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상당한 간격을 두고 쌓아진 여덟 개의 석탑과 그 안으로 드리워진 거대한 운무.
한 치 앞을 들여다볼 수 없을 운무였으나, 그 안에서 가끔씩 터져 나오는 흑색의 번쩍임은 진법에 대해 무지한이라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군사. 내가 우리 군사를 절대 못 믿는 건 아닌데… 이거 진짜 괜찮은 작전 맞지?”
석탑팔문금사진(石塔八門金蛇陣).
육언이 부하들을 부려 만들어낸 광범위한 진법에 저 괴물을 끌어들이고 그곳에서 당유혼이 준비한 비장의 수법으로 결전을 본다.
그 간단명료한 작전은, 지금 돌아보니 상당히 불안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그에, 육언은 단호하게 답했다.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할 일을 다 하였다면, 이제 하늘의 뜻을 기다리면 될 일입니다.”
“그, 그래?”
그거… 얌전히 기다리면 된다는 거겠지? 맞겠지?
그때,
“대장. 저기 누가 나오는데요?”
마찬가지로 안개 속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흑사어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뭐? 지, 진짜잖아?!”
다들 우르르 몰려가 보니,
“뭐야, 구경났어요?”
몸에 걸친 의복은 다 찢어지고, 피땀으로 얼룩진 당유혼이 세상 졸립다는 눈빛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진짜, 진짜 돌아왔군.”
“기껏 놈의 목을 땄는데, 저 안에서 죽을 수는 없죠.”
그보다,
“바깥 상황은 어때요?”
“난리도 아니지. 사제… 흑룡왕 녀석이 마지막에 벌인 짓으로 수적들은 다 도망간 지 오래네.”
“우리 배는요?”
“다행히 남아 있네.”
그건 다행이구만.
“다 끝났나 보네요. 알아서 정리 좀 부탁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어, 어? 자네?”
“의원! 의원을 불러와라!!”
“미친놈아, 여기 의원이 어디 있어?!”
몰려오는 수마 끝에, 당유혼의 정신은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 * *
나는 잠들면 종종 전생과 관련된 꿈을 꾸기도 했다.
‘전생’이란 표현이 조금 어색하지만 뭐 어떻게 할까, 이제는 받아들여야지. 나는 환생이라 할지 전생이라 할지 몰라도 전혀 다른 육신에 영혼이 깃들게 되었고, 이전과 다른 존재로 태어나게 되었다.
뭐가 그렇게 다르냐면, 빌어먹을 처지가 달랐다.
‘예전엔 귀한 집, 귀한 가문에서 떵떵거리며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번거로운 일 귀찮은 일 밑에 놈들 다 부리고 살았는데…….’
이제는 정 반대가 되었다.
‘못난 집, 망한 가문에서 빌빌거리며 먹고 싶은 거 못 먹고 하고 싶은 거 못하고, 궂은일, 번거로운 일, 귀찮은 일 전부 다 내가 하고 있지.’
뭔가 잘못된 거 같지 않은가?
이게 진정 위혼이 녀석이 말한, 많은 힘에는 많은 책임이 따른다는 것일까?
모르겠다. 그때는 더 큰 힘이 있어도 이딴 책임 같은 거 없었던 거 같은데…….
여하튼, 그래서 이딴 궁상맞은 생각을 왜 하고 있냐면, 답은 간단했다.
‘꿈도 안 꿨고, 할 일도 없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아뇨, 됐어요.”
고급스러운 침실.
거지 같은, 아니, 그냥 거지인 사천당가에서는 꿈도 못 꾸는 침실에서 내 시중을 맡은 시비가 들어왔다가 다시 슥 하고 사라졌다.
달달한 향까지 풍겨오는 이곳이 어딘가 하나면, 바로 동정호에서 제일 잘 나가는 기루였다.
“…수로채 놈들. 대가리 먹으니 취급이 달라지는구만?”
한때 사천하면 사천당가를 나라님보다 먹어주듯, 동정호를 비롯한 장강 일대에서는 수로채만 한 게 없다.
