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127화 (127/350)

127화

뭐 하는 새끼지?

당유혼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곧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 맞다. 내가 이름을 안 가르쳐줬었구나.’

“이보시게, 소협.”

“고맙네, 소협.”

“그래서 말인데, 자네 나랑 함께 갈 생각 없나?”

생각해 보면 그와 자신의 사이에 호칭은 소협 아니면 자네가 끝이었다.

‘그때야 장강 용왕의 제자라는 것쯤은 추측했었다만, 나랑 접점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인생사 요지경. 다시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당유혼이에요. 산에서 보고 또 보네요.”

“허… 역시 그때 그 소협이군. 한데, 자네 참 많이 변했군.”

“사람은 다 변하는 거죠. 그러는 아저씨도 그때랑은 좀 다르네요?”

“나 말인가? 하하…….”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백경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가족 놈들을 두들겨 패서라도 바꾸려 했는데, 머리가 제법 굵었다는 건지 원. 들어먹으려고 하지를 않더군.”

“그래서 지금은 쫓겨나셨구요?”

“거참… 아픈 상처를 잘도 헤집는구먼. 그래, 맞네. 그리되었지. 말하고 나니 머쓱하구먼, 허허헛. 해서 자네는 어인 일인가?”

“전 투자하러 왔죠.”

“응? 날 도와주러 왔다고?”

“뭔 소리예요? 투자하러 왔다니까요?”

투자? 이 판국에?

백경의 표정이 떨떠름해지자 당유혼은 좌판을 깔듯 주저앉으며 바닥을 탁탁 두들겼다.

“그러니까 그전에, 상황 설명이나 좀 듣죠.”

“무슨 설명 말인가?”

“뭐긴요. 뭘 얼마나 처맞고 왔는지죠.”

“허허… 참, 자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뼈 때리기 좋아하는구먼.”

변했다는 말은 취소.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끼며 백경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 못 해줄 말은 없지. 쉽게 말해 나는 망했네.”

그냥 망한 것도 아니고, 아주 쫄딱 망했다.

이곳 장강으로 돌아온 이후, 백경은 직접 발품을 받아 사람을 구했다.

원래 자신의 지지기반인 백경채를 재정비하고, 인재라고 소문이 돈 이들은 맨발로 달려 나가서라도 설득하고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전력은 열세였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그마저도 제대로 못 해 이 꼴이 났다.

“그러니까, 기껏 삼고초려를 반복해 모셔온 군사는 아저씨를 버리고 튀었고, 나머지들은 선상전을 하다가 배 밑으로 떨어졌다구요?”

“아니… 뭔 말을 그렇게 하나? 우리 자방(子房)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예, 뭐. 그러시겠죠.”

전혀 믿지 않는 표정에 백경은 표정은 잔뜩 침울해졌다.

“쯧, 그러게 왜 되지도 않는 오지랖을 부려요? 수적이면 수적답게 행동하지.”

“…자네도 그 말인가?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우리 장강수로채를 단순 수적이라 생각하지 않네.”

“수적이 수적이지, 그럼 뭐예요?”

“뱃사람.”

거침없는 매도의 연속에서도 백경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우습게 들릴 수 있겠으나, 나는 우리 장강수로채에게도 아직 뱃사람의 낭만이 있다고 생각한다네.”

그리고, 그걸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선이 존재하는 것이고.

상황은 열악했으나 백경은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크하하, 형님은 절대 모를 거요. 뱃사람의 낭만을!”

어찌나 짙은 향수를 느끼게 하는지.

“…부진장강곤곤래(不盡長江滾滾來).”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뱉자,

“응? 자네가 그 말을 어찌 아나?”

백경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우리 스승님의 맨날 입에 담던 말인데…….”

이제는 아는 이 얼마 없는 시구를 읊은 당유혼은 비릿하게 웃었다.

“뭔 소리예요. 그거 우리 사천에서 나온 말인데.”

“사천? 자네, 사천 출신인가?”

“물론. 무려, 사천당가의 직계예요.”

“헛… 사천당가?”

그 이름에 백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백경은 다시금 원래의 안색을 회복하며 말했다.

“…얼마 전부터 그 이름이 연일 들려오는 것은 들었는데…….”

