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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가유혼-134화 (134/350)

134화

예순여덟 척의 함선.

수를 불리기 위해 작은 고기잡이배까지 끼워 넣은 것이 아닌, 순수 전투를 위한 대형 함선들로만 구성된 선단은 보고 있노라면 일개 섬이 움직이는 듯한 위압감을 선사했다.

어떤 적을 상대하더라도 패배를 상상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병력.

하나, 그 선두에 선 황호연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쯧, 날씨가…….’

자욱한 운무가 온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어젯밤까지만 하더라도 이 지경은 아니었는데, 새벽이 되자마자 물안개가 짙게 피어오른 것이다.

“대주님.”

그에 황호연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그의 뒤로 흑의를 입은 이가 나타나며 부복했다.

“상황은?”

“휘하의 선박들에게 신호가 떨어지면 언제든 백경채로 진입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습니다. 다만 날씨가 좋지 못하기에 선박끼리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 거리를 유지하도록 말해 놓았습니다.”

“잘했다.”

다름 아닌 육언이 지키고 있을 백경채다.

적이지만, 아니, 적이기에 그가 보여주었던 귀계(鬼計)는 최우선 경계 대상이었다.

“…사람으로서 가능한 행위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자욱한 운무 역시 놈의 계략일 수도 있다. 백경채로 들어가는 길목은 좁은 골목이니 그 틈에 화공을 사용할 수도 있고, 그 통로를 지나가느라 길게 대열해 있던 아군 병력을 향해 매복해 있던 적선들이 일제히 덮칠 수도 있다.”

병적인 수준에 가까운 경계지만, 부복한 흑의인도 그의 뒤에 비슷한 동작으로 엎드려 있던 흑랑단의 수적들도 어느 누구 하나 그 걱정이 과하다고 여기는 이는 없었다.

그만큼, 육언을 상대한 수적들치고 그에게 시달리지 않은 이가 없다는 뜻이었다.

당장, 황호연이 앉은 이 번대의 대주 자리만 해도 육언에 의해 네 번은 갈아치워진 자리니까.

그렇게 만전에 만전을 거듭한 뒤에서야 황호연은 진격 명령을 내렸다.

“진입한다.”

구구구구…….

대형 선단이 일제히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흰고래섬의 입구가 좁아 한 번에 통과할 수 있는 선박은 두 척에 불과했으니, 자연스레 그들 사이에 긴장은 짙어져 갔다.

특히, 협곡 사이를 지나갈 땐 언제 화살비가 날아들지 몰라 선상에 있는 이들로 하여금 방패까지 들어 올리게 했다.

‘무엇이 날아올까? 불화살?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안개가 짙게 낀 지금의 대기는 불이 붙기 쉽지 않다.

‘그럼 뭐지? 낙석을 굴리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고, 역시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방식? 아니면, 배 밑에서 구멍을 뚫는 방식인가?’

그동안 당하고 또 당했던 온갖 기상천외한 전략들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덕분에 시간도 빠르게 지나갔다.

“…뭐야.”

“도, 도착했습니다!”

도착했다.

놀라울 정도로 무탈하게.

뭐지?

“…점호, 점호를 시작해라!”

“옙!!”

혹시나 안개 속에서 침몰하거나 좌초된 배가 없는지, 지시를 받은 흑랑대원 몇몇이 빠르게 후미로 돌아가며 다른 선박들에 신호를 보냈다.

그 결과,

“예순여덟 척, 모두 무사히 진입해 성공했습니다!”

“하… 육언,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황호연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숨을 내쉬면서도 곧 번뜩이는 안광을 발했다.

“좋다. 그렇다면 모두 하선한다.”

“예? 일부는 남아 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상대는 천하의 육언이다. 우리를 찢어지게 만든 뒤 각개 격파를 노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건 실제로도 써먹은 방법이니까.

“과연… 알겠습니다.”

정말 만일에 만일의 경우까지 생각하며 수적들은 전부 뭍에 내려섰고, 선장격 되는 이들이 한데 모였다.

“이 섬은 순상지(楯狀地) 지형이오. 만약 적들의 본진이 있다면 섬을 한눈에 내려다보기 좋은 저곳에 있겠지.”

그들의 시선이 섬의 정상으로 향했다.

고독한 적막 속 외로이 뻗어 나온 봉우리가 하나.

