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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가유혼-133화 (133/350)

133화

* * *

흑룡도(黑龍島).

그 이름처럼 섬 위에 지어진 거대한 흑성(黑城)에는 오늘도 마르지 않을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끄아아악!!”

비명을 내지른 이의 몰골은 참혹했다.

팔다리의 사지근맥이 잘려 땅바닥을 꿈틀꿈틀 기어야만 했고, 핏물로 범벅이 된 두 눈은 뜨지도 못해 달달 떨리는 입술만을 간신히 달싹이고 있었다.

“주, 주군… 제, 제발… 사… 살려…….”

“흐음… 살려달라라.”

누구나 인상을 찌푸릴 만한 처참한 모습이지만, 정작 그 명령을 내린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히려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했다.

“다 이긴 전투였다. 실패한다는 게 오히려 믿기지 않을 그런 작전이었고. 한데, 그것을 실패하고 돌아와서 살아남길 바라다니…….”

그것참.

“실로 신기한 일이 아닌가, 묵혈.”

흑랑단 삼 번대 대주 묵혈.

한때 흑룡왕의 직속 무력 부대에 소속되어 동정호의 공포로 군림하던 그가 지금은 한낱 고깃덩이가 되어 바닥을 기고 있었다.

“제, 제발… 하, 한 번 더 기회를…….”

끔찍한 고통과 공포 속에서 묵혈은 애달프게 빌고 또 빌었다.

하나,

“글쎄?”

그 간절한 기도에도 흑룡왕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 꼴로 네가 살아난들, 한 번 더 기회를 받아서 무얼 할 수 있겠나?”

덤덤한 목소리기에, 오히려 더욱 절절히 느껴지는 선언.

마지막 발악마저 짓밟힌 묵혈의 몸이 우뚝 굳었을 때 흑룡왕은 덤덤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네가 내게 바칠 수 있는 것은 이제 오직 하나뿐이다.”

팔다리의 힘줄이 다 잘려 바닥을 기어다닐 뿐인 묵혈이 바칠 수 있는 것.

그건 바로,

“공포(恐怖). 오늘 너의 참혹하고도 처참한 모습이, 나를 따르는 것들에게 퍼져나가 나를 실망시키고 배신하였을 때의 대가를 아로새기게 되겠지.”

“아… 아아…….”

그래, 겨우 그것뿐이다.

“치워라.”

흥이 식었다는 듯 차가운 말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묵혈을 끌고 나갔다.

이제 그는 이미 죽어 나가 시체의 산이 되어버린 그의 부하들과 같은 처지가 될 테지만, 흑룡왕의 머릿속에서 그런 그들에 대한 관심을 완연히 잊혀졌다.

그렇기에 흑룡왕은 핏물이 줄줄 이어진 흔적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다,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준비는?”

“만전입니다!”

공포에 질려 있던 부하 하나가 재빨리 답했다.

“백경, 그놈을 구하기 위해 백경채를 빠져나왔던 이들을 역추적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리무중에 쌓여 있던 그들의 본진을 찾아내었고, 이미 다섯 채의 병력과 예순여덟 척의 대형 선박이 기습을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흑룡왕께서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언제든 강습(強襲)을 개시할 것입니다!”

백경채는 백경을 구해내는 데 성공했지만, 흑룡왕과 그를 따르는 부하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들은 어딘가에 자신들의 본진을 숨겨놓고 신출귀몰한 기동 작전을 펼치는 백경채의 뿌리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동정호 전체에 광범위한 포위망을 구축해 놓았다.

덕분에 육언이 백경을 구출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빠져나오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고, 백경채의 본진 역시 역추적해 냈다.

“…예순여덟이라.”

결코 적은 수는 아니었다.

아니, 이 정도면 관아에서조차 동원하기 벅찬 수였다.

하나,

“아흔네 척이었나? 육언, 그자가 단 열두 척의 배로 우리의 선단을 깨부쉈던 수가.”

“그, 그건……!!”

부복하고 있던 이의 낯빛이 굳었다.

“그때와는 다릅니다! 당시의 아흔네 척은 소형선과 중형선을 포함한 숫자이고, 지금의 예순여덟은 가히 정예화된 선단이라 보셔도 무방합니다!”

