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장내의 분위기는 빠르게 식어갔다.
그리고, 그 사이로 짙은 혈향이 물씬 피어올랐다.
전장에서 피 냄새 나는 게 어디 대수겠냐 싶지만, 자신의 부하를 직접 죽이고 등장한 흑룡왕의 도끼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 냄새는 유달리 짙었다.
“이놈… 영호야!!”
그 사이에서 백경이 내지른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내공이 담긴 외침은 다들 고통스러워 귀를 틀어막게 할 정도로 우렁찼으나, 그 외침을 듣고도 흑룡왕은 여상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크크, 그건 또 언제 적 이름이요? 이젠 흑룡왕이라 불러주시오.”
“네 이놈……!!”
꽈악―
박도를 쥔 손에 핏줄이 불거졌다.
“너는 지금 선을 넘었다… 우리가, 우리가 아무리 다른 뜻을 가지고 다른 방향을 바라보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향해 칼끝을 겨누더라도……!!”
실핏줄이 터진 눈이 붉게 물들며 소리쳤다.
“어찌 네가 네 사람들마저 해할 수 있느냐!!”
구우웅…….
막대한 내기가 풀어져 나와 좌중을 짓눌렀다.
“큭?!”
“무슨 내공이…….”
“장강백경이 이 정도였다고?”
그동안 바보처럼, 속 좋은 아저씨처럼 허허 웃던 백경이 진면모를 보이자 다른 수채의 채주들마저 흠칫 몸을 떨었다.
하나,
“크… 크크크큭…….”
정작, 그 모든 기세를 한 몸에 받는 흑룡왕은 푸들푸들 몸을 떨었다.
“사형. 이 멍청한 사형. 당신은 아직도 그런 재미없는 말을 하시는군.”
“…뭐라고?”
“가족이니, 낭만이니, 의리니. 대체 그딴 게 이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의 두 팔이 쫙 펼쳐지며, 한껏 무언가를 움켜쥐는 동작을 취했다.
“힘. 오로지 힘이다. 만가쟁패의 이 혼란을 뚫고 갈 압도적 힘만이 가치가 있는 거다!!”
구구구구구구…….
거대한 힘이 장내를 휩쓸었다.
직전 백경이 보였던 기세를 압도하는 전율스러운 기운이 전장을 지배했고, 채주들은 그에 질린 듯 몸을 떨었다.
“아저씨, 아저씨 동생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동의하는 바기는 한데, 자네가 상대하던 폭풍창은 어찌하고 이리 혼자 왔는가?”
“걔요? 저기 도망치던데?”
폭풍창은 도망쳤다.
“저놈… 상태가 이상한데?”
“뭐?”
“군자는 누울 자리를 알고 발을 뻗는 법. 동업자가 미친 것 같으니 나는 후퇴하겠다.”
한껏 싸우던 폭풍창 이학도는 흑룡왕이 발작을 일으키자 곧장 철창을 회수하더니 뒤로 물러났다.
‘괜히 저놈 발목 잡아서 적을 늘릴 필요는 없으니…….’
“어지간한 양반이군.”
도망친 이는 굳이 쫓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럴 여유도 없었다.
“크크, 보아하니 올 놈은 대충 다 온 것 같군.”
땅에 박아두었던 흑룡쌍부를 다시금 허공섭물로 주워든 흑룡왕이 전장을 오시했다.
가만 보고 있자니 느껴지는 기운이 진정 보통 범상치 않은 게 아니다.
‘이건 좀 위험하겠는데…….’
“아저씨, 정면 좀 맡아주실 수 있죠?”
“저, 정면?”
솔직히 자신 없다.
거절하고 싶다는 본심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지만,
“가능하죠? 에이, 그래도 장강백경인데.”
“큭… 크윽… 가, 가능… 하, 하지…….”
뱉어버렸다.
직후 미친 듯이 후회가 몰려왔지만,
‘사나이 백경.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백경은 스스로 마음을 다지며 말했다.
“내가 정면을 맡을 테니, 자네는 측면을… 응?”
저 답 없는 녀석을 상대로 일대일은 절대 무리일 테니 합공을 하자고 하려던 백경이었으나,
“자, 자네?”
없다.
좀 전까지만 해도 곁에 있던 당유혼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고 있으니,
“흐흐, 옛정을 생각해서 무슨 작당을 하든 기다려 주려 했는데… 날 혼자 상대할 생각이었나, 백경!”
“아, 아니…….”
