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 *
해가 중천에 뜬 하늘.
덕분에 햇빛이 따갑게 비추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시간에 동정호에 포위망을 구축하던 선박들이 교대를 위해 오가기 시작했다.
“이름.”
“한상욱이올시다.”
“배의 이름은?”
“춘향.”
“…춘, 뭐?”
“크흠흠, 춘향이라고 했수다.”
관리 감독하던 수적 하나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새끼, 배의 이름을 지어도 그딴 거로 짓냐는 눈빛에 매향의 선장 한상욱은 더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왜 또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그러시오?”
“뭐?”
“나에게도 청춘은 있었소이다.”
어느새 허리춤의 술병을 꺼내든 그가 높이 그것을 들어 올렸다.
한 잔은 떠나간 너를 위하여.
한 잔은 너와 나의 영원했던 사랑을 위하여.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그만그만그만!”
즉석에서 시 낭송을 시작하는 한상욱의 모습에 관리인 수적은 발작을 일으켰다.
“당신이 배 이름을 집 지키는 개새끼 이름으로 짓든, 한때 청춘을 다 바쳤던 기생 이름으로 짓든 내 알 바요? 됐고 비키기나 하시오.”
“어이쿠야!”
감정이 다분히 섞인 손길로 그를 밀어내고, 수적은 휘하의 부하들을 불러 배 수색을 시작했다.
“어엇? 이걸 다 뒤져본다고?”
원래 검사하는 척만 대충대충 하고 보내주는 게 이 바닥의 상도가 아니던가?
“상도는 개뿔. X같으면 의심스럽다고 처넣는 게 상도지.”
거기까지 안 해준 것에 감사를 느끼라고, 사납게 일갈하는 말에 한상욱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샅샅이 뒤져라!”
그렇게 배에 오른 관리인은 수적들을 닦달하여 배 안을 이 잡듯 뒤지게 했다.
아니, 아예 직접 나서기까지 하더니 부하가 들고 있던 작살 하나를 빼 들었다.
“내 검사 경력만 십수 년이 넘지. 그동안 당신 같은 말 많은 놈치고 수상하지 않은 놈을 못 봤고.”
부리부리 빛나는 눈빛이 한상욱을 쏘아봤다.
움찔―
“그리고 대게 숨기는 게 있는 놈들이 하는 짓은 한결같았지.”
예리한 작살 끝이 한 곳에 쌓인 볏짚으로 향했다.
“그래, 바로 이곳!”
푸욱!!
내찔러진 작살―
그 끝에서 난 소리는,
쨍그랑!!
무언가 사기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관리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해명.”
“…헤헤, 요새 동방의 청자 사업이 짭짤하다 해서…….”
“미친 새끼, 이 시국에 밀수를 해?”
“큼… 동정호가 이 난리라 관리가 덜 삼엄해진 지금이 적기라…….”
원래 밀수는 국법으로 금지되는 사항이지만, 동정호에서 무림인끼리 대전이 벌어져 관리가 소홀해진 틈을 타 선박 안에 숨겨놓고 있다는 것.
그 혁신적인 발상에 관리인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오기 직전, 한상욱의 손이 재빨리 그의 가슴팍을 찔렀다.
파팟…!
그야말로 섬전과 같은 수법에 관리인은 가슴이 든든해지는 기분과 함께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이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수?”
“큼, 진작 이랬어야지.”
오고 가는 금전 속에 없던 인정도 싹 트는 게 이 바닥의 상도가 아닐까?
그들 사이의 분위기는 언제 험악했냐는 듯 훈훈해지고 관리인은 번쩍 손을 들며 소리쳤다.
“통과!”
* * *
“…이게 되네.”
백경은 포위망에서 빠져나오고도 그 사실이 못 믿겠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헤헤, 제 놈이 관리인 십수 년 짬을 먹어봤자지 않겠습니까요. 이 바닥 짬으로 따지면 저는 이미 이십 년이 넘습니다요.”
짬에서 나오는 그… 뭐시기가 다르달까?
볏짚은 구식이라고, 나무 바닥을 파내고 그곳에 숨으라던 선장의 말을 떠올리며 백경이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차고 있자, 당유혼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살아나왔으니 가죠.”
“자, 잠깐!”
이 기적의 탈출에 조금의 감흥도 없다는 듯 걸어 나가려는 그를 붙잡은 것은 선장, 한상욱.
“저, 저기 대인! 혹시 제 독은…….”
투철한 자기 보신에 당유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요.”
툭 하고 던져진 환단을 한상욱은 허겁지겁 받아들었다.
“삼 일분 해독제요.”
“삼 일분……?”
