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모사재인(謀事在人).
사람이 일을 꾸민다.
삼인성호(三人成虎).
사람 셋이면 호랑이도 만든다.
오인일오(五人一汚).
사람 다섯 모이면 그중 하나는 오물 덩어리… 아, 이건 좀 아닌가?
‘여하튼, 사람이란 참 중요하지.’
무슨 일을 하든 기본은 사람이다.
작은 집단을 꾸리든 큰 나라를 만들든 사람이 있어야 무엇이든 할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사건은 결국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우선, 사람이 너무 없습니다.”
그리고 천재 군사 육언조차 그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괴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관료, 관리급이나 되는 인물은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하나, 기본적인 문사(文士)조차 없더군요.”
한숨 픽픽 쉬는 육언의 모습은 진짜 온갖 모진 고문을 다 거친 것 같았다. 듣자 하니 내가 요양 겸 이곳에서 쉬고 있는 근 이 주 동안 대부분의 업무를 혼자 해치웠다 했는데, 그 윤기 나던 흑발이 푸석푸석해지고 흰 머리가 조금씩 생겨난 것 같다.
나는 여기서 시비들이 깎아 주는 과일이나 우적우적 씹어 먹을 동안, 육언은 벽곡단이나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문서 업무까지 갈아 마셨다는 것이다.
내가 미안해, 흑흑.
효과 좋은 염색약을 만들어낸다면 꼭 챙겨줄게.
“음, 혹시 운송 사업을 할 상단이라면 내 쪽에 아는 게 있는데…….”
“광운상단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원래부터 제안할 것을 육언이 먼저 아는 체를 하더니 곧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부분까지 없었다면 저는 진작 입에 칼을 물고 뛰어내렸을 겁니다.”
그 정도로 격무(激務)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아, 안 돼!!’
직접 얼굴 맞대고 얘기 나눈 건 며칠 되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천재 모사가 얼마나 훌륭한 누렁이인지.
‘일 하나 맡겨놓으려면 내가 다섯 가지쯤은 미리 알아놔야 하는 놈들과 다르게, 열 가지쯤 던져놔도 알아서 잘 처리할 특급 누렁이.’
그런 누렁이를 쉽게 잃을 수는 없다.
“허허, 칼을 물다니. 같은 배를 타기로 한 시점에 그런 뾰족한 표현은 배 바닥에 구멍을 낼 수 있음을 모르시나?”
내가 집에 돌아가면 백 년근 산삼이라도 하나 보내줄게.
우리 집에 그런 거 많아.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몸에 좋은 걸 미끼로 열심히 꼬셨다.
살살 기고 꼬리까지 흔들어주니 그나마 나은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그래도 아직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모습.
‘제 잘난 줄 아는 천재가 이 정도 모습이라는 건 진짜 답이 없다는 건데…….’
보아하니 운송 사업을 벌이기 전, 각 수채를 운영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있지도 않을뿐더러…….’
“사람을 새로 구하기도 힘든가?”
“어느 정상적인 문사가 수적채에서 일하려 들겠습니까.”
“…하긴.”
새 사람 뽑기도 지난해 보인다.
‘답 없긴 해.’
장강수로채가 얼마나 개판으로 굴러왔는지, 그걸 새롭게 갈아버리려 하니 할 게 많다.
‘기강도 다져야 하지, 새 사람도 채워 놓아야 하지. 그런데 채워 놓을 사람이 또 없네?’
먹물 좀 먹었다는 놈들이 제정신 아니고서야 여기 오려 할 일이 없으니, 제아무리 세상천지 웅지를 펼치려는 문사들이 재야에 때를 기다리고 엎드려있다 한들 수적채에 오려는 이들은 없을 것… 없을 것…….
‘…아니, 있잖아?’
재야에 몸을 낮추고 있지만, 내 말 한마디면 들불처럼 일어나 나서줄 이들이.
“잘하면, 방법이 있겠는데?”
“예?”
고개를 번쩍 들며 외친 내 말에 육언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법이… 있다고?
