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백경채가 흑룡채와의 대전에서 승리를 한 뒤로도 몇 주의 시간이 흘렀다.
육언을 비롯한 머리 좀 쓰는 이들은 전부 맷돌에 넣은 콩마냥 갈려 나가며 업무에 이리저리 치였다.
그러는 와중에 슬슬 고개를 드는 놈들이 있었으니, 바로 흑룡채 밑에 빌붙어 있다가 백경채에 거하게 깨졌던 다른 장강의 수채주들이었다.
처음에는 육언이 특히나 악질인 놈들은 솎아 내는 등 칼춤을 닐리리야 추어댔기에 다들 입 꾹 다물고 쥐 죽은 듯이 지냈지만, 그래도 수채가 기본적인 뼈대는 갖추어야 하기에 남겨 놓은 이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당연한 말이었다.
장강십팔채가 유지되려면 몇 정도는 남겨둬야 했고, 그동안 워낙에 해 처먹어 남은 구멍을 메우기 위해 육언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덕분에 경계와 탄압이 줄어드니 다른 수채의 수적들은 하나둘 깨달은 것이다.
‘아, 우린 못 건드리는구나?’
머리가 크면 부모에게도 대드는 게 인간이라고, 적당적당히 여기저기 찔러보며 간을 보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자신들의 자유가 허가됐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렇게 그들 나름대로 물밑 작업을 시작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수채주들에게 소환 명령과 함께 초청장이 배부되었다.
말이 소환 명령이지, 초청장에는 육언의 직인과 함께 무척이나 공손한 필체로 그들을 연회에 초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백경채가 장강수로채의 지배자가 되고 처음 내리는 소환 명령이었기에 다른 채주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초대 장소인 어느 섬으로 모여들었는데, 그 자리에는 연회 음식들이 쫙 깔려 있었다.
평소 그들도 쉽게 접하기 힘든 음식과 술들로 그득한 것을 보며 채주들은 박수를 쳤다.
“으하하, 육언 녀석. 이제는 현실을 깨달았나 봅니다!”
“암암, 놈이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우리 없이 장강수로채가 굴러가겠습니까?”
껄껄 웃는 그들은 흑룡왕 산하 때보다 더욱 긴밀해져 있었다.
흑룡왕이야 수틀리면 사람 머리 으깨버리는 폭군이지만, 육언은 그보다 현실적이게 조직을 굴리려 하는 사람인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파 족속이란 원래 누구보다 사람의 물렁한 부분을 잘 파고드는 종족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비록 육언과 백경채가 흑룡채에 승리를 거뒀으나 오히려 현실적인 부분과 제약으로 그들이 더 만만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저마다 이 자리의 주인인 육언이 오기도 전에 술과 고기를 탐하고 있는데,
“에잉? 뭐야, 술이 다 떨어졌잖아?”
“여봐라! 술 더 없느냐?!”
“이거이거 준비가 왜 이래?”
술은 금세 동이 나 버렸다.
처음에야 경계하듯 한 잔, 두 잔 목을 축였을 뿐이지만, 제법 취기가 얼큰하게 돌고 분위기 자체가 승자들의 잔치가 되어가니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술을 동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거칠게 술잔을 바닥에 내던지는 이들이 속출할 때,
“아하, 술을 찾으시나?”
“그래! 술을 더 가져와… 쿠엑!!”
콰아아앙!!
잔뜩 취한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던 채주 하나의 머리가 탁자에 처박혔다.
“웨, 웬 놈이냐!!”
“웬 놈? 내가 네 친구냐, 이 새끼야!”
뻐엉―
발작적으로 일어난 채주를 걷어차며 한 명의 인영이 홀연히 음식이 가득한 식탁 위에 올라섰다.
채주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 자신들의 병장기를 쥐려 할 때, 누군가 하나가 상대방의 주변에 감도는 검푸른 기운을 알아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허어억, 흐, 흑의귀?!”
“흑의귀… 흑의귀다!!”
‘흑의귀(黑衣鬼)? 그건 또 뭔 개소리야?’
갑자기 살아 있는 귀신이 되어버린 당유혼이 인상을 팍 찌푸릴 때 누군가의 부연 설명이 귀에 꽂혔다.
“흑룡왕의 목을 벤… 흑의의 악귀!!”
‘아아, 난 또 뭔 소리라고.’
그날의 생존자들이 있었다.
