(回廊)은 기이한 힘을 뿜어내고 있었으니, 이 힘은 참으로 신기하여 세상의 북쪽에서 흘러나와 남쪽으로 흘러가는 기이한 흐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세상에 존재하되 결코 보이지 않는 어떠한 법칙이었다.
‘내가 이것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
삼십 년도 더 전, 독(毒)과 약(藥)의 구분이 무의미하며, 그것의 가장 기본이 되는 힘을 탐구하던 중 당유혼은 이 세상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볼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그 힘들을 무엇이라 정확히 이름 붙이지는 못했으나, 개중 어떤 것은 이 세상 어딜 가나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흐름이었다.
한때는 벼락이 내려칠 때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다고도 여겼으나, 나중에 돌이켜 보니 그것은 아주 일부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힘의 연구에 매진한 결과, 비록 무인들 간의 결투에서 큰 효용을 보지는 못하겠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했으나, 계속 연구한 결과 다른 분야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자면 이렇게.’
나선의 회랑에 놓인 철구가 그 끝을 저 앞에 놓인 뱃머리로 향했다.
장전.
고리를 타고 흐르던 어지러운 힘이 순서를 갖추었다.
뒤에서 앞으로.
순차적으로 배열되는 힘의 흐름에 따라 철구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고, 그렇게 나아갈수록 철구는 가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끝에 달하는 순간, 철구의 속도는 이미 초월적인 영역에 도달해 있었으니.
나선포(螺線砲), 천둥의 길(霹靂路).
콰아아아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뱃머리에 강철의 천둥 벼락이 내리꽂혔다.
“끄아아아악!!”
“뭐, 뭐야?!”
한창 백경호를 향해 화살 비를 퍼붓던 수적들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철구는 배의 벽을 박살 내고 선실까지 처박혀 있었고, 그 여파로 수십 명은 우습게 태울 거대한 선박이 출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의 불행은 하나로 끝나지 않았으니…….
“또 간다―!”
쾅―!
콰앙!
콰아아앙!!
“포탄 세례를 받아라!”
당유혼은 몇 번의 시도에 익숙해져 이젠 아예 대여섯 개나 되는 나선의 회랑을 만들어 냈다.
“일제 포격!”
콰콰콰쾅!!
“으아아악!!”
“이, 이게 뭐야?!”
“기습이다!! 배가 침몰하고 있다!!”
삽시간에 무너지는 포위망과 침몰하는 선단.
덕분에 중단전을 통해 빌려온 힘도 쭉쭉 녹아내리고 있었지만…….
‘이 판국에 내공을 아낄 때냐.’
한판 거하게 벌인다는 한탕주의식 사고는 이 순간 동정호에 때아닌 거대한 강철비를 퍼부었다.
그리고 충분히 전열이 붕괴되었을 때쯤,
“자, 슬슬 가볼까.”
이제는 자신이 만들어 낸 철구에 직접 올라타 철마(鐵馬)와 함께 전장으로 쏘아졌다.
콰아아아앙!!
당유혼은 중간에 뛰어내렸고, 철구는 목표 지점에 처박혔다.
그곳에 있던 세 명의 수적 채주들은 대경하면서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회피하는 데 성공했고, 난입한 괴인을 돌아보며 노호성을 터트렸다.
“웬 놈이냐!!”
등 허리에 거대한 박도를 짊어지고 나타난 복면인. 입가에 뚫린 구멍을 통해 그 입꼬리가 히쭉 올라가는 게 그들의 눈에 보일 때,
“정체를 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박도를 꺼내 든 복면인은 화려하게 몇 번 휘두르더니, 가장 가까이 있던 수적 채주, 유월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추풍도법(麤風刀法), 혈랑비월(血狼飛越).
카카카카칵!!
“큭?!”
미친 듯이 날아드는 도격에 유월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붉은 도기가 융단폭격을 가하듯 그에게 쏟아졌고, 다행히 그것들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뭐 이런 무식한 새끼가……!’
단순히 사납고 폭급하다, 정도로 표현할 도격이 아니다.
모름지기 고수라면 수 싸움이 필수적이고, 장기전으로 전황이 길어질 때를 대비하여 내공의 안배를 하는 게 일반적인 상식.
하지만…….
‘이 새끼는 뒤가 없나?’