양은 적어졌으나 질적으로는 훨씬 상향되었다고.

필사적인 피력 끝에 흑룡왕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잘하겠지. 아니… 잘해야겠지.”

그렇지 못하다면, 부복한 이 역시 조금 전 끌려 나간 묵혈과 같은 꼴이 될 테니까.

“무, 물론입니다!!”

겨우겨우 승낙을 받아낸 부복한 자는 고개를 들며 급히 말했다.

“그들 백경채의 세력은 흑룡왕의 세력에 비하자면 새 발의 피에도 못 미치는 것. 흑룡왕께선 결코 걱정하실……. 훕?!”

실수했다.

어떻게든 신임을 얻기 위해 이 말이든 저 말이든 다 덧붙이던 그는 뱉어선 안 될 말을 뱉었음을 깨닫고 서둘러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러나,

“…걱정?”

때는 이미 늦었으니, 지루한 눈빛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던 흑룡왕의 눈에 서서히 이채가 감돌기 시작하자 수하는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 그게 아니오라……!”

“걱정이라. 이 내가 걱정을 한다라.”

점점 더 번들거리기 시작하는 안광이 흉폭하게 빛났다.

쿠웅!!

“죄송합니다!!”

수하는 서둘러 바닥에 머리를 찍으며 납작 엎드렸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이마가 찢어져 피가 터져 나왔지만, 그 정도의 고통은 하등 중요한 게 아니었다.

“크흐흐…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속하! 흑랑대 이 번대 대주, 황호연이라고 합니다!!”

흑랑대 이 번대 대주.

결코 낮은 직급은 아니었으나, 작금의 흑룡왕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았다.

그만큼 흑룡왕의 세가 거대해졌다는 뜻이며, 그만큼 그 자리가 빈번히 갈아치워진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 네가 보기에 이 몸과 백경의 세(勢)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 것 같으냐?”

“비, 비교가 불가합니다!!”

“…그렇다.”

말 그대로 비교가 불가하다.

“고작해야 섬 하나에 머물러 있는 게 고작인 놈과 달리… 나는 이미 수십 개의 섬을 손에 넣고 열일곱 수채의 지배권을 쥐었으며, 수백에 달하는 함선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콰직!!

“끄으으읍!!”

흑룡왕의 발이 황호연의 머리를 짓밟았다.

찢긴 상처는 더더욱 벌어지며 바닥을 붉게 물들였으나, 황호연도 흑룡왕도 그런 것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꾸우욱… 꾸욱!!

발에 가해지는 힘은 더더욱 강해졌고, 황호연은 어금니가 부러져라 깨물며 버텼다.

“내가, 내가 놈을 두려워할 것 같으냐?!”

“아, 아닙니다!! 백경 그놈이 두려워할 것입니다!!”

머리가 새하얘지는 고통 속에서도 죽어라 소리쳤고,

“…후우.”

얼마나 지났을까?

긴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압박이 사그라들었고, 흑룡왕은 발걸음을 돌려 다시금 자신의 권좌에 앉았다.

“흐흐, 그래. 나는 그 멍청한 녀석 따위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

깨진 그릇의 사이로 무언가 새어 나오듯 흑룡왕의 전신이 잔 경련과 함께 부들부들 떨렸다.

“알겠느냐, 백경? 크흐흐… 네놈 따위,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 * *

“엣취!”

“뭐 하세요?”

몸도 튼튼한 양반이 왜 재채기나 하고 있는 건지.

차가운 눈빛이 쏟아지자 백경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항변했다.

“아니, 재채기 좀 할 수 있지… 너무한 것 아닌가?”

“무공은 익혔다가 국 끓여 먹을 거예요? 거참, 아저씨쯤 되는 무인이 감기에 걸린다는 건 또 처음 보네.”

“…킁, 그건 좀……. 누가 내 욕이라도 하나?”

“욕먹을 짓 많이 했나 보네요?”

“나, 나 정도면 떳떳한……!”

“떳떳한 뭐요?”

“…그, 글쎄?”

떳떳한 수적?

그러기에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으휴.”

“그 한심하다는 표정은 뭔가!!”

“예? 그럴 리가요?”

억울하네.

쳐다보는 것 가지고 뭐라 하는지.