흑룡왕에게 최후를 선사할 때야 석탑팔문금사진 안이었지만, 그전까지 몰아붙일 때 자신은 검푸른 기운을 전신에 둘러싸고 난리를 피워댔으니 저런 별명이 붙는 것도 이해가 갈 만했다.
‘그래, 어차피 이제부터 할 것에 도움이 됐으면 됐지, 방해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대중 고개를 끄덕인 당유혼은 자리에서 일어서 걸음을 떼었다.
만찬과 미주가 차려진 식탁을 그대로 짓밟으며 상석의 앞까지 걸어간 그는 상석에 앉지 않고, 상석 쪽 탁자 위에 양반다리를 하며 턱― 하고 엉덩이를 가져다 대었다.
모든 수채들의 시선을 강탈한 건 덤이었다.
“자, 우리 흉악하고 사악하고 치졸하고 치사한 수적의 채주님들. 그동안 즐거웠지? 우리 착한 군사 나리가 차마 건드리지도 못하니까 막막 고개가 들리고 어깨가 으쓱으쓱 춤을 추셨지?”
그런데 어쩌나.
“그거 다 꿈이야. 이제 슬슬 깨어날 시간이거든.”
무자비한 폭언.
그야말로 안면에 찬물을 들이붓는 선언에 정신이 번쩍 든 채주들이 허겁지겁 목소리를 내었다.
“자, 잠시!”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법? 내가 뭘 했는데?”
“그, 그건…….”
딱히 뭐라고 아직 입을 뗀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런 게 있지 않은가. 끝까지 듣지 않아도 결말을 다 알 것 같은 그런 기분. 딱 봐도 가만 놔두면 큰일 날 것 같은 기분에 목소리를 냈던 수적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우물쭈물했다.
그 틈에 당유혼이 말을 이었다.
“됐고. 이제부터 너희들은 수적 일을 때려치운다.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거야. 장강수로표국으로.”
“자, 장강수로표국?”
뭘까, 이 대충 지은 듯한 이름은.
아니, 애초에.
“저, 저희보고 표사가 되라는 것입니까?”
“어떻게 저희가 표사 따위를……!”
지난번 당유혼이 펼쳐낸 살겁을 똑똑히 본 그들이지만, 동시에 육언이 자신들로 인하여 전전긍긍하는 것도 본 그들이었다.
지난번이야 전시였기에 그 살겁을 일으켰지만, 이제 다시 신생 장강수로채를 운영할 이가 그럴까 싶어 뻗대는 것이다.
‘다 보인다, 보여.’
물론 그 속을 다 읽고 있는 당유혼은 굳이 일일이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하던 말을 이어 갔다.
“장강수로표국의 기업 경영 방침은 간단해. 열여덟 수채들을 핵으로 하여 장강 전체를 잇는 거대한 물류의 장악. 중원의 모든 물자가 장강수로표국을 지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것이지. 당연하지만, 그로부터 돌아올 이권도 막대하겠지?”
“……?!”
그 말에 채주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흔히 수적이라 하면 멍청하고 야만적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뭐… 대개는 맞는 말이지.’
못 배워 먹은 무식한 놈들이 주로 해 먹는 게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수적이나 산적, 마적 등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놈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 우두머리 위치까지 오르려면 그때부턴 이야기가 달라진다.
‘멍청한 놈은 살아남을 수 없지.’
타고난 영악함과 실전을 겪으며 쌓인 연륜. 그것들이 채주라는 족속들인 만큼,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당유혼이 그린 청사진 속 자신들의 주머니에 떨어진 이권들이 빠르게 계산되었다.
“자, 잠깐…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표국이라니… 표국은 기본적으로 신뢰가 아닙니까!”
누군들 장강을 지배하고 그 물류를 장악하는 것을 꿈꾸지 않은 이가 있을까?
동시에 그게 꿈이라는 걸 확실히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표행은 결국 자신의 소유물을 타인에게 믿고 맡기는 일.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수적 출신들에게 자신의 짐을 맡기겠습니까!!”
자신이 그 수적놈들이라서 더더욱 잘 아는 합리적인 추측.
그 말에는 당유혼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치. 보통은 안 되지. 하지만 기존 상단 예하로 들어가면 어떨까?”
“기존 상단?”
“대황상 광형상단. 요즘 사천이랑 감숙을 잇는 신생 중고 대형 상단인데… 아시려나?”
