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그건 실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용왕진기(龍王眞氣).
스승이 남긴 한 주먹밖에 되지 않는 힘.
그것이 단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봉인했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스승에 대한 분노와 실망 때문에?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그 힘을 떠올릴 때면… 스승이 떠올랐으니까.’
자신에게 꿈을 꾸게 해준 남자.
그가 이제 없다는 현실이 어떤 두려움과 아픔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선사했다.
그렇기에 모른 척 봉인하고 단전의 가장 밑바닥에 처박고 스스로 금제를 가한 힘이었으나,
‘…내가 멍청했구나.’
스승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욱 대단한 존재였다.
봉인했다 싶은 한주먹만 한 힘은, 사실 스스로 숨어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자신이 힘을 드러내면, 백경이라는 이 어리석은 놈이 또 괴로워할까 봐.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고개를 들고, 눈을 뜨기로 결정한 순간 용왕진기는 기다렸다는 듯 단전에서 솟구쳐 그의 전신을 휘몰아쳤다.
그건 단순한 내공이 아니었으니, 경이로운 이적 그 자체가 되어 엉킨 기혈을 풀고 몸 상태를 최상의 것으로 회복시켰다.
“아…….”
입에서 나오는 뜨거운 숨결이 어서 빨리 싸우길 원하는 육신의 외침을 대신했다.
“…그랬구나.”
게다가, 용왕진기는 그간 가만히 숨어 있던 게 아니었다.
언젠가 자신을 찾아줄지 모를 주인을 기다리며 스스로 몸을 불려왔다.
십수 년간 백경이 연마하며 남은 내공의 잔해를 조심스럽게 먹으며 꾸물꾸물 성장해 왔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
“스승… 당신은…….”
이 기운을 보자니 알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으셨구려.”
어째서 스승이 홀연 사라진 지는 모른다.
하나, 이런 기운을 남긴 자가 포기했을 리가 없다.
아니,
‘포기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위해 떠난 스승.
분명, 모든 걸 져버릴지라도 해야 할 것이 있어 떠났을 스승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백경은 분연히 일어났다.
“그러니까, 나 역시 당신의 뒤를 이을 겁니다.”
그의 두 눈에 비목어가 보인다.
하나 남은 외팔로 흑랑단주의 맹공을 받아내고 있는 그 위태위태한 모습.
그걸 보는 순간,
콰앙!!
저도 모르게 그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거머리 같은 놈. 이제는 죽어… 쿠읍?!”
깔끔한 정타가 그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뒤로 날아간 흑룡단주는 거대한 아름드리나무에 처박혔다.
“대, 대장?”
“할 말 많은 거 아는데, 잠깐만 기다려. 내가 소설에서 봤는데, 여기서 대화나 나누고 있으면 사달 나더라고.”
백경은 곧장 흑룡단주를 쫓아 달려갔다.
마침, 나무에 처박혀 곤죽이 된 척, 숨겨놓았던 내공을 이용해 몸을 빼내려던 흑룡단주는 그 모습에 기겁했다.
“이런 정신 나간! 감동적인 부하와의 해후 따위는 없더냐?”
“그건 조금 뒤에!”
금빛 기운이 그의 주먹에 휘감겼다.
그걸 중심으로 주변 대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고, 그걸 보는 순간 흑랑단주는 직감했다.
저거 맞으면 뒈진다고.
콰아아아아앙!!
“새끼. 맞으면 뒈진다는 생각했지? 근데 어쩌냐, 그런다고 못 피하는 공격일 텐데.”
맞으면 죽는 거 알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공격.
흑랑단주가 반응하기도 전에 복부에 꽂힌 주먹은 단번에 그의 모든 뼈를 박살 내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한편,
“…….”
꿈인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목어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게 현실이 맞나 싶어 눈을 껌뻑였다.
‘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휘청―
그러다, 문득 시야가 캄캄해지며 두 다리에 힘이 풀린다 싶을 때,
“웃차.”
훅― 하니 거리를 좁히며 다가온 백경이 쓰러지던 비목어의 몸을 받쳐 들었다.
“괜찮냐? 아니, 말 안 해도 돼. 안 괜찮은 거 아니까.”
그럼 왜 물었어, 이 자식아.