“저희가 좀 잘나가긴 하죠. 뭐, 여하튼 그런 사천당가의 대표로서 온 겁니다만. 우리 사업 하나 안 할래요?”

“사…업?”

“저한테 진짜 기가 막힌 사업 계획이 있거든요?”

이거 진짜 물건이거든요.

어디서 약 냄새 솔솔 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백경이었으나,

꽈악―

“허허, 어디 가세요.”

일단 한번 잡숴보시라니까?

이미 그의 퇴로는 막혀 있었다.

* * *

“…운수 사업이라고?”

“네. 어때요?”

당유혼의 장대한 사업 계획을 들은 백경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장강을 중심으로 한 수상 표국이라고 불려도 무방하죠. 예로부터 호북과 호남의 농작물이 익으면 천하가 풍족하다고, 거기 있는 농작물만 해 먹어도 전 무림의 식량 사업에 영향을 끼치게 될 거예요.”

“그, 그걸 우리가 한다고?”

“그건 기본이죠. 장강의 물줄기를 이용해 먹을 수만 있다면 뭐든 못 해 먹겠어요? 단순 중원뿐 아니라 해동(海東)과 동영(東瀛)의 물자까지도 팔아먹을 수 있을걸요?”

상거래가 활발할수록 가장 남겨 먹기 좋은 게 중개업이다. 정해진 값어치가 있는 물자와 달리, ‘운송’이라는 것은 무형의 자산이기에 그 가치를 쉽게 환산할 수 없으니까!

‘하윤호, 그 녀석이 차마 못 미더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이유지.’

머리 좀 돌아가는 놈이라면 장강의 가능성에 대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암만 그래도… 우리가 그게 되겠는가?”

문제는 그 장강에 사는 양반이 그걸 가장 부정적이게 생각한다는 거지만.

“장강수로채가 왜요? 아저씨네들보다 장강을 대표하고 상징적인 집단이 또 있어요?”

“그, 그렇긴 한데…….”

우리는 사파잖아…….

차마 그 말까지는 입 밖으로 못 꺼내겠는지 우물쭈물하자 당유혼은 쯧쯧 혀를 찼다.

“언제는 뱃사람이니 뭐니, 낭만이니 뭐니 했잖아요. 그건 뭐 다 허세였어요?”

“큭…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우리는 결국 한낱 수적패일 뿐이지. 어느 상인이 수적에게 표물을 맡기겠나!”

말 그대로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격.

한평생 세상의 인식에 맞서 싸웠던 백경이기에 세상이 자신들을 어찌 인식하는지는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쯧. 아저씨, 겨우 그 정도였어요?”

“뭐, 뭣……?”

당유혼의 어조는 신랄했다.

“아저씨 따라가서 잘되면 전 무림에 이름을 날릴 기회도 있다면서요? 그게 고작 수적패로서 명성을 날린다는 거였어요?”

“그건…….”

“말 안 듣는 가족이라면 두들겨 패서라도 데려가야 했다고 말했잖아요. 자신은 정파의 위선자들처럼 더 이상 가식을 부리지 않겠다면서요. 이제 와서 고작 세상의 인식이 두려워 그걸 멈춰요?”

그렇다면 대체 가족들을 두들겨 패기까지 해서 데려가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비수와 같은 말들이 날아와 푹푹 박히자 백경은 그 거대한 덩치가 애처로울 지경으로 바들바들 떨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꽂히는 가장 아픈 말.

“또, 도망칠 거예요?”

물 위에서 태어난 그가, 산에서 자신을 만났던 때처럼 또다시 도망칠 거냐고.

그 말이 날아와 꽂히는 순간 백경은 더 이상 떨지 않았다.

그의 숨이 멎은 듯 멈추었고,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는 고요한 침묵만이 내리꽂혔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상대방의 심사숙고를 기다려주던 당유혼이 문득 지평선을 날아가는 새들을 볼 때쯤 백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법이, 있겠는가?”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

‘역시.’

그것은 결코 현실에 부딪혀 좌절한 자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니,

“우리가, 더 이상 한낱 수적이 아닐 수 있을… 뱃사람으로서 낭만을 꿈꿀 수 있는 그런 방법이 있겠는가?”

