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흑랑단 삼 번대.
그 이름은 동정호 일대에서는 분명 공포의 상징이라 할 만했다.
만가쟁패(萬家爭覇)라 불리는 이 시대에 장강 일대의 패권을 잡으며 급부상한 삼 공자와 흑랑대는 진정 장강의 지배자라 불릴 만했고, 그들이 그렇게 되기까지 걸어올 만한 행보는 실로 철혈(鐵血)의 행로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들의 명성이 무참히 짓밟힐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웬 이름도 못 들어 본 잡배놈이 자신이 칼을 빼 드는데 얌전히 목을 내놓지 않고 마주 반격을 개시할뿐더러, 그런 놈을 직접 징벌하기 위해 백병전으로 넘어갔더니 또 이상한 놈이 칼을 빼 들고 설쳐온다.
게다가 그 이름이…….
“크크크, 바짝 얼어붙은 걸 보니 본좌의 위명을 네놈도 익히 들은 모양이군.”
“개소리하지 마라!! 그놈이 뒈졌다는 소문이 이곳 장강까지 들려온 게 언제인데, 되지도 않는 사칭을 하느냐!!”
“사칭? 크큭… 좋다, 받아보아라!”
자칭 갈무흔, 복면인의 박도가 휘둘러졌다.
추풍도법(麤風刀法).
광풍난도(狂風亂刀).
거친 칼바람이 일더니, 예리한 도기가 묵혈이 선 일대를 난도질해 왔다.
카카카칵!!
도기에 베여 나간 나무판자가 부서져 나갔고, 한 박자 빨리 땅을 굴러 그 자리를 피한 묵혈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거친 바람과 같은 도법… 진정 네놈이 추풍대주란 말이더냐?”
“크크, 그렇다. 이 몸이 바로 지옥에서 기어올라 온 추풍대주 갈무흔……. 그리고!”
휘리릭―
멋들어지게 칼춤을 쳐 보인 복면인이 자신의 박도를 앞으로 내밀며 읊조렸다.
“이것이 바로, 지옥참마도(地獄斬馬刀)다.”
“지옥… 참마도?!”
모르겠다.
“이름만 들으면 나잇살 덜 처먹은 덜떨어진 새끼가 허세에 찌들어 지은 것만 같지만, 그 칼날에서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검붉은 혈기는 진정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망자가 음울한 포효를 내지르는 것만 같군…….”
“…그, 그렇지?”
어째 한 박자 늦게 돌아온 답이 이상하지만 묵혈은 결코 경시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바로 잡았다.
“쉬이 볼 수 없는 놈이구나, 갈무흔!”
“흐흐, 내 진가를 알아보는가?”
그 외침에 복면인은 오연히 말했다.
“나 역시 지옥에서 살아돌아 온 첫 상대로 너 같은 자를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기분이 좋군. 그래, 묵혈이라고 했나?”
어떤가.
“모처럼 만난 호적수다. 현재 우리의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호적수끼리 무를 겨룸은!”
예로부터 서로를 알아보고 인정하는 관계를 지음(知音)이라 하였다.
설혹 전장의 적으로 만났을지언정, 서로 교류하며 벗이 되어 우정을 쌓은 일은 종종 있는 것!
이곳에서 남자답게, 무인답게 검을 겨누지 않겠냐는 제의.
그에,
“무슨 개소리냐?”
묵혈은 왈칵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어디서 근본 없는 땅개 새끼가 물로 와서 허세를 부리는구나. 예로부터 마을을 어지럽히는 멧돼지는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여 몽둥이로 때려잡는 것이 전통의 가르침!”
그가 번쩍 손을 치켜들자, 그사이 하나둘 넘어왔던 수적들이 각자 병장기를 고쳐잡으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다 같이 조져 버려라!”
“우와아아아아!!”
“오와아아아아!!”
꽈악―
주먹을 움켜쥐자 그대로 흑랑단의 수적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꾸에엑?!”
단번에 복면 속 안색이 창백해진 당유혼은 호다닥 뒤로 물러나야 했다.
“뭔가 계획대로 잘 안된 것 같군?”
“이 근본 없는 수적 새끼들. 아주 낭만이 없어요, 낭만이!”
“…사기 치려다 걸린 자네가 할 말은 아닌 듯싶네만.”
결국 곁에선 백경은 한숨을 내쉬며 박도를 꺼내 들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한 바, 생각보다 뭍에 더 가까워진 것에 의의를 두기로 한 것이다.
