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육언.
거칠기 짝이 없는 무림에서도, 특히나 험하기로 소문난 수적의 무리에 속해 있으면서도, 무공이란 한 자락 익히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에 뒤따르는 각종 별호들은 그가 무공을 익혔는지 아닌지가 별달리 중요치 않게 했다.
신기묘산(神機妙算).
천기수사(天氣數士).
만통박자(萬通博者).
고작 서른도 안 된 이에게 붙기는 과분한 별호.
게다가 그가 무림에서 활동한 시기가 채 일 년이 안 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을 별호였다.
하나, 그가 이루어낸 이적에 가까운 업적을 본다면 누구나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열두 척의 배로 아흔 하고도 네 척의 적선을 격퇴하거나, 발각된 본진으로 쳐들어오던 적들을 역습, 기적적인 교환비로 그들을 몰살시켰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드넓은 장강의 지류를 무대로 신출귀몰한 기동전을 시행, 계속해서 적의 수를 깍아 왔다.
백경.
비목어.
흑사어.
독비어옹.
조그마한 백경채에 이름난 고수는 많지만 그런 백경채가 지금껏 존재해 올 수 있었던 연유를 세간에 묻자면 가장 앞서 언급되는 이름이 하나 있었으니,
육자방(陸子房).
온갖 불가능을 가능의 영역으로 뒤바꾼 불가사의의 천재 모사를 향한 당유혼의 발언은 모두의 표정을 딱딱히 굳게 만들었다.
무겁게 드리운 침묵의 휘장,
“배신이라…….”
그것을 젖혀낸 것은 그 무례한 질문을 받은 육언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약속을 이행했을 뿐이니까요.”
“약속?”
“예, 그렇습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육언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의 선조는 무능한 군주를 따르다 골병이 들어 돌아가신 분. 저는 그분을 보고 배웠기에 주군과 계약을 맺을 때 한 가지 조항을 두었습니다.”
“그게 뭐지?”
“불가능한 싸움에 생목숨을 걸지 않고, 단 한 수의 포석(布石)도 불가능한 상황이 온다면 돌을 던질 수 있는 약조였지요.”
일발역전을 위한 아주 조금의 틈도 없었기에, 백경채의 해체를 선택했다.
“해체라… 그럼 지금 나타난 이유는 뭐지? 나 하나 생겼다고 큰 변수는 아닌 것 같은데?”
“맞습니다. 공자께서 얼마나 강대한 무력을 지니고 있으신지는 모르지만, 전쟁이란 일개 필부의 용맹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무른 것이 아니지요.”
하나,
“그럼에도 공자와 주군께서 목숨으로 시선을 끌어주셨기에 최후의 한 수는 가능해졌습니다.”
“최후의 한 수? 그게 뭐지?”
언제는 주군을 버리고 후퇴한 주제, 지금은 돌아와 일발역전을 노릴 만한 그런 수법이 있냐고.
그렇게 묻는 당유혼의 물음에,
“그렇습니다.”
육언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긴 이를 듯하군요.”
동시에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이제 막 사선에서 돌아오신 분들과 논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말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휴식을 취하시지요.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명백한 축객령(逐客令).
일방적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는 그 모습에 당유혼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나온다는 거지?’
대충 알 만하다는 시선 교환이 오갔고, 당유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 * *
휴식을 취할 방을 배정받았다.
산속 한곳에 지어진 가옥 중 하나에는 이런저런 집기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제법 쉴 만한 공간이라 두 다리 뻗고 누운 채 한참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니,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백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들어왔으면 앉지, 뭘 그렇게 입구에만 서 있어요?”
덩치도 큰 아저씨가 들어갈지 말지 못 정해서 입구 근처에서 미적거리고 있어?
“…흠흠, 들어가도 되겠나?”
“이미 반쯤 들어왔잖아요. 대충 앉으세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적당한 자리에 냉큼 엉덩이를 붙이는 백경.