사기당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으나,
“그렇다면 친히 상대해 드리지!!”
흉흉한 쌍도끼를 들고 달려오는 흑룡왕은 더 이상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죽어라!!”
“으… 으아아아!! 모르겠다!! 덤벼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백경 역시 자신의 도를 마주 휘두르며 흑룡왕과의 결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편에서 그런 결전이 벌어지는 동안 몸을 빼낸 당유혼은,
“노야. 지금 상황 알겠죠?”
“헐헐. 오셨는가, 젊은이.”
한쪽에서 존재감을 감춘 채 수적의 목을 따고 있는 독비어옹을 찾아갔다.
“꽤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숫제 저런 괴물이 따로 없구먼.”
피가 듬뿍 묻은 꼬챙이를 들고 있던 독비어옹은 벌써 열 명도 넘는 수채 간부급의 목을 땄는 듯 했음에도 별달리 호흡에 이상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건 그의 무공이 그만큼 경지가 높다는 뜻도 되지만,
“살수 무공을 익히셨죠?”
그가 익힌 무공이 애초부터 과한 동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흘흘, 역시 감이 좋은 젊은이시군.”
자신의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챈 당유혼을 보며 독비어옹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네. 그리고 젊은이가 내게 온 이유는 이 혼란을 틈타 저 흑룡왕이라는 자의 목을 딸 수 있겠냐는 말일 테지?”
“정확하시네요.”
“그럼 답도 잘 아시겠군.”
“…힘들까요?”
“불가능일세.”
힘든 수준이 아니라 아예 안 된다고.
독비어옹은 곁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단언했다.
“저건 괴물일세. 단순히 나보다 강할 뿐 아니라, 상성조차 좋지 못하군.”
늙고 주름졌으나, 그 안에 깊은 혜안을 보유한 독비어옹은 흑룡왕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
“뭔가가 있군.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있어. 아주 어려운 상황일세.”
‘미치겠네.’
물론 알고는 있다.
저 시커먼 놈의 강함은 딱 봐도 구파일방의 장로급을 넘어선다는 것을.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을.
‘왜 저딴 걸 여기서 만나지?’
딱 봐도 시커멓고 구린 냄새가 난다. 사악한 음모의 냄새. 송장 썩는 냄새보다 더 끔찍한 무언가.
‘딱 봐도 엄청 얽히기 싫은데…….’
진지하게 폭풍창 이학도마냥 발을 뺄까 고민하고 있는데…….
“만약, 젊은이가 끝까지 스스로를 숨기려 든다면 말일세.”
클클클― 웃음소리와 함께, 독비어옹의 날카로운 눈빛이 폐부를 찔러왔다.
“…예?”
“모른 척할 생각이신가? 하긴, 젊은이는 결국 외부인. 진심을 다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이 노인네가…….
무시무시한 시선과 부리부리한 안광을 빛내는 노괴의 모습은 어째서 무림에서 노인, 여자, 아이를 조심하라는 격언이 통용되는지를 증명했다.
“어찌할 텐가?”
“어찌하기는…….”
인상을 팍팍 찌푸리고 있을 때, 저편에서 비명 소리와 고음, 괴성 등등이 버무려진 것들이 들려왔다.
“흐하하하하!! 백경! 천하의 백경이 가진 신력이 이 정도인가!!”
부우웅―
흑룡쌍부가 매서운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칠흑 같은 두 도끼날에는 검은 강기가 흑룡처럼 휘감겨 있었고, 그게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땅에는 큼지막한 상처가 죽죽 생겨났다.
‘이, 이건 못 막는다!’
제아무리 천생신력을 자랑하는 백경일지라도 정면에서 막아내는 건 절대 무리였고, 가까스로 흘려내거나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덕분에 뒤로 쭉쭉 밀려나고 있었는데, 흑룡왕의 도끼질은 힘뿐만 아니라 속도까지 백경의 것을 아득히 추월하고 있었다.
콰아앙!!
“쿠억!!”
제대로 흘려내지 못한 도끼질을 박도로 막아서던 백경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역류했다.
‘무, 무슨 단 한 방에 기혈이 꼬이는……!’
직접 처맞아본 입장에서 백경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기세만으로도 흑룡왕이 자신보다 강한 것은 느끼고 있었으나, 한 번 부딪쳐보니 단순히 더 강하다… 이런 말로 표현할 수준이 아니다.
“이놈 영호야! 대체 무슨 사술을……!!”
“크크, 사술? 이봐, 백경. 구질구질하게 왜 그래?”