그때,
“엇?! 배, 백경이다!!”
“백경이 저기 있다!!”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두 배에 달하는 듬직한 풍채.
그 특징적인 외모를 보고 백경을 알아본 흑랑단 수적 하나가 버럭 소리치자, 연이어 다른 수적들도 그 정체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호오, 이거… 내가 아주 대어를 잡았구나.”
묵혈 역시 씨익 미소를 지었다.
“둘로 나눈다! 일 조는 백경을 치고, 이 조는 갈무흔 저놈을 잡는다! 백경은 생포해야 하지만… 저놈은 그냥 죽여 버려라!”
나는 왜?
“사람 차별하네!”
“네놈은 살려둘 가치가 없으니까!”
이 조장으로 보이는 이가 버럭 소리치며 칼을 휘둘러왔다. 뿐만 아니라 뒤편의 다른 수적들까지 함께 칼을 휘둘러오니, 곧 네 개의 칼날이 부딪치며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이 새끼들… 보통이 아닌데?’
고작 수적놈들이라 치기에는 손발이 상당히 잘 맞았다.
오랜 기간 손을 맞춰온 듯했고, 거친 언행과 달리 칼질은 상당히 정교했다.
게다가,
‘뒤에 세 놈.’
뒤통수가 가려운 감각에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벗어나니,
“지금!”
푸화앗!
사각에서 접근하던 놈들이 흩뿌린 쇠그물이 그 자리에 떨어졌다.
“…운이 좋군.”
“미친놈들. 그딴 건 또 언제 챙긴 거냐?”
소수의 강자를 상대할 때 가장 효율이 좋은 무기 중 하나가 쇠그물이다.
일반 그물과 달리 어지간한 검기로도 자르기 힘든 쇠그물은 원래 다루기도 어렵지만, 저놈들은 그걸 자유자재로 뿌려대고 있었다.
그나마 한 가지 변수라면,
“으아아앗!!”
“사, 살려줘!!”
“이 자식들. 왜 안 죽어?”
“좀 뒈져라!!”
생각보다 춘향호의 수적들이 잘 버티고 있다는 점.
선장 한상욱부터 시작해서, 그들 선원들은 온갖 비명과 엄살을 질러대는 주제에 배의 구조물을 이용해 꾸역꾸역 응전하고 있었다.
‘인생, 진짜 예상대로 흘러가는 게 없구만.’
점점 손이 꼬여가는 걸 느끼면서도 당유혼의 시선은 전장 전체를 훑고 있었다.
‘저 아저씨는 당장 안 죽을 것 같긴 한데…….’
자신과 달리 자신의 주 무장을 써먹을 수 있는 백경은 크게 밀리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다만,
‘문제는 저놈들이군.’
애초에 묵혈이 처음 등장할 때도 그는 선단을 이끌고 있었다.
뒤쪽에 있던 후열의 수적들이 추가로 넘어오고 있었고, 그게 다 넘어오면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저것부터 막아야 하는데…….’
“이놈 갈무흔!!”
“어딜 보느냐!!”
빈틈을 보인다 치면 또 기가 막히게 칼날이 날아들었다.
‘끔찍하군.’
애초부터 승부를 결할 생각이 없는 놈들이 차륜전으로 한 칼씩 먹이고 뒤로 빠졌다가 다시금 달려들길 반복하니 채주 세 명 상대하는 게 더 쉬울 지경이었다.
‘할 수 없나.’
진짜 비장의 수법만큼은 꺼내지 않으려 했거늘.
우우웅…….
당유혼의 결심에 따라 애칭 ‘지옥참마도’가 조용히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한데 그 순간,
“큭!! 습격이다!!”
“후미에서 병력 발견!!”
갑자기 신명 나게 칼춤을 추던 흑랑단의 수적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야?’
안력을 돋우어 보니,
“원…군?”
일단의 병력이 선단을 몰고 와 흑랑단의 후미를 공격하는 게 아닌가?
“육자방!! 젠자아앙… 믿고 있었다고오오오!!”
옆에 있던 백경이 가장 먼저 그 정체를 알아보고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뭐? 육언 그놈이 나타났다고?”
“분명 도망쳤다는 보고가…….”
묵혈을 비롯한 수적들도 몹시나 당황하고 있었지만, 벌어진 현실은 주워 담을 수없는 물과 같았다.
