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 *
동정호.
토지가 비옥하여 농지가 크게 발달했을 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으로도 명성이 자자한 곳.
가뜩이나 농지가 발달하여 그 지역 사는 이들이 부유한데, 지역 자체의 아름다움까지 타고났으니 자연스레 부유한 자들을 위한 유희 시설이 발달했고, 동정호 일대는 휘황찬란하여 밤에도 대낮같이 밝은 불야성(不夜城)으로 발달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렇듯 밝은 곳이 있으면 그림자 진 곳도 있으니.
“…지미럴. 저 새끼들은 저기서 어화둥둥거리고 있을 때, 우리는 여기서 뺑이나 치고 있구만.”
백경이 숨었으리라 추측되는 섬의 일대를 포위한 수적들.
그들 중, 오늘 밤 당번을 맡은 이들은 배의 구석구석에 적당히들 모여 술병을 까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야. 백경 그놈이 생각이 있으면 이 근처로 오겠냐고.”
밤에도 강물을 비추기 위해 환히 불을 피웠지만,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구석의 그림자들 아래에서 수적들은 나불나불 자신들의 처지를 씹어댔다.
“어쩌겠어. 우리가 힘이 없는걸.”
“젠장 할, 선장 새끼는 선실에 처박혀 질펀하게 즐기고 있는데. 우리만 이러고 있어야 한다니.”
이렇게들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지만, 백경이 선박 근처로 나타날 거라 생각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하다못해 이 배의 선장조차 아무런 경계심 없이 자신의 선실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있으니까!
“막말로 진작에 고기밥이 된 새끼가 뭘 어떻게 한다고 이러는 거야?”
구시렁구시렁.
그렇게 술이나 목구멍에 쏟아 넣고 있는데,
“어떻게 하긴.”
그들 사이로 들려오는 불협화음이 하나,
“이렇게 하지.”
퍼억!
거의 동시에, 수적들의 눈앞에 불꽃이 번쩍 하고 튀더니 그들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타탁―
천령개를 내리쳐 수적들을 기절시킨 이인조.
당유혼과 백경은 선상으로 착지했고,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이 새끼들. 누구는 저 물 위에서 뺑이 치고 있을 때, 저들은 여기서 술판이나 벌이고 있다 이거지?”
당유혼이 으드득 이를 갈자, 백경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허 참. 내가 죽었다는 공식 발표도 없었을 텐데 어찌 이리들 여유로운지…….”
“어떻게는요.”
그 말에 복면을 정비한 당유혼이 툭 하고 뱉었다.
“법 지키고 살 수 없는 기적의 인내심, 내일 걱정 따위 없이 오늘만 산다는 한탕주의, 아무튼 내가 옳다는 놀라운 자기 확신 편향이 만들어 낸 기적의 산물이죠.”
“…그런가.”
그것이 수적이라는 이들의 평균점.
뱃사람의 낭만이 아닌 수적의 민낯만을 드러내는 그 모습들에 백경은 부끄러워하며 한숨을 푹 내뱉었다.
“그 덕분에 일이 쉬워졌다고 좋아해야 할지, 이들을 바꿔나가야 할 미래가 처량하다고 해야 할지…….”
“흥, 그래도 바꾸겠다는 생각은 용케 포기하지 않으시네요?”
“아무렴. 고작 이런 편린과 같은 모습 한두 번 봤다고 포기할 거면 시작도 안 했네.”
누구보다 뱃사람답지 않은 주제에, 누구보다 뱃사람다운 그를 보며 당유혼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에 백경이 씨익 웃으며 물어왔다.
“해서,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아주 제게 계획을 맡겨 놓으신 것 같네요?”
“몰랐나? 빨리 내놓으시게.”
허허.
천연덕스러운 웃음에 당유혼은 결국 피식 웃어버렸다.
“계획이야 물론 있죠. 이 배를 탈취한다, 그리고 탈출한다.”
“어찌 말인가?”
“금적금왕(擒賊擒王). 선장을 잡으면 됩니다.”
“허, 그게 될까?”
수적들의 말을 듣자 하니 선장은 저 아래쪽 선실에 있다는 모양이다.
이 넓은 동정호 일대에 포위망을 형성하기 위해 배와 배 사이의 거리가 제법 있는 편이라지만, 저 아래까지 침투하려 하다간 분명 신호탄이 쏘아 올려질 것이다.
그럼 자연스레 이목을 끌 수밖에 없는데…….
“굳이 우리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되죠.”
“응?”
“잊었어요? 제 가문이 어디인지.”
독과 암기를 다루는 데 있어 천하제일인 곳이 사천당가.
