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140화 (140/350)

140화

헉… 허억… 헉…….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턱 끝에 맺혀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과 함께, 거칠게 몸을 썼기에 아직 지혈이 덜 된 절단면에서 핏물도 뚝뚝 떨어졌다.

그런 외팔이 신세로도 비목어는 죽어라 달리고 있었고, 그 위에 반 시체처럼 얹혀 있는 백경은 어렵사리 입술을 달싹였다.

“…놔라, 이놈아…….”

애원하듯 힘겹게 말하는 백경이지만 비목어는 그에 답할 여유가 없었다.

이 섬에 가득한 수적들이 끊임없이 덤벼들거나 화살을 쏘아왔기에 그걸 피하는 것도 벅찼기 때문이다.

“멈춰라!!”

“백경의 목을 내놓아라!!”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자신의 하나 남은 팔로 검을 휘둘러 무찔러야 했다.

체력과 내공이 기하급수적으로 바닥에 치달았고, 더 이상 뛰지 못할 때가 되었을 때야 비목어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콰악!!

바닥에 검을 박아 쓰러질 뻔한 몸을 겨우겨우 지탱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몸.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스러질 수 없다는 일념으로 비목어는 한쪽 눈을 떴다.

“아, 젠장.”

원래는 양쪽 눈을 다 뜨려 했는데, 한쪽 눈에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과 함께 오른쪽 눈밖에 뜰 수 없었다.

‘팔 없는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눈까지 없냐.’

비목어 비목어 하더니, 진짜 그런 신세가 돼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숨 돌릴 여유는 있으려나.’

하나뿐인 눈알을 데굴데굴 굴려 좌우를 둘러보면 온통 시체뿐이다.

언제 또 적들이 추가로 들이닥칠지 몰라도, 당장 주변에 있던 수적들은 모두 베어버렸기에 가능한 일.

그렇게 생긴 짧은 여유에 겨우 숨을 몰아쉬고 있자니, 백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아, 제발… 놔라… 놔달란 말이다…….”

“…끙, 대장은 참 죽을 때까지 헛소리시군.”

참 한결같구만.

그래서일까?

한 줌 남은 여유에 몸을 회복하기보다는, 그간 못다 한 말들을 꺼내기로 한 것은.

“대장. 그걸 알고 있나?”

“…….”

대답이 없다.

흘긋 고개를 돌리니 백경의 눈은 반개한 채, 그 사이 보이는 동공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이 양반이 아직 정신을 차린 게 아니라, 무의식중에서도 자신을 살려 보내려 했다는 것을 깨닫고 픽 웃어버렸다.

“그래, 이런 대장의 모습을… 나는 시샘하고 질투했었어.”

멋있다.

대협(大俠)이란 표현은 낯간지럽고 오글거린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들의 대장을 표하자면 그만한 게 없다 생각했다.

“어이, 네가 삼협호의 비목어라며? 나랑 같이 가자!”

첫 만남.

자신에게 내뱉은 그 첫마디가 유독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한 조각.

“…대장은 그때부터 꿈을 꾸고 있었지. 망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또렷한데, 현실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아득한 그런 꿈.”

처음에는 한낱 꿈이라 비웃던 자신이 어느새부터 그 꿈에 젖어 들어갔다.

저잣거리에 대낮부터 술에 취한 취객이 지껄여대는 그런 이야기를, 어느새 자신도 취해서 입에 달고 살아갔다.

그 꿈에 취해 힘든 것도 고통스러운 것도 괴로운 것도 잊고 달려왔다.

겨우 일백이 조금 넘는 동료들과 수천이 넘는 세력을 상대로 맞싸울 때도.

함정에 빠진 대장을 구하기 위해 흑사어 녀석과 함께 이백이 넘는 수적들을 향해 뛰어들 때도.

온몸에 화살이 꽂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어서도 겔겔거리며 살아남았을 때도.

비목어는 입가에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웃기로 했다.

“빌어먹을 대장.”

“비목어야. 비목어야.”

어느 날 밤.

언제나와 다름없이 전신에 훈장처럼 난 수십 개의 상처와 그로부터 밀려오는 고통을 술 한 모금에 삼키던 밤이었다.

