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135화 (135/350)

135화

유유히 강물을 가르고 나아가는 배의 선두에 서 있던 육언이 입을 열었다.

“삼십육계 병전계(幷戰計) 상옥추제(上屋抽梯). 굳이 우리 병력이 떨어지는데 저들 전부와 싸울 필요는 없지요.”

탁! 하고, 부채를 접은 그는 꼭 뒤에 숨어서 구린 일을 진행하는 흑막마냥 후후 웃었다.

“백경도의 물이 빠지려면 꼬박 사흘은 걸릴 테니, 그동안 아사하지 않으려면 식량을 다 불태우고 나온 백경도의 산천초목을 다 뜯어야 할 겁니다.”

자, 이게 무슨 소리냐.

육언은 지형 조사에 철저했고, 사흘마다 물이 빠져나가고, 다시 사흘마다 물이 들어온다는 흰고래섬, ‘백경도(白鯨島)’의 특성을 이용한 것이다.

“수공(水功)에 능한 이들로 하여금 물이 적을 때 바닥에 양쪽이 뾰족한 말뚝을 박게 하였지요.”

물이 가득 차 있을 때는 상관없었다.

말뚝보다 높게 떠 있는 함선들은 잘만 그 위를 지나갈 테니.

하지만 물이 빠지게 된다면?

‘설령 닻을 내려 고정시켜 놓은 함선일지라도 그 강력한 해류에 휩쓸려 입구 쪽으로 빨려들게 되고… 그때부터는 재앙이 시작되는 거지.’

원래 선박끼리는 서로 부딪치지 않게 일정 거리를 두고 운항하는 게 기본이다. 때문에 백경도에 처음 들어설 때만 해도 저들끼리 일정 거리를 유지했을 테지만, 썰물에 휘말려 나가면서 그런 거리 유지가 될 수가 있을까?

‘단 하나라도 말뚝에 밑바닥에 구멍이 뚫리거나 또는 서로 충돌하는 순간, 나머지는 연쇄로 쓸려나가는 거지.’

그럼 타고 나올 배가 없는 삼 공자의 병력은 그대로 사흘간 꼼짝없이 갇히는 셈이다.

게다가 기존 백경도에 있던 식량은 말끔히 태워버리고 나왔으니 그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발바닥에 불나게 뛰어다녀야 할 것이다.

‘그전에 우리는 다른 통로로 미리 빠져나오고.’

백경도를 백경채의 본거지로 삼고 지낸 게 한두 달도 아닌 만큼, 섬의 뒷면에는 절벽에 밧줄을 매달고 미리 작은 배를 준비시켜 빠져나갈 통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그곳으로 빠져나왔고, 이렇게 감옥이 되어버린 백경도를 유유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군사 나으리.”

“예.”

“지금은 운이 좋아 썰물 시기 바로 전날에 적이 왔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썰물 중에 적이 쳐들어왔으면 어쩌려고 했지?”

이 계획은 한 번 걸리기만 하면 일천에 달하는 적들을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백경도에 가둬놓을 수 있지만, 시기가 안 맞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그에 묻자,

“후후, 그럼 다른 방법을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

초승달처럼 그려낸 웃음에 당유혼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이 책략은 자신이 보기에도 신산귀계라 불릴 만한 책략이었지만, 육언이라는 책사에게 있어서는 그저 수많은 군략 중 하나일 뿐이란 것을.

‘시기가 맞아서 이런 책략을 택했을 뿐, 다른 시기였다면 또 다른 책략을 사용했겠구나.’

천재.

장강에서 악명을 떨치던 수많은 수적들조차 경계하게 만든다는 불세출의 천재 군사란 이 정도쯤 되는 사내에게만 붙는 호칭이었다.

“…뭐. 그렇다면야.”

그 정도의 남자에게 이 정도의 경우의 수쯤이야 당연한 것이구나, 생각하며 백경도가 있을 방향을 바라보았다.

실로 대단한 군략이지만, 그 대가로 백경채라는, 자신들을 일 년 동안 숨겨주었던 천혜의 요새를 버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얻은 단 한 번의 기회.

“나머지들 준비는 다 잘 되시려나?”

“당연한 것을 묻는군요.”

군사, 육언은 씨익 웃으며 턱 언저리에 부채의 끝을 가져다 대었다.

“만전(萬全). 제가 있는 군(軍)이 결코 허술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를 위시하여 도열해 있는 일백여 명의 수적들이 눈을 빛냈다.