“…다 죽어가는 놈이 눈빛으로 욕하는구만.”
섭섭하게.
백경은 많은 말 대신 그의 등 뒤에 손을 얹고 용왕진기를 쏟아부었다.
우우웅…….
그러자, 웅장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이 그의 체내로 흘러들었다.
‘이, 이건?’
처음에는 막아보려 했다.
당최 무엇이 체내로 들어오는 것인지는 몰라도, 다른 성질의 기운을 함부로 체내에 받아들이면 사단이 나는 것은 무림의 상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용왕진기는 상식을 무시하는 기운이지.’
비목어라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용왕진기를 그의 체내로 흘려 넣은 백경은 정신을 집중하며 진기의 흐름을 살폈다.
‘생명력. 용왕진기는 용의 무한한 생명력을 닮은 기운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의술 같은 것은 할 줄 몰랐다.
무엇이든 척척 잘해 내는 절대자처럼 비목어의 내상과 외상을 전부 고쳐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만 해도 돼.’
다행스럽게도 이 섬에 의원은 없어도, 어지간한 의원보다 더 의술이 뛰어난 이가 있다.
‘당유혼. 그 소협이라면…….’
사천당가의 진정한 후계자라면 분명 의술에도 깊은 조예가 있을 터.
실제로도 자신을 한 번 구했던 전적이 있는 그를 믿기로 한 백경은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 덕에,
“쿠어어억!!”
기혈이 제자리를 되찾은 덕에, 오히려 그 사이에 끼였던 피찌꺼기들이 역류한 비목어는 다량의 울혈을 토해 냈다.
“좋아. 급한 불은 껐군.”
“컥… 허억… 헉… 대, 대장? 이건…….”
“설명할 틈 없다. 바로 가자.”
타탓!
오붓하고 여유로운 대화 시간은 없다.
곧장 비목어를 한쪽 어깨에 들쳐 멘 백경은 내려온 비탈길을 역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 길들을 되짚으며 올라가자니 온 주변에 시체가 즐비했다.
‘비목어…….’
자신을 업고 내려오느라 얼마나 험난한 사선(死線)을 넘어야 했을까.
두꺼운 입술에 피가 나도록 깨문 백경은 더욱더 두 다리에 힘을 실었고, 마침내 자신의 전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다 튀어나왔어?!”
“거 말할 힘이 있으면 좀 더 잘 싸워보시오!!”
“뭐? 내가 당신 목숨만 몇 번 살린지 알고 그러는 건가?”
“젠장! 그럼 몇 번만 더 살려달라고!”
“이 근본 없는 수적놈들이 진짜!!”
‘…다행히 무탈하군.’
흑사어나 당가의 젊은 청년이나, 전신이 피와 땀으로 흠뻑 젖었지만 입 하나는 잘 터는 걸 보니 무사해 보였다.
‘좋아, 그럼.’
“여기 있어라.”
데려온 비목어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백경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용왕진기가 전신을 휘몰아치더니 그의 육신 역시 앞으로 쏟아져 갔다.
“크하하, 죽여주마!!”
목표는 당장이라도 흑사어의 머리통을 부숴버릴 기세로 도끼를 치켜드는 흑룡왕의 좌측.
일 장여에 달하는 강기를 뿜어내는 도끼를 머리 높이 들어 올린 대가로 틈이 크게 드러난 흑룡왕의 옆구리를 향해 어깨를 때려 박았다.
콰아앙!!
“커허어억!!”
“손맛 좋고.”
십여 장도 넘게 날아가는 흑룡왕의 모습을 확인한 백경은 이내 건치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아아, 다들. 나를 기다렸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장한 자신.
그런 자신에게 향할 선망의 눈빛을 예상하며 고개를 돌린 백경에게,
“뭐래요, 시팔. 그럼 안 기다렸어요?”
“대장, 그냥 뒈지십쇼.”
온갖 욕이 다 쏟아졌다.
‘아, 아니… 너는 왜?’
당가의 저 젊은 청년이야 그렇다 쳐도, 흑사어 너는 나 보고 도망치라며?
“미… 미안하네…….”
“알면 됐어요. 그보다, 꼴을 보니 ‘그걸’ 쓰기로 한 모양이네요?”
자신의 용왕진기에 대해 아는 척을 하는 모습.