“진심이십니까?”
“있어. 분명 있어 군사 나으리.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몇 가지 선결 조건만 갖춘다면…….”
우선 필요한 것들을 말했다.
그것들을 전해 들은 육언의 표정은 오만가지 감정으로 천변만화했지만, 작은 희망이 샘솟는 게 눈에 띄었다.
“그게 진정이라면… 급한 불을 끌 만하겠군요. 다만, 시간이 좀 걸리겠군요.”
톡톡― 책상을 두드리는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들린다, 들려. 열심히 머릿속 주판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좋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 긍정적인 답안이 도출되었는지 육언은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다음 안건입니다.”
“또 있어?”
“예. 그 역시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생긴 문제. 그다음은 또 사람이었다.
“이번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 아, 설마?”
“예. 수적들에게 잡혀 있던 노예들. 그들에 대한 처치가 곤란합니다.”
“아…….”
다음 문제도 또 사람 골때리게 했다.
“수적들에게 잡혀 있던 노예들 중에는 국내 외에도 국외에서 잡혀 온 이들도 많습니다. 그나마 국내라면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제시라도 해주겠지만…….”
“국외라면 힘들겠지.”
인도적(人道的)인 절차에 따라 가급적이면 노예들이 온 곳으로 돌려보내 주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백경채가 어지간한 정파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인도적인 정의를 따르는 집단이라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해외에서 팔려 온 이들이라면… 애초부터 노예 신세로 끌려온 이들인가?”
“그렇습니다. 때문에, 저희 쪽에서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 해도…….”
“돌아간들 좋은 대우 받기는 힘들겠지.”
곤란하다, 아주 곤란하다.
“이 일대에서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것은?”
“해봤습니다. 다행히 그들 중 일부는 한어를 알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원하는 이들이라면 새롭게 태어날 장강수로채에서도 일자리를 알아볼 수 있게 알선해 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빌어먹을 수적놈들. 하여튼 좋은 꼴을 못 보는군.”
정상적으로 머리 박힌 이들 중 자신들이 납치당한 수채가 우리 이제 새롭게 태어나요! 하고 영업을 하려 해도 좋게 믿는 이들이 어디 있을까?
“끙…….”
이건 또 이것대로 답이 없네?
‘어쩔 수 없네.’
“그쪽도 내가 한번 대화를 나눠 볼게.”
“그래 주시겠습니까?”
“어쩌겠어.”
이미 장강과 우리는 사업 공동체다.
‘여기서 일이 막혀 있으면, 내가 생각한 장강 운송 사업도 그만큼 지체되겠지.’
사실 육언은 여기까지 예상하고 내게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닐까?
합리적 의심이 들었지만, 그 이상 왈가왈부하지는 않았다.
“그럼 내가 말한 대로 차례대로 일정을 좀 맞춰달라고.”
이 주일 동안 쉬었으면 많이 쉬었지.
이제 다시 업무의 늪에 몸을 맡길 시간이다.
* * *
우리의 천재 모사 육언은 올 때는 얼굴에 먹구름이 가득했으나, 갈 때는 햇빛이 쨍쨍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당연하지, 앓던 이를 뺏으니 얼마나 속 시원하겠어?
자, 그럼 다시 나의 업무가 시작되었는가.
그건 또 아니었다. 앞으로 만남의 장이 여럿 계획되어 있지만 그전에 만날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몸은 좀 괜찮은가?”
이곳 집주인이었다.
“뭐, 그럭저럭이죠.”
백경.
그가 근 이 주일만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왜 이제서야 찾아왔냐고 따지고 싶지만… 뭐, 그 표정을 보니 대충 결정을 내린 듯하네요.”
백경은 항상 쾌활하던 모습과 달리 지금은 꽤나 수척한 인상이었다.
“꽤 마음고생을 하신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에 백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항상 쾌활하던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씁쓸한 미소였으나, 그간 일어난 일은 제아무리 긍정적인 이에게도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겠지.
“…군사가 따로 꺼낸 말이 있나?”