개중, 가장 선두에 있던 백경이 큼지막한 자신의 두 주먹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쳤다.

“우리는 최고의 상태일세, 소협. 오히려 묻고 싶은 건 날세.”

자네의 상태는 어떻냐고.

그에,

“큭.”

당유혼은 비릿하게 웃었다.

‘뭘 그딴 걸 물어?’

묻는 게 어리석을 정도의 우문(愚問).

“그야, 당연히 최선이죠.”

“그래? 그럼 어서 보여주시게. 자네가 보였던 그 이적을.”

“흐흐, 지켜보기만 하시죠.”

아주 눈알 빠질 테니까.

빙글―

다시금 그들을 태운 기함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돌아본 당유혼의 두 눈에 지평선 끝에서도 그 윤곽이 보일 정도의 거대한 검은 성채가 비추어졌다.

흑룡성(黑龍城).

삼 공자 흑룡왕이 자신의 영토인 흑룡성의 주변에 빙 둘러쌓은 권력과 야욕의 상징.

그들의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전방에 대규모 선단 출현!!”

흑룡성의 망루(望樓)에 있던 보초 수적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땅땅땅―

격한 타종 소리와 함께 즉각 전 병력이 소집되었고, 그 소식은 흑룡왕에게도 전해졌다.

“기습? 기습이라고?!”

그의 두 눈이 부릅 뜨이며 핏발이 섰다.

“크, 크하하하… 크하하하하하하핫!!”

쩌렁쩌렁 터져 나오는 광소(狂笑)와 함께 거대한 내기가 그의 전용 공간인 흑룡전(黑龍殿)에 요동쳤다.

“백경 형님. 나를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셨구려!!”

압도적인 병력 차를 보유한 게 자신.

그런데 그런 자신들을 향해 정면 승부를 걸어오다니.

미친 듯 웃음을 터트리던 그였지만, 잠시 후 그의 표정이 딱딱히 굳더니 모든 힘의 격랑이 뚝 멈추었다.

“단주.”

“말씀하십시오.”

그의 뒤편에 시립하고 있던 흑의인이 고개를 숙였다.

흑랑단주(黑浪團主).

그의 직속 부대임에도 심심하면 갈아치워지는 흑랑단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자.

달리 말해, 흑룡왕이 유일하게 신임하고 있는 이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황호연은?”

“당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무려 일천의 병력을 끌고 갔음에도 정작 백경채의 것들이 이리 쳐들어오고 있다면 그 결과야 뻔한 이야기였다.

하나, 그럼에도 흑룡왕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래, 쉽게 갈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일천의 병력으로 쓸어버릴 수 있었다면, 지난 일 년간 이렇게 지지부진한 전선이 이어지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최소 그들은 본거지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보고된 병력은 지금껏 백경채가 전선에 내보였던 병력 중 단연코 가장 많은 숫자입니다. 그 말은 백경채 역시 이 전투에 사활을 걸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겠지.”

수많은 악전고투를 거쳐 이 자리에 선 흑룡왕과 그의 수하 흑랑단주.

원래 그들보다 세력이 강대하던 일 공자와 사 공자까지 전부 거꾸러트리고 이 자리에 선만큼, 그들 역시 결코 멍청하지는 않았다.

“쥐 새끼를 마침내 굴에서 빼내는 데 성공했으니, 남은 것은 사냥뿐이군.”

“궁지에 물린 쥐는 고양이를 물기도 합니다.”

무려 흑룡왕에게 올리는 충언으로는 위험할 수 있을 정도의 발언이었지만 흑룡왕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한낱 고양이었나?”

“용이지요.”

용, 그것도 흑룡(黑龍)이 바로 자신들이었다.

“단주. 그대가 직접 가도록.”

“존명(尊命).”

부복과 함께 흑룡단주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전면전이라…….”

그 모습을 바라보던 흑룡왕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기대가 되는구려, 형님.”

드디어 이 길고 길었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 다가왔다.

* * *

흑룡채의 반응은 빨랐다.

비록 그의 휘하에 들어온 수채의 전 병력이 흑룡채에 몰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간 백경채가 치고 빠지기 전략으로 흑룡왕에게 복종을 맹세한 다른 수채들의 본진을 털어먹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일부 병력은 항상 다른 수채들을 지키기 위해 빠져 있으니까.

그럼에도 충성을 맹세하며 바쳤던 병력들이 상당수 흑룡채에 머물러 있었고, 뿐만 아닌 흑룡채 고유의 병력들까지 상시 대기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대규모 선단의 출현 소식에 반응해 발 빠르게 출격했다.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있는 것은 흑랑단주.