가진바 내공을 모두 쏟아내겠다는 듯 핏빛 도기를 뿜어내는 모습에 유월도의 눈이 부릅뜨였다.
“뭐 해, 이 새끼들아!! 보고만 있냐?!”
다른 수적 채주들을 부르짖자, 반쯤 얼이 빠져있던 영평과 장마동 역시 자신들의 칼을 꼬나쥐고 달려들었다.
그에,
“어딜!”
복면인의 박도가 크게 휘둘러지더니, 붉은 반월이 그들을 향해 뻗어져 나갔다.
“이크!”
“헙……!”
다들 한가락 하는 이들이라 어렵지 않게 막아내긴 했지만,
‘뭐 이런 미친 내공 양이?!’
그 무식하리만치 어마어마한 내공 양에 다들 질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네놈… 진짜 정체가 뭐냐?”
“크크, 이 도법을 보고도 아직도 내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나?”
“뭐? 그게 뭔 개소리…….”
이름을 대라니 자기의 칼질을 보여주는 모습에 유월도는 눈이 뒤집히려 했지만,
“잠깐, 이 성난 바람과 같은 도법. 알 것도 같은데…….”
옆에 있던 영평은 흠칫하더니 무언가 기억날 듯 말 듯 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크크, 그래도 한 놈은 나를 알아보는군. 그래, 내가 바로 추풍대주 갈무흔 님이시다!”
“갈!”
“무!”
“흔?”
전직 야차전의 여덟 번째 전귀(戰鬼)!
그 이름에 수적 채주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개소리하지 마라, 이 새끼야!”
“그 새끼 뒤진 지가 언젠데!”
“사칭을 해도 무슨……!”
곧장 일그러지며 야유와 비난이 퍼부어졌다.
“이런, 이런.”
하지만 복면인은 여유롭게 고개를 저었다.
“이 추풍대주 갈무흔 님이 지옥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나?”
“…뭐?”
“지옥의 불길도, 죽음의 심연도, 이 몸을 넘볼 수는 없다.”
화르륵 피어오르는 도기를 박도에 휘감은 채 오연히 선 자칭 갈무흔이 그 끝을 수적 채주들에게 겨누었다.
“너희들이 바로 내 부활의 신호탄을 알릴 제물이다……!”
쿠구구구구!!
그와 함께 검푸른 기운이 폭증했다.
큰 거 온다!
그 사실을 깨달은 세 명의 채주들은 깜짝 놀라면서도 뒤로 물러나 각기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 순간, 높이 들어 올려진 박도가 휘둘러졌으니,
콰아아아아앙!!
그 대상은 채주가 아닌 그가 밟고 있던 배의 바닥이었다.
“이런 개……!!”
“도망쳤다!! 놈들이 도망쳤다!!”
“으아아아아!! 이 거짓말쟁이 놈들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뻥 뚫린, 아니, 그냥 박살 나 버린 바닥.
뒤늦게 채주들이 고함을 질러 댔지만, 이미 둘의 흔적은 눈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 * *
부서진 배의 파편이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동정호의 물 위.
그 속에서 두 명의 인원이 어푸어푸 헤엄치다 겨우겨우 이름 없는 섬의 뭍에 닿았다.
“푸하아……! 뒤지는 줄 알았구만!!”
적의 추적을 피해 물밑으로 잠수해서 움직이길 한참, 겨우겨우 숨을 돌릴 수 있게 된 백경은 물에 푹 젖은 채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흐하핫, 살았구만, 살았어! 꼼짝없이 뒈지는 줄 알았는데!”
진짜 여기서 끝이구나, 하고 정신이 아찔했는데.
아직 목이 붙어 있음에 감사하며 곁에서 물을 터는 복면인을 돌아봤다.
“고맙네, 추풍대주. 왜 여깄는지 모르겠다만 일단 목숨을 구했어.”
그에게 들려오는 악명이 썩 좋지는 않지만, 구명지은의 은인이란 건 부정할 수 없는 것. 포권을 취하며 감사를 표하자,
“오랜만에 보는데 한결같이 개소리시네요.”
자칭 추풍대주 갈무흔은 물에 젖은 복면을 벗으며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박았다.
그리고,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이가 구명인 것을 확인한 백경의 두 눈이 크게 뜨였으니,
“자, 자네는……!!”
기억 속에 분명 있는 청년의 얼굴.
그러니까,
“이름이… 뭐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