구파일방이든 오대세가이든, 한번 놀러 왔다가도 떠나가면 그만인 그들과 달리 일평생 자손 대대로 눌러앉고 생업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장강 일대에서 장강수로채를 거스를 이들은 없다.
그렇기에, 그동안 쉼 없이 털리고 또 털리던 백경채는 지난번 최후의 전장에서 흑룡채를 잡고 장강수로채를 일통하며 이곳 동정호의 왕이 되었다.
동정호의 최고급 기루?
깝치지 마. 장강수로채는 신이고, 귀빈인 나는 무적이다.
“공자님. 식사 시간입니다.”
“…예, 거기 대충 놔주세요.”
물론, 그렇다 해도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이게 진짜 무슨 대우라냐.’
제대로 설명하자면, 나는 지금 장강수로채의 최고 귀빈으로서 동정호 일대 최고급 기루의 최상층에 머물며 요양 중이었다.
몸 상태가 워낙 개판이라 전담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다른 일을 하기에는 내 몸 상태만큼이나 장강수로채의 내부 사정이 개판이라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원래라면 내 몸 상태 내가 알아서 한다고 진작 사업 이야기 끝내고 돌아갔겠지만…….’
굳이 이역만리 타향인 이곳 장강까지 온 이유, 장강수로채와 연합하여 일대의 물류를 장악… 사천당가를 중추로 하여 거대한 상단을 만든다는 계획은 일시보류 됐다.
왜?
‘장강수로채가 이렇게 개판일 줄 누가 알았겠냐.’
솔직히 흑룡채가 나머지 장강수로 십칠채를 다 먹었으니, 흑룡채만 먹으면 나머지 몸통은 홀라당 삼킬 수 있을 것이란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쉽게 갈 수 있겠지… 싶었는데, 하늘의 지엄한 법도는 나의 그런 생각마저 날로 먹는 게 무엄하다 싶었는지 철퇴를 내려주었다.
‘흑룡왕 그 녀석이 제정신 아닌 것은 알았지만, 밑에 놈들을 이렇게까지 방만하게 놔두다니.’
장부 조작?
그딴 건 안 하는 게 비정상이었다.
밀수?
그건 정식 수입보다 더욱 빈번히 일어났다.
그래, 뭐 이 정도야 행정상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미친 새끼들. 노예 무역까지 손을 뻗어?’
여기서 중요한 건 매매가 아니라 무역이다.
노예 매매에 손을 대는 것까지는 수적놈들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 이해할 수 있다만 외국 노예까지 무역으로 건드릴 줄은 몰랐다.
‘그런 놈들이야 줄줄이 굴비마냥 엮어서 관청에 넘기기로 했다지만…….’
문제는 놈들의 본진에 남아 있던 다국적 노예들.
‘내가 아무리 사업하러 왔다지만… 그 꼴 보고도 내 사업 먼저 하자고 할 수는 없으니…….’
사람은 살리고 보자.
같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념으로 잡혀 온 이들을 풀어주고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나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행정력을 지닌 육언과 담화를 나눌 시간은 정말 요만큼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마냥 쉬고만 있는 것도 나쁘지 않기는 한데…….”
좀 전에 들어왔다 나간 시비가 가져다준 과일을 옴뇸뇸 촵촵찹 하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평화롭고, 또 평화롭다.
전생하고 이렇게까지 평화로웠던 적이 있었을까?
물론,
욱씬!
“…큭.”
사실, 마냥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 크르르…….
“가만히 좀 있어라, 이놈아.”
폭식종(爆食宗)으로 추측되는 마수, 그 팔초어를 닮은 놈을 먹은 뒤로 탐의 존재감은 더더욱 커졌다.
소화를 위해 똬리를 틀고 자신의 둥지에 처박혔음에도 그 울음소리가 다 들려올 만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긴 내상은 싹 다 내가 감내해야 했다.
‘분명, 소득은 컸다.’
마기마저 삼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나쁘지 않게 먹혀들었다. 실제로도 마수를 토벌하는데 마공이 확실한 역할을 했으니까.
하지만,
“한 번 쓰면 반쯤 불구가 되는 건 너무 대가가 심하잖아?”
