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 마수 】
과거.
흑룡왕, 아니, 구일천이라는 사내가 아직은 장강용왕의 셋째 제자라고만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장강의 용이 되겠다.”
대대로 장강의 지배자는 용왕이라 불리었다.
그래서 구일천 역시 그리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왜? 대체 어째서? 저놈은 놀기만 하는데……!”
스물이 되기 전까지 자신의 재능이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적 따위는 없었다.
실제로도 그가 살아오던 지역 일대에서 촉망받던 기재라 불린 게 자신이었고, 덕분에 장강용왕의 세 번째 제자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백경… 너는 왜 항상 나보다 앞서 있는 것이냐!!”
자신의 기함인 백경호의 갑판 위에 드러누워서 햇볕을 쪼거나, 툭하면 낭만이니 뭐니 헛소리만 하며 가출해서 세상을 돌아다니는 둥.
도저히 수련하는 꼴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그가 항상 자신보다 나은 성취를 보이는 것을, 구일천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특히나,
“이놈아, 무공 수련 좀 해봐라!”
스승이 그런 백경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호의는 더더욱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암만 노력해 봐도, 자신에게는 진신무공을 전수해 주려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주제, 어째서 저런 놈팽이에게만은 항상 특별 대우인가?
한번은 찾아가 직접 따져보았지만,
“네게는 너무 이르다.”
돌아오는 것은 그저 이르다는 말뿐.
분하고, 화나고, 또 서러웠음에도 그는 참았다.
언젠가 자신이 용이 되는 날 이 모든 서러움을 갚겠다는 일념으로.
그러던 어느 날,
“커헉!!”
추적추적 비가 오던 어느 날 찾아온 한 무리의 흑의인들.
주변에 적수가 없다 자신하던 구일천이었으나, 그날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았다.
‘마, 말도 안 돼……. 어, 어떻게…….’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면 납득했을 것이다.
세상에 고수는 많고 많으니까.
하지만,
‘기세만으로… 내, 내가…….’
자신의 자랑인 흑룡쌍부를 뽑기도 전에, 흑의인 중 하나가 기세를 내뿜자 구일천은 반항도 못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 녀석이 용왕의 제자라고?”
“셋째 제자입니다.”
“쯧쯧, 호부견자 없다더니. 그것도 다 옛말이군.”
무릎 꿇은 구일천을 앞에 두고 물건을 품평하듯 대화를 나누는 이들.
굴욕적이기 그지없는 말에도 구일천은 그저 오들오들 떨 뿐이었다.
그때,
툭―
“받아라.”
그의 앞으로 떨어진 두루마리 하나.
이게 무엇인지, 물을 용기도 없어 그저 덜덜 떨고만 있을 때 흑의인들은 사라졌다.
그 이상 아무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나타날 때와 같이 귀신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두려움에 덜덜 떨던 구일천이 그 두루마리의 내용을 보기까지는 장장 일곱 밤이 흘러야만 했다.
겨우겨우 그날의 악몽이 옅어져서야 두루마리를 펼칠 수 있었고, 그 내용을 확인한 그날… 그의 세상은 바뀌었다.
“이거다, 이거야!!”
그 두루마리 안에는 강해지는 법이 적혀 있었다.
구일천이 그토록 갈망하던 것이 그 안에 적혀 있었고, 그날부로 구일천의 세상은 달라졌다.
“…스승이, 사라졌다고?”
“그렇습니다. 용왕께서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셔서…….”
“아니.”
“예?”
“용왕이 사라지긴 어딜 사라졌다는 것이냐.”
지금 네 눈앞에 있지 않더냐.
구일천은 스스로를 흑룡왕(黑龍王)이라 참칭했다.
더 이상 장강이라는 물길 따위에 갇혀 있지 않는, 천하가 좁다고 비상할 흑룡(黑龍)이 되기로 했다.
그걸 위해 시작한 것은 전쟁.
넷째 놈을 급습하고, 그 세력을 흡수해 가장 세력이 거대한 대사형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큭… 일천이, 이놈!!”
한때 장강용왕의 후계자라 불리었던 그의 대제자 위무진.
그를 무릎 꿇린 흑룡왕은 차가운 조소를 머금었다.
“약하군.”
한때는 자신이 넘어야 할 벽이라 여겼던 이가 이다지도 한심하게 무릎을 꿇었다.
“이놈, 일천아!! 어찌 장강에 외세를 끌어들일 수 있단 말이냐!!”