“거, 아무리 수적채라지만 이 정도 자유의지도 없는지…….”

“…구시렁구시렁거리는 척하지만 큰 소리로 소리치는 행위는 멈춰주시게. 듣고 있는 수적들 마음이 아파지려 하니까.”

부하들의 한심한 시선이 한곳에 몰리는 걸 느끼며 백경은 두 손을 들었다.

그들의 대장이라는 양반과 그런 그를 구해 왔다는 수채의 은인 하나.

두 명이서 쓸데없는 헛소리만 찍찍해 대고 있을 때도, 수채의 인원들은 육언의 지시에 따라 다들 바삐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어언 준비가 다 된 것 같군요.”

그리고 그런 수적들 사이를 가로질러 육언이 등장했다.

“군사.”

“주군을 뵙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저능아, 혹은 그 이하의 가축 정도로 보는 육언이지만 일단 백경의 면전에서는 깍듯했다.

당유혼이 그게 참 궁금해 이유를 묻자니,

“극복인(克服人)이란 단순히 지성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기존 지식인들이 주장하던 사상과 견해를 부수고,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줄 안다면 그 이상을 뜻하지 않겠습니까?”

‘…라며,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만을 내뱉었지.’

사실, 그리 말해도 대충 알아들을 만한 이야기이기는 했기에 당유혼 역시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를 마주했다.

“당신까지 내려온 걸 보니 진짜 준비가 끝났나 보군.”

“그렇습니다, 공자.”

육언은 고개를 돌려 하나둘 자신의 할 일을 끝내고 모여드는 백경채의 인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전의가 깃들고 있었고, 활활 타오르는 안광에는 두려움이란 한 점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하나의 모습을 전부 눈에 담은 육언은 이내 백경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주군,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면 될 듯합니다.”

“끙… 결국 여기도 들켜버린 건가.”

이미 언질을 전해 들었기에 백경도 알고 있었다.

“미안해, 군사. 나 하나 구하느라, 군사가 직접 공들여 가꾼 이곳이 발각되어버렸네.”

백경채의 본진이며, 육언이 갖은 노력을 통해 숨겨 왔던 이곳, 흰고래섬이 삼 공자의 세력에 발각되어버렸다는 것을.

“아닙니다. 어차피 다 예상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육언은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다.

이미 모든 것은 다 예상한 범위 안이라고.

“그러니, 각자가 할 일을 다 하면 될 뿐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백경은 스스로를 자책하면서도 옷소매를 걷어붙이며 일어섰다.

고개를 돌리니 그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수적들이 잔뜩 도열해 있었고, 그 모습에 백경은 씨익 웃으며 소리쳤다.

“어이, 바보들아!!”

“예! 바보 대장!!”

“말씀하십시요!!”

“윽…….”

뭔가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기분에 인상을 팍― 찌푸렸지만 그도 잠시, 다시금 히쭉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외쳤다.

“이제 시간이다. 우리 똑똑한 군사의 말씀으로 이번 전투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이라 하신다!”

“오오오옷!!”

“드디어!!”

근 두 달 가까이 이어진 전쟁, 아니, 항쟁의 끝.

얼마 전까지 처참하게 밀리던 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들의 사기는 드높기 그지없었다.

“밥들 다들 든든히 먹었냐?!”

“물론입니다!!”

“두 공기나 비웠습니다!”

“저는 세 공기!”

“뭐? 그럼 나는 다섯 공기!!”

수적이라기에는 퍽 정겹고, 남이라기에는 또 끈끈한, 그런 외침들이 오가는 것을 들으며 백경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좋다. 그럼, 이제 밥값 하러 가자!!”

“우와아아아아아!!”

“오와아아아아!!”

백경채를 뒤흔드는 거대한 함성.

그것이 흰고래섬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우우웅―

물결을 가르며 몰려드는 수십 척의 선박.

펄럭이는 깃발에는 흑(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니,

“여기가 놈들의 본진인가?”

“그렇습니다, 대주.”

“…흥. 아주 쥐꼬리만 한 섬에 잘도 옹기종기 모여 있었군.”

흑랑단 일 번대 대주 장만량이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무기를 높이 들어 올렸다.

“자, 시작이다!!”

흑룡채의 수적들이 흰고래섬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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