“그럴 사람 아닌 거 알잖아요.”
“큭… 아닌 척해도, 나를 그만큼 배려해 주는 이를 찾기는 또 힘들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될 때까지 가만 기다리고 있자, 육언이 앉았던 책상에 똑같은 자세로 걸터앉은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예상한 대로일세. 나의 사제… 흑룡왕, 그리고…….”
마지막 말은 차마 뱉기가 힘들었던 것인지, 이전보다 꽤 긴 침묵을 사이에 두고 뱉어냈다.
“마인(魔人), 구일천에 대한 건일세.”
마인.
등장했다 하면 정사를 막론하고 최우선 척결 대상으로 삼는 존재.
그 이름을 언급하는 백경은 꽤나 괴로움이 짙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솔직히, 마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네. 그때 그가 보인 모습은… 도저히 사람 같지 않은 것이었으니까.”
“실제로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자네는 무언가를 아는 기색이었지.”
괴로움을 겨우겨우 떨쳐낸 백경이 물었다.
“대체…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마수(魔獸)예요.”
저주받을 이름, 저주받을 존재.
“그리고, 그때 나타났던 것은 마교(魔敎)의 일곱 종파. 그중 폭식종(爆食宗)의 마수였죠.”
“폭식종…. 하면, 일천이는… 원래부터 그런 존재였는가?”
“그가 원래 마교 소속인지, 혹은 마인이었는지, 또 아니면 인간 아닌 존재였냐 묻는다면… 제가 답할 수 있는 건 하나예요.”
그 양반이 골수 마교도인지, 아니면 변절한 첩자인지는 모른다.
다만,
“인간은 맞았어요.”
사람 같지 않은 짓을 하긴 했어도, 그는 분명 사람이었다.
목을 베고, 심장을 뽑으면 죽는 사람.
그걸 어떻게 잘 아냐면,
“제가 직접 확인해 봤으니까.”
“….그런가.”
탄식하듯 백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동안 눈을 짚고 있던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가 말했다.
“미련이 남으시나요?”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사람 좋은 백경이다.
구일천이 삐뚤어지고, 가족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사람 가죽 뒤집어쓰고는 못할 짓들을 벌였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한때 가족같이 지냈던 녀석이니까. 그런 녀석이… 어쨌거나, 한대는 사람이었던 놈이… 사람이라면 못할 짓을 하다가, 사람도 아니게 되어 그렇게 죽어버렸구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다고.
씁쓸히 본심을 고하는 백경의 모습을 보자니, 당유혼 역시 속이 편치는 못했다.
‘엇나간 가족 놈의 최후를 보는 것은… 어느 쪽이든 좋지는 못하지.’
가만히 그의 애도 아닌 애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백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흔들리는 촛불과 같아도 그 안에서 명멸하는 불빛의 선명함은 결코 옅어지지 않은 눈빛.
고난과 역경을 디디고 마침내 자신의 길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속으로 한때 가족이었고 아우였던 이를 묻으며 말했다.
“하면… 그 녀석에게 잘못된 길을 제안한 이는… 마교(魔敎)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죽기 직전 흑룡왕이 변명하듯 뱉은 말.
살고 싶어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추악한 변명일 수도 있지만…….
‘녀석의 주제에 맞지 않게 얻은 분에 넘치는 힘. 그건 홀로 얻을 수가 없는 힘이지.’
인간이 마수가 되는 수법이라니. 그건 한창 현역일 때도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다.
즉,
“어떤 방식이든, 마교가 그에게 접근했겠죠.”
“그런가…….”
우물쭈물.
답지 않게 몇 번이나 고민하는 백경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고백했다.
“사실은… 말해줄 게 있네. 이것은, 장강수로채 내에서도 나밖에 모르는 일이지.”
“흥미롭네요. 그게 뭔데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지.”
오로지 그만 알고 있는 비사.
백경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며 그것을 입에 담았다.
“삼십 년 전에 멸문을 맞이했다던 마교는 말일세.”
사실은,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