목이 베이는 순간까지 그는 무어라무어라 외쳤으나, 이미 흑룡왕의 귀에는 닿지 못할 아우성이었다.
그에게 있어 패배자란 곧 약자였고, 그들이 외치는 것들은 대개 비루한 변명에 불과했으니까.
그 뒤로는 파죽지세였다.
열여덟 수채 중 열일곱 수채가 그의 발 앞에 무릎 꿇었고, 흑룡왕은 더 이상 스스로 참칭하는 별호가 아닌 세상이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장강을 삼키는 것은 시간 문제라 여겼고, 그다음으로 중원을 향해 야욕을 뻗을 생각이었다.
그래, 분명 그러했는데…….
‘그게… 어째서 네놈에게…….’
마지막까지 자신을 방해하던 귀찮은 것들을 하나하나 짓밟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백경의 수하놈 하나가 백경을 데리고 도망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도 여흥의 하나라 여겼다.
오히려, 그렇게 발악하며 도망치는 놈을 쫓아가 짓밟아 죽이는 게 더욱 재밌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백경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휘황찬란한 금빛 서기가 그를 감싸고 있었으니…….
단번에 그 정체를 알아본 흑룡왕은 괴성을 질러댔다.
“네가!! 어째서!! 용왕진기를!!”
단어들이 처참히 끊어져 뱉어진 문장.
얼마 남지 않았던 이성의 끈이 뚝 끊김을 느끼며, 그의 내부에 자리해 있던 무언가가 폭발했다.
흑룡왕이 변할 수 있게 해준, 정확히는, 흑룡왕을 변이시키던 그것이 때를 만나 진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 * *
“…마수(魔獸).”
당유혼의 입술에서 맹수의 울음소리와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어이가 없군.”
예상을 초월했던 상황이 들이닥치자 당황이 밀려왔고, 그것이 어느 정도 가시자 분노가 머리를 들었다.
저것의 정체는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저건 분명 흑룡왕이다. 흑룡왕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수가 아냐. 그런데, 어떻게 흑룡왕이 마수가 될 수 있지?’
마수가 무엇인가.
그것은 벽력조와 같은 영수(靈獸)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였다.
지난날 마교대전에서 그들이 부린 결전 병기가 바로 그것이었고, 천마의 목을 베기 위해 출진했던 결사대의 반을 휩쓸어버린 게 또 그것이었다.
‘물론, 마수라기에는 지나치게 약하다. 저게 진짜 마수라면…….’
이곳 동정호가 오늘부로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궁금하잖아.’
뭉클거리는 검은 기운은 삼 장이 넘는 형체를 갖추었다.
단순히 피어오르는 연기와 같은 게 아니라, 그 중앙에 흑룡왕이라는 핵을 박아놓은 채 여덟 개의 촉수를 꿈틀거리고 있었다.
대체 저놈은 뭐 하는 놈이며, 저런 게 어찌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직접 알아내야겠지.”
검푸른 기운을 휘감은 당유혼은 백경의 곁에 뚝 떨어져 내렸다.
“저거, 아저씨 사제 맞아요?”
“…난 저런 팔초어(八稍魚)를 사제로 둔 적 없네만.”
백경도 처음 보는 눈치였다.
‘하긴, 나도 저 모습이 되기 전까진 마기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천하에 자신보다 마기에 예민한 이가 없을 텐데, 그전까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단순한 마인이 아니라는 뜻.
다만,
“저놈도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인간이 마수가 되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상상이 현실이 된 대가인지, 흑룡왕은 거대한 팔초어로 변하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괜히 지금 백경과 당유혼이 대화를 나눌 틈이 생긴 게 아니었다.
“그런 듯하군. 즉, 기회는 지금뿐이란 얘기겠지.”
백경은 자신의 체내에 있는 용왕진기를 움직였다.
황금빛 기운에 대비되는 투박함과 단단함이 박도에 실렸다.
“먼저 가겠네!”
처음 보는 괴이한 상대를 향해 달려듦에도 두려움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않는 듯한 모습.
전신을 황금색으로 물들인 백경이 섬광(閃光)이 되어 흑룡왕에게 꽂혔다.
백경광란(白鯨狂瀾).
대공파(大攻波).
콰아아앙!!
섬광은 곧 폭발이 되었다.
어둠으로 이루어진 촉수가 크게 흔들렸고, 그 안에 있던 흑룡왕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암만 봐도, 저게 핵이란 말이지.’