“그럼 내가 해독제 전량을 전부 줄 것 같았어요?”
“그럼…….”
당연한 소리를 묻네?
“사흘에 한 번씩. 사람을 시켜 그 자주 간다는 기루에 보내드리죠.”
“자, 잠깐… 그럼 못 보내주시게 되는 날이 오면…….”
“거기까지야 뭐…….”
묵묵히 가까워져 오는 해변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당유혼의 모습에 선장의 눈망울에 그렁그렁 물방울이 맺혀갔다.
“저희가 무사히 탈출하기만 기도하…….”
“멈춰라!!”
그런데 이제 막 뭍이 가까워지고 있다 싶은 순간 좌측에서 한 무리의 선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 선단에는 공통적으로 ‘랑(浪)’이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적힌 돛이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파팟―!
재빠르게 몸을 낮춘 둘이 시선을 마주쳤다.
“쟤들 뭐예요?”
“빌어먹을. 흑랑단. 셋째 놈 직속 선단일세. 지난번에 싸웠던 흑교살대를 기억하시는가?”
“그 시커먼 놈들이요?”
“그래. 하나하나가 그때 싸웠던 놈들의 부대주급 이상은 되는 놈들이지.”
그 말에 당유혼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큰일 났네요? 아저씨 약하잖아요.”
“무, 무슨 소린가?!”
“왜요. 그때 그 대주급으로 보이는 시커먼 놈 하나랑도 박빙 아니었어요?”
“아니, 그건……!!”
그땐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고 항변을 하려던 그였으나, 어느새 부쩍 가까워진 흑랑단 선단의 선두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흑랑단 삼 번대 대주 묵혈이다. 네놈의 소속과 신원을 밝혀라!!”
“헙?!”
그 말에 한상욱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당유혼이야 모르고 있었다지만, 장강 일대에서 흑랑단은 공포의 상징과 같으니, 그중에서도 일개 대대의 대주를 역임할 정도면 한상욱으로서는 쳐다도 못 볼 위치였다.
“사, 삼협채 소속 춘향호의 선주 하, 한상욱입니다!!”
“춘향호? 진심으로 병신같은 이름이군.”
한결같은 반응.
혐오감을 지우지 못하는 표정의 묵혈이 이내 배 전체를 훑으며 말했다.
“내가 알기로 교대 시간은 지금보다 못해도 이 각은 지나서일 텐데, 왜 벌써 나왔지?”
“그, 그건…….”
물론 교대 시간은 딱딱 정해져 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게 어디 딱딱 맞춰 돌아가겠는가?
오고 가는 뇌물 사이에 원래 일정이 조금 당겨지는 ‘편의’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고, 수적들에게 그 정도의 ‘편의’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 편의가 지금에도 작용한다는 것은 과연 삼 공자가 특명을 내린 시점에서 그들의 직속 부하들에게 어찌 비추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놈, 설마 이 시국에도 뇌물이나 바치고 꼼수를 부리려 한 것이냐?”
“허어업!! 아, 아닙니다!!”
“닥쳐라!!”
묵혈의 주변으로 노기에 찬 기세가 활활 타올랐다.
“그렇게 조기 퇴근을 하고 싶더냐? 암, 그렇다면 친히 일찍 보내주어야지. 당장 이승에서부터!!”
네놈 목을 따 버리고 조기로 이승을 하직시켜주겠다.
그 선언과 함께 선단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하, 인생.”
당유혼은 많은 걸 내려놓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어찌하겠나?”
“어쩌긴 어째요. 싸워야지.”
이놈의 인생.
언제 바람 잘 날 있던가.
“어이, 선장 아저씨.”
“저, 저 말입니까?”
“그럼 당신이지, 누구겠어.”
숨겨왔던 병장기를 하나둘 꺼내들었다.
“보아하니, 아저씨 인생도 우리랑 한배 탄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거야?”
“하하… 하…….”
좌우명, 가늘고 길게.
그게 가능했던 것은 소시민치고 눈치 하나는 기깔나게 챙겨왔던 덕인만큼 한상욱은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여기서 가만 있어 봐야 뒈진다고.
그렇다면,
“씻팔! 뭐 하냐, 이 자식들아! 내가 뒤지면 너희도 뒈지는 거여!”
얼어붙어 있는 휘하의 부하들을 향해 한상욱은 칼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먼저 맞을 바에는 우리가 먼저 친다! 포문을 열어라!!”
“선공필승!”
부하들은 생각보다 훈련이 잘됐는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포문을 열어젖혔다.
그에 당황한 것은 보무도 당당하게 다가오던 흑랑단.
“뭐, 뭐야?”