답을 갈구하는 듯한 떨리는 물음.

그에,

“물론이죠.”

당유혼은 활짝 웃으며 확고부동한 대답을 내놓았다.

* * *

깊은 밤이 되었다.

야음을 틈타 인적 드문 섬에서는 얼기설기 지어진 뗏목 한 척이 물 위로 나아갔다.

“일단은 여길 벗어나죠.”

뭘 하든 여기 주저앉아 있어서는 답이 없다고 말한 당유혼은 무인도의 나무들을 베어내 뗏목을 만들었고, 백경과 함께 그것을 타고 동정호로 나아갔다.

“쉽지 않을 걸세. 놈들은 내 시체를 발견하지 않는 이상 수십 일이고, 수백 일이고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을 테니까.”

수상에는 대형 범선이 진을 치고 있을 것이고, 하다못해 작은 뗏목을 댈 만한 뭍에도 수적들이 진을 치고 있을 거라고.

그 말에 당유혼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있으면요?”

“응?”

“적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섬에 죽치고 있게요?”

“그건… 아니지.”

적이 진을 치고 있든 북을 치고 있든 춤을 추고 있든 달라질 건 없다.

“허…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자네도 참 배포가 보통이 아니군.”

“헛소리할 시간에 노나 저어요.”

“…….”

백경은 울적해졌다.

장강을 장악한 열여덟 수채의 총 채주 장강용왕.

그의 둘째 제자인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을 것이라 언제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아, 좀 팍팍 저어봐요!”

“아, 알겠네…….”

하지만 뭐 어쩔까.

노질이 늦어지면 곧바로 날아오는 구박에 백경은 우울해질 틈도 없이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 했다.

그래서 그리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데,

턱―

무언가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이건…….”

“쇠사슬…이군.”

선박과 선박 사이마다 쇠사슬이 연결되어 물 위에 겹겹이 설치되어 있었다.

“혹시나 내가 야음을 틈타 조각배나 뗏목을 이용해 탈출할까 봐 이리 막아놓은 것일세.”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만?

주변을 돌아보니 저 지평선의 끝까지 닻을 내려 물 위에 고정된 선박들이 가득이다.

그들 모두에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으면 뗏목으론 절대 못 빠져나간다.

“…미안하네. 나 때문에 자네도 위험해져서.”

괜스레 백경이 고개를 숙이자 당유혼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됐어요. 위험 없는 투자가 어디 있다고.”

여기 올 때야 절벽에서 뛰어내렸다지만, 그걸 거꾸로 거스르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 자기만이라면 될지 몰라도…….

‘평생 물에서 살아온 이 양반은 안 될 거란 말이지.’

쓸모없는 물개 같으니라고.

백경은 뭔지 몰라도 엄청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뭐라 말도 못 하고 얌전히 입을 꾹 다물고 기다렸다.

그렇게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는데,

“어쩔 수 없네요.”

가만히 주변만 둘러보던 당유혼이 입을 열었다.

“…뭘 말인가?”

“배를 탈취하죠.”

“……?!”

뭐, 뭐라고?

“자네 미쳤나?”

“지극히 제정신인데요?”

“아니…….”

여기서 배를 탈취하는 제안을 한다고?

“저기 저 절벽을 타고 오르는 것보다는 저 배의 돛을 타고 오르는 게 더 쉽잖아요.”

“타고 오르는 것만이면 그렇겠지! 하지만, 저긴 수적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지 않나!”

지키는 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

그 부분을 통렬히 지적하자,

“에이, 수적들이요? 걔들이 진짜 눈에 불을 켜고 경비를 돌고 있을까요?”

“…그건 그렇지.”

더욱 통렬한 지적이 돌아왔다.

말해 무엇하랴.

‘수적 떼들은 뭍 위에서의 법규를 지키기 싫어 도망친 놈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놈들이 철통같은 경비?’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그들을 이끌던 백경이 가장 잘 알았다.

“가죠.”

“…그러세.”

결국 둘의 의견은 합일되었고, 가장 가까이 있는 대장선을 향해 뗏목을 움직여 나아갔다.

수적이 탄 수적선을 약탈하는 이인조 수적단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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