그 틈을 놓칠 당유혼이 아니었다.
손을 움켜쥐자 검푸른 기운이 휘몰아치더니 곧 기다란 암창(暗槍)이 되었다.
푸욱!!
단번에 공간을 날아간 암창은 팔초어의 몸통에 박혔다.
다만, 원하던 목표는 아니었으니,
“변신 과정이라 해도, 급소는 안 내준다 이거지?”
여덟 개의 촉수가 순식간에 수십 개로 분화하더니 한 자리에 겹쳐 암창을 막아냈다.
퍼엉―!
곧 폭발이 일어나며 검은 덩어리들이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고, 떨어진 잔해는 치이익― 소리와 함께 바닥을 녹여버렸다.
“뭐야? 저거, 무섭잖아.”
“…같은 심정이군.”
떨어져 있다 이쪽으로 붙은 흑사어와 막 일격을 갈기고 돌아왔던 백경이 표정을 굳혔다.
“미리 말하지만, 우리 장강에는 저딴 무공 없다네.”
“누가 뭐래요.”
장강의 역사라면 자신이 더 잘 안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당유혼은 이제 변신 과정이 끝나기라도 했는지 서서히 똬리를 틀듯 촉수를 치켜올리는 팔초어 마수를 응시했다.
“놈은 마수(魔獸). 인간과는 다른 존재예요.”
“마수?”
“그건 뭐 하는 놈인가?”
당유혼이 아는 기색을 보이자 자연스레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마교는 들어봤죠? 그놈들이 키우는 영수가 마수입니다.”
간단하지만 확실한 설명.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저 녀석은 분명 흑룡왕일 텐데?”
돌연 뇌 정지가 온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콰아아아앙!!
기지개를 마친 팔초어가 거대한 촉수로 땅바닥을 후려치자 빠르게 뇌가 제 기능을 시작했다.
“죽이면 되는 건가?”
“암만 봐도, 사제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하군.”
생존 본능이 제정신을 선사하자 두 명은 각기 병기 위에 강기를 드리웠다.
“이제야 알아챘으니 다행인 것 같고. 그럼 시작들 해보죠.”
우우우우우……!!
울부짖는 팔초어 마수가 그 거대한 몸을 활짝 펼쳤다.
‘최후의 결전을.’
마지막 말을 뱉을 여유가 없었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 아름드리나무보다 더욱 거대한 촉수가 내리 찍혔으니.
파팟!!
그 찰나의 순간에 몸을 빼낸 셋은 각자 다른 생각을 했다.
‘이거, 나는 못 막는데?’
‘한 명은 정면으로 들어가야 된다. 그건, 아무래도 내가 해야겠군.’
‘개 같은 마교 새끼들.’
생각은 달랐지만, 각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았다.
자신이 가장 격이 딸린다는 것을 잘 아는 흑사어는 뒤로 빠지며 빈틈을 노리려 했고, 백경은 어차피 자신에게 가장 신경이 잘 쏠릴 것을 알기에 용왕진기를 더욱 거세게 발출시키며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당유혼은,
‘숨는다.’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치로 낮추었다.
“흑룡왕!!”
전신에 금빛 섬광을 두른 백경은 정면에서 팔초어 마수를 향해 박도를 휘둘렀다.
무수한 촉수가 그를 향해 닥쳐왔지만, 백경은 회피 따위는 모른다는 듯 오직 정면 돌파만을 강행했다.
덕분에, 팔초어의 여덟 촉수 중 일곱 총수가 그의 등 뒤로 몰린 틈을 타―
‘여기쯤인가?’
당유혼은 검푸른 기운을 휘감고 팔초어의 지척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일견하기에도 불안정한 육신. 핵에 대한 반응만 봐도 그게 사라지면 붕괴하는 것은 당연한 일.’
다시금 흑창(黑槍)을 만들어내 한 손에 단단히 틀어쥐고 쇄도했다.
하나 남은 촉수가 반응해 막아서지만, 고작해야 하나로는 막아낼 수 없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는데,
꾸물꾸물꾸물―
하나의 촉수가 팔초어의 여덟 다리처럼 쩍 갈라졌다.
그리고 갈라진 촉수들은 또다시 각기 여덟으로 분화되어,
‘육십사…….’
순식간에 수십으로 분화된 촉수들의 그림자가 당유혼의 머리 위를 뒤덮었으니,
‘아…….’
콰콰콰쾅!!
굉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