“우리 전략은 간단하오. 여기 있는 이 압도적인 병력 차이. 다섯의 채주와 나를 포함한 흑랑단의 두 개 대대 이하 각 무력대가 단번에 밀고 올라가 적들의 본진을 타격하는 것이지.”

주먹을 움켜쥐며 말하는 모습에 다른 채주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다들 슥슥 눈치를 보다, 개중 한쪽 눈에 안대를 착용한 외눈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흠… 너무 단순한 작전 아니오?”

흑랑단의 대주는 다른 수채의 채주들과 동급의 격을 가졌다.

때문에 이렇게 대놓고 반문을 한다는 것은 다른 채주들도 비슷한 의견이란 뜻이었다.

“확실히 단순한 작전이긴 하지.”

황호연 역시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나,

“다만 문제는 상대가 육언이라는 것이지. 내 솔직히 말하리다. 여기 인원 중 놈의 지략을 따라갈 자신이 있는 이가 있소?”

“그건…….”

“으음…….”

잡아 죽이고 싶은 놈의 서열을 매기자면 일 순위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무시하지 못하는 존재가 육언이었다.

다들 난색을 표하자 황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어설프게 책략을 발휘해 봐야 녀석의 손바닥 위겠지. 하지만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을 깨부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과연, 충분한 힘 앞에는 어설픈 지략은 필요 없다는 뜻이군!”

“바로 그거요.”

어설프게 머리 굴리면서 병력을 나눴다가 이 계략 저 계략에 당해 줄 바에는 그냥 물량으로 쏟아붓겠다!

단순하지만 화끈하고 확실한 계획이었다.

“그럼 바로 가지.”

다들 동의하는 눈치를 보이자 황호연은 곧장 허리춤에 패용한 검병을 쥐며 말했다.

“벌써 말이오?”

“시간을 더 줘 봐야 저쪽만 유리할 뿐.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해 만전을 기해 주시오.”

“흠… 알겠소.”

“그럽시다.”

결정이 나자마자 그들은 곧장 움직였다.

그리고 일천의 병력이 섬의 내부로 진입하는 순간,

파파파팟!!

“기습이다!!”

머리 위쪽에서 화살비가 쏟아졌다.

“쯧!”

황호연이 혀를 참과 동시에 그의 검이 쾌속무비하게 휘둘러졌다.

파파팟!!

날아드는 화살을 검으로 쳐내는 신기!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대여섯 개를 거진 동시에 쳐낸 그가 주변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다가올 습격에 대비하라!”

여기 있는 일천 명은 수적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들.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 다음번에 뛰쳐들 기습!’

화살 세례가 끝나는 즉시 적들이 습격할 것은 확실했다.

분명, 이 강철비가 끝난다면…….

끝난다면…….

…뭐지?

“…큼, 황 대주?”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의 그를 향해 채주 하나가 헛기침을 했다.

“우리 이거… 무얼 하고 있는 중이오?”

안 온다.

아무것도 안 온다.

이쯤 되면 습격이 올 만한데 안 온다.

“…이럴 리가 없는데?”

황호연은 몹시 당황했다.

아니, 왜 안 와?!

“이, 이상하구려. 분명 와야 하는데…….”

“…왔으면 진작 왔어야 할 습격이오.”

그건 맞다.

지금 이렇게 되지도 않는 자세를 취하고 있은 지도 일각이 다 되어 가는데 뭐가 안 온다?

그건 즉,

‘…위협? 허세? 단지 우리의 경계심을 이용해 이렇게 만들었다고?’

“이런 젠장!!”

콰앙!!

내리 휘두른 검이 바닥에 구멍을 만들었다.

“진군, 다시 진군하겠소!”

그의 두 눈에서 불길이 활활 피어올랐고, 나머지 채주들은 괜히 찔끔해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다시 한 스무 걸음쯤 가는데,

파파파팟!!

“화살?! 습격이다!!”

시야를 검게 물들이며 날아드는 화살비가 또다시 폭우처럼 쏟아졌다.

‘이놈, 육언!’

그 화살비를 보며 황호연은 분노와 흥분이 동시에 치솟아 소리쳤다.

“격장지계(激將之計)!! 이건 격장지계가 분명하오, 지난번 우리에게 허무감을 주어 괜스레 흥분시킨 뒤 진짜 습격이 오는 거지!!”

“오오오! 과연!!”

“하핫, 육언! 네놈의 꾀주머니도 이제 바닥이 보이는구나! 어디 이런 허술한 수를!!”