자신이 한 손으로 내리찍은 도끼를 두 손으로 간신히 쥔 박도로 막아내는 자신의 옛 사형을 보며 흑룡왕은 웃었다.
“그딴 건, 저들 잘난 맛에 살다가 그 높은 콧대가 뭉개진 정파놈들이나 하는 소리가 아닌가. 아, 아니지.”
생각해 보니까.
“어차피, 네놈도 똑같은 처지가 되긴 하겠군.”
꾸구국―
“끄으으윽?!”
내려 찍히는 압력이 더더욱 강해졌다.
더더욱 압력이 가중되는 흑룡쌍부에 힘이 더해질수록, 백경의 두 발이 땅속으로 박혀 들기 시작했다.
“그 높은 콧대를 통째로 뭉개주마, 크하하하하!!”
흑룡왕의 광소가 폭발하는 순간,
“멈춰라!!”
“거기까지다!!”
두 명의 사내가 흑룡왕의 좌우에서 나타나더니 서로의 검과 도를 내찔렀다.
파팟!!
“엉?”
완벽한 시간 차를 두고 펼쳐진 합격에 흑룡왕은 첫 번째는 허리를 뒤로 젖혀 피해 내고, 두 번째는 또 다른 흑룡쌍부를 휘둘러 쳐냈다.
허무하리만치 날아간 기습의 기회지만, 그 틈에 백경은 용력을 발휘해 자신을 짓누르던 흑룡쌍부를 쳐내고 몸을 빼냈다.
“푸하… 눈물 나게 고맙다!! 비목어, 흑사어… 너희 덕… 아?”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고마움을 표하려던 백경은 자신의 곁으로 내려앉는 두 명 중 하나의 모습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비, 비목어… 너, 너 그 팔은……?”
비목어.
그의 팔 한쪽 소매가 안에 감싸여 있던 것이 통째로 텅 비어 있었다.
“…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수. 내가 대장한테 오려니까 끈덕지게 물어서 잘 안 놓아주더라고.”
“너… 너……!!”
백경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려던 흑사어와 비목어는 각자 그만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흑사어는 온몸에 큼지막한 칼자국이 대여섯 개는 나 있었고, 비목어는 왼팔이 잘려버렸다.
그 사실에 백경은 두 눈을 부릅떴으나,
“…빌어먹을.”
도저히 슬퍼할 여유조차 없는 현 상황에 흘러나오려던 말은 꾹 삼키고 박도를 꾹 움켜쥐었다.
“크흐흐, 혼자 안 되니 셋인가?”
자신을 상대하려는 적이 셋이 됐음에도 흑룡왕은 흉소를 터트렸다.
그러더니 별안간 자신의 두 도끼를 집어 던져서,
퍽―
퍼억―
“벌레 같은 놈들. 일 인분을 하는 놈이 없군.”
자신들이 놓친 흑사어와 비목어를 쫓아오던 수하들의 머리를 터트려버렸다.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전부 쓸모없는 놈들 뿐이야. 그리고 그런 놈들은 살 가치가 없는 놈들이고.”
부우웅―
다시금 두 도끼를 회수한 흑룡왕은 백경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클클클… 안 그렇소, 사형?”
끔찍했다.
적이고 부하고 할 것 없이 전부 쳐 죽여 가는 흑룡왕.
아니, 그가 등장하고서부터 오히려 죽인 것은 적군이 아닌 아군뿐.
끔찍한 폭정이요, 압제지만…….
‘전황은 더욱 악화되는구나……,’
흑룡왕 휘하의 부하들은 그런 군주의 모습에 반발하기보다는, 그에게 죽기 싫어 더욱 악을 쓰며 날뛰고 있었다.
그에 백경채의 수적들은 점점 밀려나고 있었고, 전황은 한쪽 국면으로 확실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건… 이건…….’
백경이 주장하던 뱃사람의 낭만.
그 모든 것이 처절히 꺾여나가는 모습에, 그 누구도 흑룡왕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줄 알았다.
“글쎄. 딴 건 모르겠는데 말이지.”
별안간 들려온 심술 가득한 누군가의 목소리.
동시에,
콰아아아앙!!
무언가가 날아와 흑룡왕의 측면을 강타했으니,
“네가 살 가치가 없는 쓰레기란 건 잘 알겠다.”
흑룡왕이 날아가 버린 자리에 나타난, 아직 앳된 티를 벗어내지 못한 청년이 두 눈에 귀기를 피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