“백경의 시대가 올까?”

잔뜩 취한 목소리로 백경이 물어왔다.

의(義)와 협(俠)이 게으른 당나귀처럼 바닥에 굴러다니고, 온갖 가문이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협잡질을 멈추지 않을 때,

낭만(浪漫)이라는, 이제는 너무나 낡고 쾌쾌한 것을 쫓아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올 수 있을 것인가.

그 물음에 비목어는 괜스레 잔을 높이 들어 소리쳤다.

“아, 오지요! 십할(十割) 오지요! 그거는 반드시 올 수밖에 없죠!”

괜스레 욕지거리와도 비슷한 천박한 발음을 대며 외쳤다.

그에, 백경은 처연하게 웃었다.

“근데, 그런 시대가 오면 나는 없을 것 같구만…….”

그 웃음이 싫었다.

항상 이상한 웃음소리라고 소리를 질러댔던 웃음이지만, 그 웃음소리만큼은 싫었다.

그래서였다.

발악적으로 소리를 내지른 것은.

“제길. 그럴 수 있지! 하지만, 하지만 대장은 물결이야. 새로운 조류가 밀려오는데, 거기 처음 올라탄 사람이라고!”

첫 파도가 원하는 곳까지 바로는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나 이 첫 파도가 못 가도, 그다음 파도가 오고, 또 그다음 파도가 와서 계속 새로운 파도가 밀려든다면, 여러 차례 밀려와서 거기 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대장은 그 첫 파도를 뗀 사람이야! 대장이 뭐 거기 없을 수도 있는데… 그럼 뭐 어때? 그 세상이 온다면, 대장이 거기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여?”

소리쳤다.

고함을 내질렀다.

그 말에 그 큼지막한 눈을 동그랗게 뜬 백경은 잠시간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하긴. 그래, 내가 뭐. 그런 세상이 되기만 하면 되지. 뭐 내가 꼭 거기 있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나지막이 웃어버렸다.

“…하.”

옛날 이야기.

기억 한 구석에 박혀 먼지만 쌓이던 그때의 이야기를 떠올린 비목어는 고개를 저었다.

“정정하지. 대장은… 그래, 백경(白鯨)이야.”

한낱 파도가 아니라, 그 파도들과 물결들을 타고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갈 거대한 고래.

“그리고, 내가 그 물결이지.”

설혹 함께 가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그런 세상이 온다면, 저 구천을 떠도는 망령이 되어서라도 덩실덩실 춤을 출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약속하겠수다, 대장. 설령 부딪혀 깨져 사라질지라도… 그 첫 번째 파도가 되리라고.”

비목어는 조심스레 백경을 내려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자신 역시 함께 바닥에 눕고 싶다는 욕망이 밀려왔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박아놓았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하나 남은 눈을 떠서, 가까워지던 적의 존재를 시야에 담는다.

“…이건, 뜻밖의 횡재구나.”

그렇게 말하는 상대는 잔뜩 물에 젖은 몰골이 엉망이다.

‘다행인 건, 저쪽도 제 상태는 아니군.’

의복은 여기저기 찢겨 있고, 그 사이로 꽤 험한 꼴을 본 것인지 화상 자국과 어딘가에 찢기고 짓눌린 자국들이 즐비했다.

“…흑랑단주.”

흑룡왕의 명을 받고 출전했다가 육언의 책략에 휘말려 화공에 당했던 흑랑단주.

그는 폭발하고 가라앉는 뱃속에서 살아나와, 불타는 선단이 가득한 물을 헤엄쳐 이제 막 흑룡도에 복귀한 참이었다.

“비목어에 백경까지. 너희 둘의 목을 가지고 간다면 나의 주군께서 무척이나 기뻐하시겠군.”

사선을 뚫고 나왔다 싶었는데, 더 큰 죽음이 찾아와버렸다.

비목어는 그 사실에 씨익 웃으며 검극을 겨누었다.

“검 끝이 떨리는구나.”

천천히 검을 뽑아 드는 흑랑단주가 차가운 조소를 지었다.