나는 결코 이따위 수법에 당하지 않는다!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황호연이었지만,

“…음, 일단 당하지는 않았구려.”

“…….”

당하지는 않았다.

그래. 이번 습격에도 피해를 입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왜, 왜 안 오는 거지?!’

피해도 습격이 일어나야 생기는 것.

또다시 화살비만 쏟아질 뿐, 다음 차례의 습격은 이어지지 않은 것이다.

“젠장!! 또 속임수더냐!!”

한번 해보자는 것인가?

“진군한다!! 내 오늘 육언 그놈을 고기밥으로 만들어주고야 말겠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진 진군.

거기에,

파파팟!!

“또 화살비입니다!!”

“젠장, 또냐?!”

스무 걸음 걷자마자 쏟아지는 화살비.

결국 또 그들의 진군은 일각쯤 멈추어졌고,

“…이번에도 안 오는데요?”

“진군! 진군하라!!”

다시금 스무 걸음 나가니,

파파팟!!

“으아아아!! 육언!!”

스무 걸음 간격으로 날아오는 화살비.

철저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건지, 산의 정상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협곡처럼 난 가운데 길만을 쭉쭉 올라가야 했기에 수적들의 병력은 계속해서 멈춰 서야만 했다.

그게 반복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놈들… 절대 평범하게는 싸워줄 생각이 없구나!!’

그걸 뻔히 알면서도 매번 일각씩 지체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걸 안다고 해서 어찌할 방법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한 번이라도 경계를 푸는 순간 진짜 기습이 날아올지 모르니…….’

신경이 끊임없이 갉아먹혔지만, 그래도 황호연은 같은 선택지를 반복해야만 했다.

아니, 사실 그의 인내심만 갉아먹힐 뿐 현 상황이 꼭 나쁜 것도 아니었다.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그들의 물자도 무한할 수는 없다. 이런 식으로 화살의 소모를 강요하면 무조건 우리의 이득이다!’

결국 전투력의 손상이 생긴 것도 아니니 이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한 일념으로 산을 오른 그들이었고,

“도착…했다?”

그들은 마침내 순상지 지형의 맨 위 정상까지 도착했다.

하지만,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황 대주?!”

“왜… 대체, 왜… 어째서?!”

“이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냔 말이오!!”

주변의 채주들이 당황해 소리치는 말에도 황호연은 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면,

“어째서… 왜… 대체… 아무도 없냔 말이다!!”

비었다.

텅 비었다.

흰고래섬 안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었다.

“황 대주? 이를 어찌할 것이오?!”

“우리는 당신의 말만 믿고 이 고생을 하며 오른 것인데…….”

빗발치는 비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남 탓과 책임 전가에 황호연의 정신은 어질어질해지기 시작했다.

“이럴 리 없다……. 이럴 리 없어!! 정찰병!! 정찰병 어디 있나!!”

“여, 여기 있습니다!”

“하명하십시오!!”

몇몇 수적들이 그의 앞으로 나서 부복하자 황호연은 버럭 소리쳤다.

“샅샅이 뒤져라! 분명 어딘가 숨어 있을 것이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아예 싸움을 피하고자 숨어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 찾아내라.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찾아내라고.

그렇지 않는다면 네놈들의 목을 따버리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에 정찰병들은 겁에 질린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약 반 시진이 흘렀을 때, 흩어졌던 정찰병들이 다시금 돌아왔다.

“대주님!!”

“기관 장치를 발견했습니다!!”

“…기관 장치?”

가까운 곳으로 향했던 정찰병부터 돌아와 자신이 가져온 기관 장치의 흔적을 보고했다.

“저희가 공격당했던 위치에 있었습니다! 정해진 위치를 밟으면 기관 장치가 발동해 화살 세례를 퍼붓는 구조입니다!”

“엇? 저, 저 역시 마찬가지의 기관을 찾았습니다!”

“저 또한…….”

야 너두?

뒤쪽으로 갔던 정찰별들은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떴지만, 대충 말하고자 하는 바는 뻔했다.

그에 점점 황호연의 머리가 새하얗게 타들어 갈 때,

“대주님!! 큰일 났습니다!!”

진정한 결정타는 가장 마지막 정찰병에게서 들려왔으니,

“배들이!! 저희가 타고 온 배들이 침몰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절반 이상이 좌초되었습니다!!”

“…뭐?”

망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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