그러고도 계속해서 눈치를 살피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소협.”
“예.”
“그… 그러니까… 그… 우리 군사가 좀 말수가 적고… 과묵한 것이 있기도 하고… 그래서 의견 전달이 잘 안 될 때도 있긴 한데……. 그, 그러니…….”
이걸 어찌 말해야 하나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한 백경이 괜스레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을 때,
“육언이라는 그 양반을 너무 미워하지 말라구요?”
툭 하고 뱉은 말이 그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어엇?”
그걸 어떻게? 하는 표정.
‘참 뻔한 양반이야.’
“왜, 제가 아저씨를 배신한 것에 대해 대신 화내줄 것 같아요?”
“음… 아닌가?”
“애초에 아저씨 일인데 제가 왜 화를 내요? 전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그,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왠지 시무룩해진 백경의 입술이 삐쭉 내밀었다.
그때,
“뭐, 애초에 배신한 것 같지도 않지만.”
“응?”
“대충 그 양반 생각이 이해될 것도 같으니까.”
육언.
그는 애초에 자신이 백경을 져버릴 권한을 보장받았고, 그걸 행사했을 뿐이라고 얘기했지만…….
‘내가 볼 땐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거든.’
“됐고, 아저씨. 나 좀 돌아다녀도 돼요?”
“어… 그러겠나?”
자신이 오자마자 떠난다는 말이지만, 백경은 서운해하기는커녕 차라리 잘됐다는 듯 되물었다.
“오오, 우리 백경채를 구경하려고 그러는가? 안내가 필요하면 사람을 붙여줄 수 있네만?”
“아뇨, 그건 됐어요.”
전 혼자가 편하거든요.
‘내가 뭐 여기 관광온 것도 아니고 말이지.’
그렇게 말한 당유혼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백경이 들어온 곳으로 나가버렸다.
‘보자.’
이 흰고래섬이 어떤 곳인지는 대충 전해 들었다.
이곳의 우두머리인 백경이 자신에게 거처를 안내해 줬던 만큼 대략적인 구조도 알 수 있었다.
‘저쪽인가?’
목적지는 이 섬의 중심부에 높게 솟아 있는 산의 정상.
그곳을 향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누군가 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멈춰 기척을 숨긴 채 그곳으로 향하니,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수적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뭘?”
“이 전쟁. 이길 수 있을까?”
불안감이 담긴 물음.
그에 술병을 통째로 쥐고 홀짝이던 사내가 씨익 웃었다.
“크크, 뭐냐. 천하의 비목어가 쫄았냐?”
“뭐뭣?! 이 자식, 무슨 개소리냐?”
비목어라 불린 사내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흥. 그럼 그딴 걸 왜 물어? 네놈은 이길 싸움만 골라 하냐? 싸워야 하니까 싸우는 거다. 승패 같은 건 우리 같은 놈들이 신경 쓸 게 아니야.”
저기 저 안쪽에 있을 군사님께서 결정하시는 거지.
우리는 우리의 일만 하면 된다.
그 강직한 말에 비목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파― 하고, 폐부에서 나오는 숨결을 뱉으며 낄낄 웃었다.
“흑사어. 네놈이 옳은 말을 하는 경우도 있구나.”
“난 항상 옳은 말만 해.”
킁―
콧김을 내뿜는 사내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흑사어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유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대충 분위기는 알 만하군.’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백경의 휘하에 모인 백경채의 수적들은 대개 비슷한 기질을 지닌 듯했다.
‘그럼 전의(戰意)와 사기(戰意)가 꺾일 일은 없을 듯하고.’
전쟁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그래도 남아 있구나 싶어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흠칫―
몇 걸음 가던 중 갑자기 측면에서 쏘아지는 예리한 기운에 쭉쭉 나아가던 걸음걸이가 멈추고야 말았다.
“홀홀홀…….”
예기가 날아든 곳에서 함께 들려오는 웃음소리.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외딴 구석에 홀로 앉아 있는 노인이 보였다.