지금껏 그들의 감사를 맞이했던 수채의 선박들은 설령 채주가 타고 있던 선박이라 할지라도 덜덜 떨며 얌전히 목을 내밀어왔다.
한데, 고작해야 잡배와 같은 작은 선박에서 자신들을 공격해 온다고?
“선장님! 이거 진짜 맞습니까?”
“그럼 어떻게 할 건데! 그냥 다 목 내밀다 뒈질래?!”
“으아아!! 빌어먹을, 내 언젠가는 저 선장놈 따라가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흑랑단의 수적들은 그들을 얕보았다.
빌어먹을 수적 인생으로 이십 년 넘게 살아남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런 배에 이십 년이나 탄 부하와 선장 간에 생겨나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유대가 무엇인지.
그건 수십 년의 경험을 가진 당유혼도 모르는 일이었고, 흑랑단의 수적들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그 복잡하고 오묘한 우연이 겹쳐져 동정호에는 대낮의 수상전이 벌어졌다.
“쏴라!!”
콰콰콰쾅!!
슈슈슈슉!!
기민하게 열린 포문에서 포탄이 쏘아지고 화살 비가 날아들었다.
포탄이 선박의 측면을 부수며 때려 박히고, 화살 비가 선상 곳곳에 꽂혀 들었다.
물론, 평소 게을러빠진 수적들이 병장기를 잘 관리 했을 리 없기에 대다수는 별 볼 일 없는 공격이었다.
실제로도 춘향호보다 훨씬 큰 선박인 흑랑단 삼 번대의 배에는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다만, 묵혈의 자존심에는 크나큰 상처가 생겼으니,
“이 벌레 같은 놈들이… 나를 우습게 봐?!”
수적채의 채주나 부채주도 아니고, 한낱 수적 따위가 반기를 들자 묵혈의 두 눈에선 불꽃이 피어올랐다.
“배를 붙여라! 한 놈, 한 놈 직접 산 채로 사지를 자르고 물밑으로 떨어트려 고기밥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실천하려는 의도가 가득한 선언.
덕분에 반쯤 떠밀리다 싶던 춘향호 수적들의 두 눈에 생존 욕구가 활활 타올랐다.
“개싯팔!! 왜 우리한테 지랄이냐?!”
“우리가 큰 걸 바랐냐? 우린 중소 수적단으로 밥벌이나 하고 살고 싶었다고!!”
“너희가 멋대로 편입시켜 놓고, 멋대로 목을 잘라?!”
그들의 활질에도 진심이 담기기 시작했고, 가만 바라보던 당유혼은 떨떠름해져 물었다.
“요즘에는 저게 수적 평균이에요?”
“…글쎄, 내가 아는 수로채 애들은 저렇게 기개가 넘치는 편이 아니었는데…….”
무단 점거할 선박을 골라도 참 희한한 걸 골랐다는 걸 새삼스레 느낀 당유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챙겨온 박도를 점검했다.
“자네 진짜 이 판국에도 그걸 쓸 생각인가?”
“그럼 이 큼지막한 걸 장식으로 가져왔게요?”
추풍전기(麤風傳記) 갈무흔의 일대기는 이제 시작이라고?
쿠웅―!!
“넘어간다!!”
그들이 사담을 나누는 사이에도 두 선박은 부쩍 가까워졌고, 묵혈이 탄 기함이 충각을 때려 박으며 춘향호에 접촉했다.
임시 가교(架橋) 역할을 할 기다란 판자들이 놓아 졌고 흑랑대의 수적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지, 진짜 왔다!!”
“엄마!!”
“뭐 해, 이 병신들아!! 작살이라도 내밀어!!”
그나마 정신 차린 수적들이 그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기다란 작살들을 겨누었으나,
“지랄은 거기까지다!”
흑랑대의 수적들을 표횰한 경신법으로 그 너머를 헤쳐 나와 춘향호에 착지했다.
타타탓―
흉험한 안광이 폭사하고, 가장 선두에 내려선 수적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흐흐… 어떤 놈의 피 맛을 먼저 맛봐 줄… 꾸에엑!!”
하지만 그는 말을 채 뱉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져 배 밑으로 떨어졌으니,
“피 맛은 무슨, 동정호 물맛이나 먹어.”
기세 좋게 넘어가려다 배 아래로 떨어지는 동료 수적의 모습에 다른 수적들의 발걸음이 움찔 멈추어졌다.
“웬 놈이냐!”
자신이 직접 공들여 키운 수하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자 뒤이어 넘어오던 묵혈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에,
“나?”
복면인은 거대한 박도를 어깨 너머로 걸치며 답했다.
“추풍대주, 갈무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