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던가?”
파하―
당유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입이 열리고 한숨이 푹 쉬어 나왔다.
“온 세상을 속일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하필 저기서 저놈을 만나네?
“꾸짖을 갈(喝)!!”
어쩌면 만인을 속이고, 추풍전기라는 위대한 역사를 남길 수 있었던 일대기를 깨어버린 사내가 사납게 소리쳤다.
“이장폐천(以掌蔽天)! 어찌 손바닥을 들어 하늘을 가리려 드느냐!!”
“뭐, 뭣?”
“네 놈의 그 알량한 수작! 여기서 바닥을 드러냈도다!!”
이어 창극을 겨눈 폭풍창 이학도가 날카롭게 비판한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더러운 협잡꾼!”
“으윽?!”
“그 복면 안에 숨긴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네놈은 역겨운 사기질은 여기까지다!!”
파들파들…
도둑질하다 걸린 좀도둑마냥 당유혼은 몸을 떨다 고개를 푹 숙였다.
‘…대체 뭐 하는 건가, 자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백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지하게 미친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광증이 돋았을 줄은…….
그때,
우뚝―
파들파들 떨던 당유혼의 몸이 멈칫하더니 그의 고개가 다시금 들렸다.
“…그렇군.”
서서히 주억거리는 고갯짓.
“훗, 네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냐?”
이학도가 조소를 담아 묻자,
“아니? 네 말에서 내 잘못을 깨달았을 뿐이다.”
“…뭐?”
“이장폐천(以掌蔽天)… 과연, 나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했을 뿐. 그게 나의 패착이었다.”
그렇다면.
“지록위마(指鹿爲馬)! 나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겠다!”
“그, 그게 무슨 개소리냐?!”
“내가 말이라고 하면 말이 될 것이란 소리다!!”
추풍도법(麤風刀法).
쾌도난마(快刀亂麻).
기습적인 도격이 이학도를 몰아쳐 갔다.
워낙 갑작스레 펼쳐진 습격이었기에 가까스로 막아낸 이학도가 학을 떼며 소리쳤다.
“이 한심한 놈! 논리가 안 되니, 더러운 폭ㄹ…….”
“꾸짖을 갈(喝)!!”
쩌렁쩌렁―
내공을 담은 사자후로 이학도의 말을 자른 당유혼이 소리쳤다.
“네놈만 죽이면 나는 진짜 추풍대주가 된다!”
“뭐, 뭐?!”
“추풍전기를 위한 희생양이 되어라!!”
위대한 협객의 서사시에 지르밟혀 거름이 되는 사파 찌끄래기처럼.
“차디찬 칼날 위에 머무르는 고혼이 되어라!”
“그게 무슨 개같……!”
말도 안 되는 개논리에 반발하려던 이학도지만, 도저히 그럴 틈이 나지 않았다.
카카카캉!!
미친 듯 쏟아지는 도격은 도저히 잡담이나 나눌 여유를 주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뭐, 뭐야 이건…….’
점점 빨라지는 도격은 단순히 거칠 뿐 아니라 현묘한 묘리를 담기까지 시작했다.
‘이건… 분명… 아……!’
그리고 몇 합을 더 나누었을 때 불현듯 깨달음에 이학도는 있는 힘껏 내공을 담아 창을 크게 휘둘렀다.
부우웅―
“이크!”
그 여파로 당유혼이 뒤로 밀려났을 때 이학도를 사력을 담아 소리쳤다.
“이 사기꾼아! 이건 추풍도법이 아니잖아!!”
“엉?”
“내가 이걸 모를 줄 아느냐! 이건 하북팽가의 도법이지 않느냐!!”
같은 도 쓴다고 모를 줄 알았냐?
“…아, 맞다.”
눈앞의 놈이 어디 어설픈 놈도 아니고, 기억 속에 있는 좋은 도법은 다 끄집어 쓰다 보니 도의 명가인 하북팽가의 도법이 발현된 모양이다.
“그렇군! 이제야 알겠다! 갈무흔 그놈은 내게 반수 차이로 밀려나긴 했으나 결코 만만한 놈은 아니었지. 어찌 죽은 놈의 소문이 퍼져 나왔나 했더니… 고명하신 팽가에서 하잘한 사파놈으로 분장해 귀신 놀음을 했구나!!”
“…….”