그 둘의 공통점은 검이나 도, 창 등의 다른 병장기들과 달리 흔적 없이 적들을 암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다려 봐요.”
당유혼이 나무로 된 바닥을 짚는다.
아무리 잘 지었다고는 해도, 나무로 된 바닥이기에 사이사이에 틈과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못 들어가도 작은 벌레들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크기라면 그보다 더 작은 독은 어떨까?
‘스며들어라.’
수면 성분이 함유된 독은 기화(氣化) 상태로 선실 내로 퍼져 들었다.
술판을 벌이는 이들도 있고, 이미 곯아떨어진 이들도 한가득이니 하나둘 픽픽 쓰러짐에도 그걸 눈치채는 수적들은 없었다.
“됐네요. 들어가죠.”
“…진심인가?”
물론, 그런 상황을 알 리 없는 백경은 의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럼 여기 있으시든가.”
자세한 설명 따위 할 생각 없는 당유혼은 앞서서 척척 걸어갔다.
“엇? 잠시! 같이 가세나!”
그리하여, 배의 후미로 침입해 전면으로 돌아가는 동안 보인 풍경은 당유혼이 자신했던 대로였다.
여기저기서 술판을 벌이던 이들이 곯아떨어져 있었고, 개중에는 코까지 골며 조는 이들도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위독한 성분을 넣었다간 가끔 감 좋은 놈이 의심할 수 있으니까, 수면 성분만 풀었어요.”
물론 그 외에도 이 배를 움직여야 할 인력을 놔둬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렇게 그들은 쭉쭉 안으로 들어갔고, 마침내 배 밑바닥의 노 젓는 공간을 제외한 가장 안쪽의 선장실에 당도하게 되었다.
“이리 오너라.”
삐걱―
경첩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안쪽에선 짙은 주향과 함께 벌거벗은 채 잠들어 있는 일남 삼녀가 보였다.
“하…….”
저도 모르게 백경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올 때, 당유혼은 직접 행동에 나섰다.
“이야, 이 새끼 아주 잘도 자는구나!”
“자, 자네?!”
날아간 발차기에 곤히 잠들어 있던 선장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꾸엑!!”
“이야, 아주 놀자판이지?”
“누… 누구냐!!”
“누구는 새꺄, 내가 네 친구야?”
“꾸엑!!”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선 선장은 서둘러 내공을 일으키려 했지만, 단전에 잠든 내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한 대 더 처맞은 그가 어리둥절해 있을 때,
“어쭈. 상황 파악 안 되지?”
또다시 날아든 발차기에 벽에 처박힌 선장은 그제야 헐레벌떡 자세를 고치며 소리쳤다.
“사, 살려 주십쇼!!”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태세 전환.
딱 봐도 상황이 이상하고 상대가 나보다 윗줄이다 싶으니 그대로 납작 엎드려 버리는 기민한 생존 본능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그래, 그래.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수적이란 하루 빌어먹고 하루 즐기다 하루 만에 훅 가는 존재.
그런 수적이 저 나이까지 살아남으려면 가장 필수적인건 무공이니 지략이니 하는 부차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처세술과 투철한 자기 보신 성향이 없으면 못 살아남지.’
사파의 전통적인 특징과 같은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선장의 모습에 당유혼은 적당히 의자를 하나 끌어다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이름.”
“한상욱입니다.”
“나이?”
“마흔둘인지 셋인ㅈ… 아악!!”
한 대 처맞은 선장이 바닥을 기었다.
“둘이면 둘이고 셋이면 셋이지, 그게 뭔 소리야?”
“제, 제가 고아 출신이라 정확한 나이가…….”
“…아.”
그건 몰랐네?
“큼큼. 뭐, 그건 됐고. 대충 상황 파악은 되지?”
“…어, 그러니까…….”
이 밤중에 나타난 복면인과 뒤편에 있는 용모파기는 어느 정도 익숙한 인물.
본단에서 주야장천 뿌려대는 현상 수배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된 것 같네요.”
자신의 현 상황을 정확히 표현한 모습에 당유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정확해.”
이보다 더한 상황은 있을 수 없을 테니.
“간략히 첨언해 주자면, 여기 배에 있는 놈들은 전부 내가 하독한 수면독에 중독되었다. 그리고 너한텐 특별한 걸 선사했지.”
“그게 뭡니까?”
“이거.”
“끄아아아악!!”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선장은 하복부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통증에 몸부림쳤다.
한참을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다 한 식경이 흘러서야 거친 숨을 몰아쉴 수 있었으니, 겨우겨우 돌아온 이성에 선장은 땀에 흠뻑 젖은 채 실감했다.