그게 뭔 개소리야?
채주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신생, 중고, 대형… 적절하게 상반되는 단어들의 연속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져 왔지만…….
“잠깐, 광형상단? 그게 흑의귀의 소유라고?”
개중에 그 이름을 아는 이가 몇은 있었다.
“자네 뭐 아는가?”
“자네는 반대쪽에 있느라 모르겠지만, 사천 인근에서 활동하는 채주들은 알 걸세.”
“나도 들어는 봤네. 사천삼주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미친 신생 상단이라고…….”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니 여론의 방향도 바뀌었다.
이래저래 말들은 많았지만,
‘이거… 어쩌면 가능할지도?’
가능.
그 신이한 단어가 머릿속에 새겨지자 자연스레 그들의 머릿속에 주판알이 굴러갔다.
‘이 모임 자체는 육언이 만들었다.’
‘즉, 육언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항이란 뜻이지.’
‘우리야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겠지만… 육언이라면……?’
자신들에 대한 불신과 육언에 대한 맹신.
그것들이 합쳐지자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이권에 대한 탐욕이었으니,
“그럼… 그, 저희 수채들을 물류의 연결 지점으로 쓴다는 말이신지……?”
“어허, 수채라니. ‘지부’다, 지부.”
“아, 그쵸. 헤헤, 지부입죠! 저희는 이제 채주가 아니라 지부장이고.”
은근슬쩍 자신들의 지휘권에 대한 보장을 말하는 채주들이었지만,
“그렇지.”
당유혼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한술 더 떠서.
“그리고, 거기서 너희가 적당히 해 먹기만 한다면… 나는 눈감아 줄 수도 있고 말이야.”
그 이후의 것까지 논했다.
“나는 우리 군사 나리랑 같은 사람은 아니거든. 사람이 어떻게 뒷주머니 안 챙기고 싶겠어? 욕망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겠냐고.”
‘…응?’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다들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왜냐면, 그 말은 당유혼이 그들이 적당히 뒷주머니 차는 것을 인정해 준다는 이야기였으니까.
덕분에 그들의 단꿈이 부풀어 오를 때,
“그런데 말이야.”
욕망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기는 한데,
“그놈의 욕망이 또 겁대가리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거든.”
짝짝―
박수를 두어 번 친 당유혼이 모인 채주들 중 하나를 가리켰다.
“자, 내가 이제 사람이 하나 거꾸러지게 해볼게?”
“예?”
“그 무슨…….”
“얍!”
“꾸에에엑!!”
경쾌한 외침과 함께 채주 하나가 피를 토했다.
오늘 먹은 만찬이 무엇무엇이었는지를 골고루 보이며 피까지 한 사발을 토해 낸 채주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부들부들 떨었다.
“뭐, 뭣……?”
“설마… 독?!”
그제야 정신을 차린 채주들이 허겁지겁 헛구역질을 하려 했지만,
“어허, 이제 와서 토한다고 되나. 이미 실컷들 먹었으면서.”
실컷 먹었다고?
설마!!
“수, 술과 음식에?”
“응, 맞아.”
당유혼은 상큼하게 웃으며 그들의 추측에 긍정의 답을 내려주었다.
“나는 또 생각하거든. 사람이란 짐승만큼 믿을 만한 놈이 없다고.”
“이, 이이 미친……!!”
“어? 욕하네? 또 보여줄게, 얍!”
“꾸에에에엑!!”
손짓 하나만으로도 이미 주입된 독을 발동시킬 수 있는 위대한 경지에 든 독인, 그게 바로 당유혼이었다.
순식간에 두 명이 거꾸러지자, 처음 처맞아 기절한 수채주 하나를 제외한 열세 명의 채주들이 바짝 얼었다.
“보자, 흑룡채는 우리 쪽에서 사람을 파견할 테니 됐고.”
하나하나 꼼꼼히 얼굴을 기억한 당유혼이 씨익 웃었다.
“니들이 먹은 건 그냥 독이 아니야. 두 달마다 정기적으로 진정제를 먹지 않으면 발작하는 극독이지.”
그것도, 무지하게 아프게.
뒷말까지 친절하게 덧붙인 당유혼의 모습에 채주들은 깨닫고 말았다.
자신들의 목숨이, 저 미친 흑의귀에게 저당 잡히고 말았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