할 말이 없다.
저걸 저렇게 해석하네?
그렇다면,
“…아니다.”
“뭐?”
“지랄은 거기까지다, 이학도!”
당유혼은 손가락을 들어 상대를 척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세상에 밝히지 않았지만, 나 갈무흔은 하북팽가의 사생아 출신이다!!”
“뭐, 뭐? 그게 무슨 개소리냐! 갈무흔은 북방 이민족 출신…….”
“이노오오옴!! 내 과거를 알았으니 죽어줘야겠다!!”
파파팟!!
다시금 당유혼의 도격이 작렬했고, 이학도는 더 이상은 입을 열 여유가 없어졌다.
그리고,
‘…나는 모르겠다.’
그들의 대화에 전투가 잠깐 소강상태에 이르렀고, 그쪽 방향을 보고 있던 백경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재빨리 돌렸다.
그를 상대하던 채주들이 큼큼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 공자. 당신이 별종인 건 알았지만…….”
“사귀는 인간관계는 더 특이하시군…….”
“…입들 닫아주시겠나?”
차라리 칼질로 생사결을 하는 게 낫지, 더 이상 저 주제에 끼고 싶지는 않았다.
“덤벼라. 낭만 없는 것들아.”
애써 귀를 닫고 눈을 감으며 자신의 적들만을 응시했다.
물씬 피어오르는 투기에 채주들은 다시금 긴장을 굳히며 마주 기세를 끌어올렸다.
“와라!!”
시작은 백경이 먼저.
백경광란(白鯨狂瀾).
함선전복(艦船顚覆).
그의 박도가 휘둘러지며 넘실거리는 도기가 퍼부어졌다.
함선들도 전복시켜버리는 거대한 파도와 같이 쏟아지는 도기 세례에 채주들은 바짝 긴장하며 자신들의 병장기를 휘둘렀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
‘타고난 신력이 괴물과 같다더니…….’
백경에 대한 위명은 질리도록 들었다.
실제로도 그가 한창 활동할 때 보였던 무력은 그야말로 천하장사의 그것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덕분에 약점도 뻔히 알고 있지.’
백경을 상대하는 이는 총 네 명.
개중 두 명이 정면에서 날아드는 도기를 막아냈고, 다른 두 명은 양쪽으로 갈라지며 백경을 측면에서 노렸다.
‘이런!’
거대한 힘을 끌어다 쓰기에 동작도 클 수밖에 없고, 한 차례 공격 뒤에는 이렇게 빈틈이 생긴다.
사실, 틈이라 해봐야 찰나에 불과하지만, 동수의 고수들에게는 너무나 거대한 공백.
각각 좌와 우측으로 파고든 유월도와 영평이 자신들의 무기를 휘둘렀다.
“죽어라!!”
“뒈져라!!”
날카롭게 뻗어 나오는 도기가 그의 목과 옆구리를 녹인다.
그 상황에서,
“크아아압!!”
백경은 도를 회수해 풍차처럼 자신의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상승무공의 무리(武理)라고는 없는 단순무식한 공격이지만,
‘이런 미친……!’
‘무슨……?!’
그 단순한 공격에도 말도 안 되는 신력이 실리니 채주들은 뻗던 병장기를 회수하며 뒤로 물러섰다!
“…젠장, 또 이 수법인가?”
“미치겠군.”
죽자 사자 달려들면 백경에게 위중한 상처를 입힐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관성에 의해 휘둘러지는 저 박도에 내 머리가 터져나가겠지.’
여기 있는 이들이 흑룡왕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줄 수 있는 충실한 부하인 흑랑단원이면 모를까, 다들 각자의 이득을 탐내는 다른 수채의 채주들인 이상 어떤 누구도 그런 희생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하나 있기는 했는데…….’
유일한 하나이자, 흑룡왕이 숨겨두고 있던 암살대 흑월단(黑月團)의 일 대주는 저기서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며 도를 휘두르고 있는 추풍대주(추정)에게 진작 옆구리가 박살 나 시체가 되어버렸다.
“으라라라!! 들어와라!!”
그들이 그 생각을 할 때도 백경은 거침없이 도를 휘둘러 갔다.
어차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공격일변도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내린 판단!
“젠장!! 뭘 좀 해봐라, 유월도!!”
“그럼 네가 하든가, 영풍!!”