그들이 믿건 말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선단은 연신 화살 비와 화포를 때려 박고 있었는데, 화력 계산 따위는 없는 그 모습이 당유혼이 백경을 구하러 선박으로 떨어져 내렸을 때와 유사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저 양반이, 육자방?’
이제는 그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에서 선두에 선 사내가 보였다.
수적이라기보다는 서생에 가까운 호리호리한 체구.
하지만 그 안색은 창백할 정도로 서늘하고, 이 혼란의 와중에도 조금의 미동도 없는 것이 제법 인상적이었다.
그는 크게 고함을 지르거나 하지 않았는데, 몇 번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휘하의 병력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조준 대상을 바꾸고 화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번에 집중된 화력은 바로 춘향호와 붙어 있던 묵혈의 기함이었다.
콰콰콰쾅!!
“아, 안 돼!! 내 기함이!!”
수적들에게 있어 기함이란 일반적인 무림인들이 오랜 시간 들고 다닌 애병(愛兵)과 같으니, 춘향호의 포격에는 끄떡없었다지만 백경채의 함대가 갈기는 대규모 포격에는 맥없이 침몰해 버렸다.
그렇게 드러난 빈틈,
“이놈! 묵혈!!”
피 냄새를 맡은 사어(鯊魚)와 같이, 백경은 쏜살같이 달려들어 박도를 내리찍었다.
“큭?!”
카앙―
기습적인 일격!
흑랑단 삼 번대의 대주 자리가 딱지치기 자리로 딴 건 아님을 증명하듯, 그걸 막아내는 데는 성공한 묵혈이었지만,
“뒈져, 새꺄!!”
선상 위에는 피 냄새를 쫓는 사냥개가 하나 더 있었으니,
“끄에엑!!”
자신에게 따라붙던 수적들이 백경채의 등장에 시선이 팔린 틈을 타 기습처럼 날아든 당유혼이 그의 옆구리를 갈겨버렸다.
첨벙―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묵혈이 동정호의 물속으로 떨어지고, 그 사이 부쩍 가까워진 백경채의 수적들이 가교를 만들어 춘향호로 떨어져 내렸다.
후두둑―
삽시간에 늘어난 인구 밀도.
그 속에서,
“치워라.”
산보 하듯 부채 하나 쥐고 살랑살랑 산책하듯 걸어 나온 육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니―
“쓸어버려!!”
“다 죽여!!”
전세는 보란 듯 역전되었다.
* * *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나 당유혼과 백경을 구해 낸 백경채의 수적들.
그들을 따라 곧장 줄행랑을 쳐 백경채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흰고래섬에 들어서니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반겨왔다.
“대장!!”
“역시 살아 있었군!”
“소식 듣고 대장일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고!!”
다들 하나같이 특색 있는 생김새였고, 백경 역시 그들을 알아보고 반갑게 소리쳤다.
“비목어! 흑사어!! 이 자식들, 안 뒈지고 잘도 살아 있었구나!!”
“대장도 안 뒈졌는데 내가 갈 리가 있겠어?!”
“말했잖아! 대장 묘비에 오줌을 갈기고 나서야 가겠다고!”
훈훈한 덕담이 오가는 걸 보아하니 평소 그들의 관계를 알 만했다.
따라 걷는 육언이라는 남자만이 그저 묵묵히 걷고 있었고, 당유혼은 그 안색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뭐야, 뒤에도 눈이 있어?
뒤편에서 따라 걷는 동안 돌아본 적도 없는데?
“당연한 추측일 뿐입니다. 저렇게 시끄러운 이들이 많은데 그들에게 관심 하나 주지 않고 있으시니, 남은 관심은 저를 향할 수밖에.”
‘이 녀석…….’
그 말에 당유혼의 입가가 기묘하게 비틀렸다.
천재구나.
세상에 아주 극소수만 존재한다는 부류.
하늘이 불공평하다는 걸 증명하는 듯, 살아 있는 불합리.
하나를 보면 열을 깨우치는 건 당연한 게 아니라 멍청한 것이라며, 아무것도 몰라도 백 이상을 깨우치는 것을 기본 출발선상에 놓고 보는 그런 이들.
턱―
어느샌가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는 육언을 보며 당유혼은 입술을 달싹였다.
“묻고 싶은 것이라…….”
그런 것이라면 분명 있지.
“당신이, 저 아저씨를 배신하고 튀었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