“제대로 서 있을 힘조차 없으면서, 나를 맞상대하겠다고?”

실로 가소로운 모습.

그에 비목어 역시 마주 웃었다.

“새끼. 누구 부하 아니랄까 봐, 말 진짜 많네.”

“…뭣? 네가 감히 주군을 모욕하는 것이냐!”

“찔리냐?”

“이놈이!!”

고명한 고수들이 생사의 결전을 나누기 전 마지막으로 나누는 대화들이 어느새 저잣거리 아이들 말싸움 수준으로 전락했다.

“그치, 이게 우리 대화 수준이지.”

한낱 수적 새끼들이 검 끝이 떨리기는 개뿔.

“드루와. 너는 여기서 나랑 같이 가는 거야.”

진흙탕 싸움 한번 해보자고.

* * *

도망쳐.

도망치라고.

백경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천근만근 무거워 도저히 열리지가 않았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속으로 수백 번을 소리쳤다.

그럼에도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달싹거릴 수가 없었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 막막할 때, 그는 자신에 대한 짙은 혐오를 느꼈다.

‘백경… 이 멍청한 놈아……. 뭐 하는 것이냐, 대체!!’

정신과 육체가 따로 논다.

사고는 아직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몸이 그에 맞춰 움직여 주지를 않는다.

바닥이 드러난 단전은 가뭄 때의 논과 같이 쩍쩍 갈라지고 있었고, 기혈은 뒤엉켜 한 방울의 내공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힘은 분명 자신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은… 그 힘만큼은…….’

한 사람이 있었다.

한 남자가 있었다.

한때 스승이라 부르며 자신이 가장 존경해 마지않던 이가 남긴 힘.

그리고,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이가 남긴 힘.

‘낭만. 내게 그 독과 같은 것을 속삭여 준 당신이 남겨준 힘…….’

꿈을 꾸라고.

이(利)와 득(得)만을 바라보지 말고, 꿈을 꾸며 살아가라는 말을 남긴 자신의 스승.

그는 어느 날 자신에게 그 힘을 주더니 사라져버렸다.

자신을 포함해, 그를 따르던 모든 이들을 버려둔 채.

‘스승, 당신을 증오했소.’

찾아가 묻고 싶었다.

그가 사라지며 수로채는 혼란에 빠졌고, 잠잠하게 숨어 있던 이들이 다시금 고개를 들며 힘없는 사람들을 약탈하는 수적떼가 되었다.

자신을 포함한 사형제들은 갈라섰고, 낭만을 좇던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그래서였다.

도망치듯 장강에서 벗어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스승의 흔적을 쫓은 것은.

‘그러다 그 소협을 만났지.’

자신의 그런 행적이 결국 도망이며, 스스로 되뇌었던 것은 변명이고 핑계라 말해 주었던 소협.

“가족이 틀린 길로 간다면 쥐어패서라도 옳은 길로 가게 해줘야죠.”

그 말에 백경은 장강으로 돌아갔고, 흩어진 이들을 다시 한데 모았다.

더 이상 스승을 좇는다는 핑계로 가족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멍청한 짓거리는 하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나는, 아직도 멍청했구나.’

“무슨 이유를 대든, 다 변명이고 핑계일 뿐이에요.”

또 한 번 들은 직언에 백경은 깨달았다.

아직도 자신은 도망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내게 꿈을 안겨주었던 스승이 없다는 외로움. 스승에게 버림받았다는 두려움. 스승처럼은 할 수 없다는 공포.’

그 모든 것에 겁먹은 자신은 고개를 돌렸다.

억지로 호탕하게 웃으며… 외면했다.

그 결과가 이것.

추하게 부하의 등에 실려 전장을 도망쳐야만 했고, 이제 부하의 뒤에 숨어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참혹하리만치 고통스러운 대가이며, 앞으로 수백 일의 밤을 더 자더라도 덮고 있는 이불에 발차기를 날려댈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

부끄러운 것도 괴로운 것도, 두려운 것도.

그 모든 것을 마주하리라.

어떠한 파도에도 쓸려나가지 않는 거대한 고래처럼.

그러한 다짐을 하는 순간,

백경(白鯨)이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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