다들 생각하는 게 거기서 거기라 합격으로 막아내는 것까진 몰라도, 결정적인 순간 희생이 필요한 일격은 서로에게 떠맡긴다.
이것이 바로 수적의 단결력!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백경이었기에 그 이해관계를 파고들며 맹격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
오싹한 감각이 뒷목을 짜르르 울리게 만들었고, 백경은 반사적으로 도를 휘둘렀다.
쩌엉―!!
무언가 날아와 그의 도와 부딪쳤고, 거기에 실린 어마어마한 힘에 백경의 거대한 육체가 휘청거리다 뒤로 세 걸음을 물러나야 했다.
이후 튕겨 나간 무언가가 빙글빙글 돌다 땅에 푹― 하고 박혔고, 그 정체를 확인한 백경은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핏물의 맛을 느끼며 낮게 읊조렸다.
“…흑룡쌍부. 이제야 나오는구나, 망할 사제 놈아.”
“사제라…….”
그에 대한 답은 멀리서 들려왔다.
하나, 분명 멀리서 들렸음에도 그 또렷함은 바로 옆에서 말한 것과 같았으니,
저 먼 곳의 천막이 젖혀지며 한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흐, 아직도… 나를 그렇게 불러주시는 거요, 사형?”
히죽, 웃음과 함께 나타난 사내.
그는 바로,
“흑룡왕을 뵙습니다!!”
“흑룡왕을 뵙습니다!!”
“흑룔왕을 뵙습니다!!”
산개하여 전투를 치르던 이들 중, 흑의를 입은 이들이 곧장 전투를 멈추고 그 예를 표하게 만드는 이.
이곳 흑룡도의 주인이자, 흑룡채의 주인이며, 전대 장강수로 채주인 장강용왕의 셋째 제자인 흑룡왕의 등장이었다.
‘…이 녀석, 더 강해졌군.’
그의 등장에 백경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전에 먼발치에서 봤을 때보다 더 강해졌다.
“네 녀석, 뭐 좋은 영약이라도 처먹었냐?”
“크흐흐… 오랜만에 봤는데도 무슨 헛소리요, 사형.”
“안 그러면 네 강함이 설명이 안 되는데?”
“설명이 안 된다니.”
천막을 걷으며 스스로의 거처에서 나온 흑룡왕은 오연히 자신의 사형인 백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주 간단히 설명이 되지. 나의 재능이, 나의 무공이, 나의 강함이.”
그 전부가 다.
“사형보다 비교도 안 되게, 강력하다고.”
아주 단순한 이유.
단지 그뿐이라 말하는 흑룡왕이었고, 그 모습을 보며 백경은 쓰게 웃었다.
“사춘기가 아직 안 지나갔던 거냐? 그런 쪽팔리는 대사를 잘도 내뱉는구나.”
“흐흐, 뭐… 애써 부정하고 싶으면 그리 부정하시오. 다만.”
흑룡왕은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푸확―!
땅에 박혀 있던 그의 애병, 흑룡쌍부가 뽑혀 나오더니 흑룡왕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뭐?’
수십 장 거리를 격하고 벌어지는 허공섭물!
백경의 표정이 아연해질 때,
“이 몸이 등장했는데, 아직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들의 모습은 실로 건방지기 짝이 없군.”
흑룡왕은 돌아온 도끼와 더불어, 원래 자신이 들고 있던 또 다른 한 쌍의 도끼를 동시에 집어 던졌으니―
‘이크!’
그게 자신에게 날아올 줄 알고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하던 백경은 다음 순간 벌어진 일에 놀라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퍼억―
퍼억―
박 터지는 소리가 두 번 울려 퍼졌다.
그 정체는,
“영풍… 유월도?”
백경, 그 자신이 상대하던 두 명의 채주였다.
“흐, 흑룡왕?”
“어째서…….”
다른 두 명의 채주가 그 모습에 믿기지 않아 눈을 부릅떴을 때,
“왜냐니.”
다시금 허공섭물로 자신의 두 자루 도끼를 회수한 흑룡왕은 그대로 똑같은 동작을 반복―
퍽, 퍼억―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채주 둘의 머리를 박살 낸 뒤에 답했다.
“말했지 않나. 감히 내가 등장했는데, 나에게 굴복한 주제 무릎을 꿇지 않는 게 건방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