“안녕하시오, 젊은이.”
곰보가 지고, 주름이 잔뜩 낀 얼굴.
그리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없는 헐렁한 외팔.
‘…보통이 아니군.’
당유혼은 일견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 눈을 뜬 이후 보아왔던 이들 중… 단연코 최강이군.’
당유혼이 경계심을 숨기지 않고 바라보자, 노인 역시 씨익 웃으며 말했다.
“범상치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리 다시 보니 그 이상이군.”
어디까지 읽었을까?
전신을 훑는 눈빛은 자신의 안에 잠든 무언가를 직감적으로 느낀 듯하지만, 그렇다고 전부를 읽어낸 것 같지도 않았다.
“젊은이. 무얼 위해 여기까지 오셨나?”
“글쎄. 그러는 노야는 어찌하다 오셨습니까?”
“헐헐, 내가 먼저 물은 것 같네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자 늙은이의 눈가가 샐쭉하니 길어졌지만,
“이 늙은이가 먼저 답하지. 나는 빚이 있다네. 이곳의 채주에게 큰 빚을 져버렸지 뭔가? 그래서 그 채무를 이행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일세.”
“빚이라…….”
그게 뭔지는 알 수 없다.
사람마다 얽힌 사연이 어디 한두 개일까?
그래서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거 아닙니다. 저는, 거래를 위해 찾아온 것이지요.”
“거래?”
그 말에 늙은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먼. 그럼 이제 우린 동업자가 되는 것이구먼.”
“그렇게 되겠지요.”
“그래, 잘 부탁하네. 이 노인네는… 독비어옹(獨臂漁翁)이라 불러주면 된다네.”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한 늙은이는 더 이상 당유혼의 발걸음을 잡지 않았다.
그저 그곳에 앉아서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기듯 눈을 감아버릴 뿐이었다.
‘독비어옹.’
당유혼은 그 이름을 뇌리에 새겨 넣으며 발걸음을 옮겼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산의 정상.
그곳에 홀로 지어진 초옥(草屋)이 있었고,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셨습니까.”
끼이익―
그 문이 열리며 서생 차림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육언.
그는 당유혼이 이미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당유혼을 안내하여 산속에 지어진 어느 누각(樓閣)으로 향했다.
“앉으시지요.”
그곳에는 정갈한 다과상(茶菓床)이 차려져 있었는데, 뜨거운 찻물만 직접 우려내어 당유혼의 앞에 놓아주었다.
“드십시요.”
그때까지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상대방의 지시에 따라 응하던 당유혼은 찻잔을 들어 홀짝인 뒤에야 입을 떼었다.
“좋네.”
은은한 차향은 차를 내어오는 사람의 기술도 기술이지만, 차의 종 자체가 고급품이란 것을 드러내고 있다.
“어디서 구한 놈이지? 용정차(茶菓床)가 쉽게 구할 놈은 아닌데 말이야.”
온갖 약초와 독초를 섭렵한 당유혼이기에 익히 알고 있었다.
용정차는 본래 절강성에서도 저 끝자락에서나 나오는 놈이고, 이 정도 품질이면 개중에도 최상급 품목임을.
그 물음에 육언은 역시나 한 모금을 홀짝이며 덤덤히 답했다.
“털었습니다.”
“…어?”
“두유채였던가요? 어느 수채의 선단이 멍청하게 저희 앞을 지나가길래 습격해서 노획해 온 물품입니다.”
“…아.”
맞다. 이 녀석들, 수적이었지?
“…그래, 그게 너희였지.”
“그렇습니다. 그게 저희 수적이지요.”
덤덤하게 사실을 인정하는 육언이었고, 그렇기에 덤덤하지 않은 눈빛으로 물어왔다.
“그런 저희와 어떤 거래를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명문 중의 명문, 정파 중에서도 정파이신…….”
다른 누구도 아닌,
“사천당가의 단둘뿐인 직계, 당유혼 대협께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