‘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큰일났다.’
뇌가 마비될 것 같은 고통도 고통인데, 자신이 그 난리를 부리는 동안 밖에서 소란 한 점 일어나지 않았다.
진짜 다들 수면독에 당한 것인지, 아니면 이 끔찍한 놈이 칼부림을 펼쳐 혈사를 만들어 놓고 온 것인지는 몰라도 자신을 구해 줄 이가 하나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살려 주십쇼. 살려만 주신다면 개처럼 기겠습니다.”
“지금도 기고 있는데?”
“끼잉… 낑…….”
“그만해, 미친놈아…….”
아예 개처럼 앓는 모습에 당유혼도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찼다.
‘아니, 이 새낀 그래도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나?’
얼마나 투철한 생존 욕구인가?
물론 세상에 죽고 싶은 놈 없겠지만, 이렇게까지 처절한 놈은 또 흔치 않다.
“…어이, 이렇게까지 살고 싶냐?”
“아이구, 세상에 죽고 싶은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요?”
“내가 이러다 죽이면?”
“에이, 저를 이렇게까지 쉽게 가지고 노시는 분이 이렇게까지 수고하시지는 않았겠지요.”
‘이 새끼…….’
뭔가 여러 가지로 대단한 놈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백경도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습에, 당유혼은 다시금 다리를 꼬며 물었다.
“그렇게 살고 싶은 놈이 경계를 게을리했냐?”
“헤헤, 설마 대인 같은 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요.”
“지금은 이렇게 됐잖아.”
“그야 뭐… 이렇게 돼버렸네요…….”
또르륵―
다리에 털만 숭숭한 중년인의 눈에 물방울이 맺혔다.
아, 이렇게 난 죽는 것일까?
자신의 본진에 고이 모셔둔 삼십이 년산 고량주와 동정호에서 손꼽히는 기루, 삼화루의 앵앵이가 특히나 생각나는 순간이었…….
“꽥!”
“뭘 또 과거 회상이야?”
스쳐 가던 주마등이 끊겨 다시금 시점은 원래대로 돌아오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끙끙대는 선장이 우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살려만 주십쇼! 뭐든 하겠습니다!”
“참…….”
기껏 이 선장 놈을 어떻게 협박할지 생각해 온 게 무색할 지경이다.
“뭐든이라면, 우리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할 자신도 있다는 뜻인가?”
“그건 좀…….”
되겠냐고.
그렇게 묻는 눈빛에 당유혼이 다시금 손을 드니 선장은 서둘러 방어 태세를 취하며 말했다.
“자, 잠시! 생각해 보니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야 뭐… 교대 시간에 슬쩍 빠져나가면 되지 않을까요?”
수상 포위망을 수십 일 내내 지속할 수 있을 리도 없고, 결국 시간 되면 교대는 이루어지게 된다.
그동안 자연스레 빠져나가면 되지 않냐는 일차원적인 답변에,
‘…될 것도 같은데?’
당유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기본적인 검사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다 뒤져볼 것 같지도 않고…….’
포위망을 구성한 배들이 한둘도 아니고, 결국 검사는 한정될 수밖에 없으니 선장놈이 뇌물만 적당히 잘 찔러주면 충분히 빠져나갈 것도 같다.
“진짜냐? 의심 안 할까?”
“하겠죠. 하지만 저 아이들도 타는데 방법이 없겠습니까요?”
선장놈이 잠들어 있는 여인들을 가리켰다.
“네놈들이 납치한 이들인가?”
“예? 납치라뇨. 다른 수채는 몰라도 저희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정식으로 계약하고 배에 오른 아이들입죠.”
잠들어 있는 여인들은 전부 기녀들이고, 정당한 근무 계약까지 작성한 이들이라고.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보다시피 제 일신의 무력이 파천황적인 것도 아니고, 함부로 여인들을 납치했다가 걔들이 자신의 삶에 비관하여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제가 자는데 칼로 푹 찌르면…….”
그대로 훅 가버린다고.
여러 가지로 스스로 결백을 주장하는 선장의 모습에 당유혼조차 결국 고개를 저어버렸다.
‘세상에 진짜 별의별 새끼가 다 있네.’
그래도 선장실에서는 칼부림 한 번쯤은 벌일 줄 알았건만.
“그래, 배신하면 알지?”
“세 시진마다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죽는다, 뭐 이런 상황 아니겠습니까요?”
“잘 아네. 그럼 애들 깨워서 시작해 보자고.”
굳이 부연 설명 따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빠릿빠릿한 선장.
덕분에 기묘한 동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