처음보다는 분명 낫다. 그때는 요양만 몇 주를 했어야 하니까.
“그래도 이건 너무 부하가 심하잖아.”
수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 할 수가 없다.
‘무림 한복판에서 마기를 풀풀 풍기며 수련할 수는 없잖아.’
실전에 대비하기 위해 평소에 행하는 게 수련인데, 마기를 다루는 것은 어디 숨어 있을지 모를 마교놈들과 붙을 실전에서만 그걸 수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쯧쯧.’
결국 방법은 두 가지다.
이 악물고 실전마다 수련을 병행하거나, 중단전을 더욱 개발하여 그것으로 끌어낼 수 있는 힘을 늘리거나.
‘중단전은 제법 가능성을 봤단 말이지.’
최종 결전에서야 결국 하단전의 탐을 끄집어내야 했지만, 거기까지 힘을 보존하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중단전 덕분이다.
원래 탐을 사용하기까지 중간 단계가 없었는데, 이제 튼튼하고 건실한 중간 다리가 생긴 기분.
‘중단전 특유의 다양성 또한 무시하지 못하니까.’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중단전을 개방함과 동시에 오감이 확장되며 외부의 풍경이 기감으로 수집되었다.
상층.
아무나 올 수 없는 이곳 밑으로, 제법 유지라 불리는 이들이 담화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린다.
중층으로, 하층으로 내려갈수록 인구 밀도는 더더욱 짙어지고 곧 저잣거리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기척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응?’
개중 하나가 이쪽으로 똑바로 걸어오고 있으니,
‘아아.’
확장시켰던 기감을 거두어들이자 문 앞에 선 이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똑똑―
“공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서 오슈, 군사 나리.”
문이 열리며 등장한 인물은 장강수로채의 천재 군사 육언.
누가 뭐래도, 이번 전투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그는,
“엄청나게 피곤해 보이네.”
어째, 처음 봤을 때보다 몇 배로 수척해진 몰골이었다.
“…말도 마시지요. 흑룡왕이 얼마나 집단 운영을 엉망으로 하였는지. 그들과 전쟁을 벌일 때보다 지금의 행정 업무가 몇 배로 곤혹스럽습니다.”
무섭다, 문서 업무. 서류의 산이 사람을 찍어누를 수 있다더니…….
“혹시, 저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신 공자님께서 도와주실 생각은…….”
“아이고!! 머리야! 팔아! 다리야!! 흑룡왕과의 사투로 인한 부상이 재발을……!!”
“…예, 됐습니다. 힘드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휴, 살았다.
간악한 책사 육언의 귀계를 물리친 나는 다시금 그의 눈을 또렷이 마주 보며 물었다.
“큼큼, 미안하게 됐어. 그보다… 우리 일 이야기는 어떻게 되고 있을까?”
“운송 사업 말씀이시군요.”
그 말에 육언은 당장 답하기보다는 방 가운데에 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양손으로 깍지를 껴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힘듭니다. 많은 부분에서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제일 문제는?”
“조직 정비.”
“역시.”
장강수로채는 열여덟 수채의 연합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말. 더럽게 안 듣지?”
“예상은 했습니다만. 그 이상이더군요.”
하다못해 방계놈들도 빠락빠락 머리를 들고 대드는 게 인간이란 족속이다.
그런데 가뜩이나 무법 지대의 수적 놈들보고 이권과 관련된 명령을 내린다면?
“장강은 길고 또 길지요. 그나마, 백경채의 수채들이야 저희가 두려워 말을 들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공식적으로 총채주의 자리에 주군께서 오르셨으니까. 하지만…….”
“멀리 있는 놈들은 또 딴 주머니를 차려 하겠군.”
놈들은 흑룡왕이 힘으로 군림할 때도 제 잇속을 불리려던 놈들이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고, 두렵고 공포스러운 대상 밑에서도 그것이 빨딱빨딱 고개를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뭐, 사실 여기까지는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시간만 들인다면 감사를 보내거나 정신머리를 뿌리부터 개조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것입니다.”
근본 없는 수적 놈들을 교화시키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것.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지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쓸며 마른세수를 한 육언이 말했다.
“사람. 사람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