대체 그걸 어찌 안 것인지 따위는 묻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하잘한 것 따위가 아니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소협. 부탁이 있네.”
“저기 있는 아저씨 동료요?”
당유혼이 비목어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에 못 당하겠다는 표정을 짓던 백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탁하네. 숨만 겨우 붙여 놓은 상태일세. 살릴 수 있겠나?”
“그건 뭐, 가봐야 알겠죠.”
내가 의술의 신도 아니고 어떻게 알아?
다만,
“그동안, 버틸 수 있겠어요?”
저기 저편에서 몸을 일으키는 괴물.
조금 전 기습을 정타로 처맞고도 꾸역꾸역 몸을 일으키는 흑룡왕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것도, 해봐야 알겠지.”
확신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 해서 포기도 하지 않는다.
‘어설픈 대답이네.’
결국 이렇다는 것도 저렇다는 것도 확신 내리지 못하는 그런 어설픈 답이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중요한 것은, 어쨌든 저쨌든 그것을 해나간다는 것.
영웅이라 불리는 녀석들의 길이란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 속 선택의 연속임을 잘 알기에 당유혼 역시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버티고만 있어요.”
파팟―
당유혼은 곧장 쓰러진 비목어를 찾았다.
시체처럼 헐떡이고 있는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당유혼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그가 실눈을 뜬 채 칩을 열려 할 때,
“너는… 우웁?!”
“조용.”
입에다 오면서 주운 더러운 천을 꾸겨 넣으며 침묵시켰다.
“시간도 없고, 필요한 약도 없어요. 그러니 어쩌겠어.”
좀 아파도 참아야지.
“우웁, 우우웁?!”
주섬주섬.
뭔가 하나씩 품에서 꺼내질 때마다 비목어의 동공이 요동쳤다.
‘어, 어이… 그거 맞아?!’
뚝뚝 떨어지는 진액은 땅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푸스스― 연기를 토했다.
몇 명의 피를 머금은 것인지 피딱지가 눌어붙은 대침은 투척용 암기면 암기였지, 절대 의료용으로 쓸 만한 것은 아니었다.
“엥? 눈이 왜 그래요? 아, 이거? 죽을 만큼 아프긴 할 텐데, 죽진 않을 거예요.”
어쩌겠어, 돈도 없고 뭣도 없으면 다 이렇게 사는 거지.
“우우우웁!!”
입이 틀어막힌 비목어가 비명을 지르든 말든, 대침을 튕기며 기가 막힌 내공 운용으로 이물질을 털어낸 당유혼이 그 끝에 각종 독액을 듬뿍 찍어 발랐다.
“자자, 독… 아니, 약 들어갑니다.”
푸욱― 푹! 푹푹!
“끄우우우우웁?!”
아프다.
온몸이 망가져서 어지간한 고통 따위는 더 느끼지 못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대침이 찌를 때마다 더욱 극심한 고통을 동반했다.
하지만 이건 당연한 일.
‘말 그대로 극약처방(劇藥處方). 엉킨 기혈이 그나마 남은 생혈에도 전이될 수 있기에 그 자체를 끊은 것이니까.’
얼마 남지 않은 생살을 찌르는데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덕분에 속으로 비명을 질러대는 비목어였으나,
푹― 푹푹― 푹푹!
‘어차피 내가 아픈 것도 아닌데.’
당유혼은 무심한 손길로 대바늘을 한 뼘씩 푹푹 찔러댔다.
그 끝에,
“끄으으으…….”
비목어는 게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며 당유혼이 제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이제.”
배역은 다 모였다.
고난과 역경을 디디고 일어선 영웅과 그를 돕는 동료들.
남은 것은, 그 영웅이 넘어설 최후의 벽뿐.
“마지막을 끝내볼…….”
그런데,
“…뭐야, 저게?”
쿠구구구…….
검은 기류가 휘몰아친다.
그 중심에선 흑룡왕이 넘실거리는 기운을 받으며 점점 존재감을 키워내고 있었다.
아니, 커지는 건 단순 기운뿐이 아니었으니,
꾸둑… 꾸득… 꾸드득…….
‘저게 왜, 저기에……?’
마지막 적의 상태가 좀, 아니, 많이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