그가 묵묵히 다가오는 백경채의 선단을 바라보고 있자, 뒤편에 있던 수채의 채주들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거참, 백경채 그 쥐새끼 같은 놈들이 웬일로 다 빠져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정도면 진짜 있는 배 없는 배 다 끌어모은 것 같군요.”

“백경 그놈이, 아니, 육언 그놈이 아주 제대로 작정을 한 듯 보입니다.”

백경채의 채주는 백경이지만, 모든 군략은 육언에게서 나온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채주들인 만큼 그의 이름을 언급하며 단단히 벼루었다.

“뭐, 그래 봤자이지만 말입니다. 흐흐.”

“그렇습니다, 단주께서 함께하는 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렇게 경계를 표하는 채주들이지만, 이내 흑랑단주를 바라보며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흑랑단의 일개 대대를 이끄는 이들은 채주와 동급의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단주라면?

‘당연, 그 이상이지.’

‘진정한 흑룡채의 실세가 바로 이 사람이다!’

출세를 위한 동아줄이랄까?

그들이 보기에 장강십팔채의 일통은 어차피 뻔한 일이었고, 평소 광증과 더불어 폭급한 면모를 종종 보이는 흑룡왕 같은 정신병자보다는 흑룡단주가 훨씬 잡기 쉬운 동아줄이었다.

그에 손을 싹싹 비비는 채주들이지만,

“이상하군.”

앞쪽만 묵묵히 바라보던 흑룡단주는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뭐가 말입니까?”

“저 배.”

그의 손가락 끝이 마주 다가오는 백경채의 선단을 가리켰다.

아직까지는 거리가 있기에 그들의 눈에도 흐릿흐릿하게 보일 정도지만, 고절한 무공을 지닌 그는 안력을 발휘해 선단의 밑부분까지 살필 수 있었다.

“배가 너무 위로 떠 있는 것 같은데?”

많은 인원을 태운 전투선은 필시 그 무게에 따라 일부 밑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로 가라앉는지야 사람이 알기 힘들다지만, 흑룡단주 정도로 오랜 수전 경험을 갖춘다면 직감적으로 이상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에 문득 의혹을 느끼던 흑룡단주였고, 고개를 돌렸을 때 몰려있는 수적채의 채주들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당신들. 지휘는 어찌하고 전부 나와 같은 기함에 타고 있지?”

“예? 지휘 정도야 뭐…….”

“부채주 녀석에게 맡겨놨습니다만…….”

“저도 그렇습니다.”

뭐가 문제냐는 되물음.

흑룡단주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런 어리석은!!”

그가 배의 측면으로 돌아가며 뒤를 돌아보니 선단들이 나름 진형을 갖추고 있음에도 앞다투어 앞으로 향하려 하는 게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단주!”

“무슨 일입니까요?”

이후, 자신을 쫓아 뒤따라오는 채주들.

그들의 눈에 묻어 있는 짙은 탐욕이 보인다.

‘아…….’

이 돼지들은 이 전투에 무조건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건 당연한 말이었다. 자신조차 승리를 직감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문제는 그걸 위해 당연히 지휘해야 할 배에서 멀어진 데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앞으로 치고 나가 전공을 세울 수 있을지에 전념해 다들 앞다투어 달리고 있다는 것.

그사이에 백경채의 선단은 부쩍 가까워지고 있었으니,

“산개! 산개하시오!!”

그는 황급히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채주들에게도 같은 요구를 했다.

“예, 옙?”

“왜 갑자기…….”

‘이 돼지 같은 놈들이!’

그래도 여기까지 살아남았다면 제법 머리 돌아가는 놈들일 텐데, 욕망에 물든 걸 보면 뇌도 고장난 모양.

“당장 화살 공격을 시행하고, 배를 산개해서…….”

어떻게든 명령을 내리려는 그 순간,

“단주님!! 저걸 보십시오!!”

그의 부하 하나가 달려와 소리쳤다.

“무슨 일… 아니, 됐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그는 보고를 듣기보단 즉시 배의 선두로 다시금 뛰어갔다.

그리고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어느새 백경채의 선단에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하는 불꽃을.

그럼에도 자신들을 향해 달리는 속도를 결코 멈추지 않는, 아니, 오히려 가속하는 선단을.

“육언… 육언, 이 노오오오옴!!”

어느새 부쩍 가까워진 불타는 선단.

그것은 마치 수상을 달리는 화탄(火彈)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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