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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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별삼일즉갱괄목상대(士別三日則更刮目相對)라는 말이 있다.
헤어져서 사흘 만에 만나게 되면 눈을 씻고 다시 보아야 한다고, 방계들에게 바라는 게 딱 그 짝이었다.
‘사흘 만에 봐도 눈을 씻어야 되는데, 그렇게나 많이 못 봤다면 정말 많이 변해 있어야겠지?’
흐흐… 하고 침을 흘리며 웃는 당유혼의 모습은 누가 봐도 광인의 그것에 적합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합당한 감정의 흐름이었다.
‘명색이 대형이라는 내가 그렇게 구르고 다녔는데, 이놈들이 그 정도도 안 변해 있다면?’
마, 그땐 내가 깡패가 되는 거야?
콰앙―
“이리 오너라!”
사천당가.
누가 보면 남의 집 문인 듯 그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들어선 당유혼은 단박에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딱 처음 마주치는 놈부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쥐어패 주겠다는 의욕이 활활 담긴 눈빛.
한데, 그에 포착된 인물들은.
“엇? 대은인(大恩人) 아니십니까!”
설마 난동꾼인가 싶어 호다닥 달려온 인물은 당유혼을 발견하고 세상 감사함이 담긴 눈빛을 반짝인다.
자기 가족들 쥐어패는 건 잘해도, 이렇게 낯선 이의 호의에는 또 머쓱해하는 당유혼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어… 그러니까 이름이…….”
“아, 죄송합니다! 붉은 바위 일족의 적공입니다!”
한족과는 다른, 붉은 바위 일족의 이민족이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어… 그쪽이 왜 경계를 서고 있어요?”
사천당가는 사실 별달리 입구를 지키는 호위를 두지 않았다.
치안하면 전 중원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천성 내부에 있기도 할뿐더러, 당가에 인구 자체가 적어서 그딴 거 세워 둘 여력이 없어서기도 했다.
그래서 당번을 하나씩 뽑아 입구에 세워 두거나 근처를 순시하도록 하게 했는데, 그건 결국 방계들의 역할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붉은 바위 일족의 적공이 여기서고 있다?
“아니, 설마 이 새끼들이 짬 처리를?!”
머릿속에서 불쑥 떠오른 생각은 당연히 그런 쪽의 의문.
소수 민족이라고, 얹혀사는 신세라고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떠맡긴 것인가?
“이 어린노무 새끼들이 어디 벌써부터 그런 짓거리를!!”
무공이고 나발이고 오늘 인성 교육부터 다시 시켜야겠구나.
금일을 복날로 잡은 당유혼이 흉흉한 살기를 드러내자 깜짝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적공이었다.
“아이고! 대은인,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게 아닙니다!!”
“놔봐요. 내가 사람 차별하는 것 못 보거든요? 지들이 뭐 남궁세가야? 어디 사람 차별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정말 당적지무(唐赤之武)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엥?”
당적지무?
그건 또 뭐야?
자신보다 훨씬 체구가 큰 적공이 매달리다시피 했음에도 쌀 포대 끌듯이 앞으로 쭉쭉 걸어 나가던 당유혼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이때가 기회라고 적공은 허겁지겁 설명을 시작했다.
“대은인께서 가문을 떠나시고, 저희 붉은 바위 일족과 당가의 분들끼리 함께 정기적으로 시작한 교류 행사입니다! 그, 그러니까 저희의 비술과 방계분들의 무공을 함께 경연하는 건데…….”
가만 놔두면 난리가 난다고 십 할 확신하는 적공은 어떻게든 당유혼의 분노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손발 다 들어가며 광대 저리 가라 할 수준의 노력을 보이자 당유혼도 들끓던 분노가 잠잠해지고, 동시에 오호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개개인으로 붙는 게 아니라 집단전으로 붙는다?”
“예, 그렇습니다. 해서 그날은 저희 붉은 바위 일족에서 대신 이렇게 당번을 돌아드리는 거지요.”
붉은 바위 일족도 소수 민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른세 명의 차양당 방계들보다는 수가 많다.
그리고 그 소수 민족이 한 가문 내에 터를 잡게 되자 제아무리 장인 일을 돕는다고 하지만 정말 그것만 하기에는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암만 우리가 장인으로서 노동력을 제공한다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받은 것은 너무나 많다. 안심하고 살아갈 땅을 받은 것은 물론, 당장 굶어 죽을 위기에서도 벗어났고, 온갖 기반을 제공받았다. 그렇다면, 남아도는 노동력이라도 더욱 제공해야 하지 않겠나?”
적웅의 말에 반대할 이들은 없었다.
사실 붉은 바위 일족 자체가 당가에 가지는 감정은 하해와 같은 고마움이었고, 기꺼이 자신들이 그것을 먼저 제안했다.
오히려 괜히 자신들의 일을 떠넘기는 게 아닌가 싶어 거부 반응을 보인 게 방계들이었지만, 이렇게 당적지무가 열리는 날만큼은 그래도 붉은 바위 일족이 대신 근무를 서게 되었다.
“이제 곧 시작할 듯합니다. 제가 안내해드립니까?”
“흐음… 아니, 그건 됐어요.”
자기 집 안내를 다른 집 사람에게 받는 것도 우스운 일.
대충 위치만 전해 들은 뒤 당유혼은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붉은 바위 일족의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
‘오호라.’
두 편으로 갈라선 진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중원에 이런 말이 있다 들었소. 사별삼일즉갱괄목상대(士別三日則更刮目相對)라. 당주의 기도가 또 달라지셨소이다.”
붉은 바위 일족의 선두에 선 것은 당연하게도 적웅.
그가 부리부리한 안광을 빛내며 말하자 맞은편에 있던 당지명이 웃으며 맞받았다.
“이주 전 대전사께 그리 쓴맛을 보았는데, 어찌 절치부심(切齒腐心)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지간한 경우에서라면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그의 전신에서 승부욕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패배에 대한 분함이라기보다는, 더 나은 것으로 향하기 위한 향상심(向上心)에서 나온 발로인 것을 알기에 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훗, 우리 또한 놀고 있지만은 않았소.”
“물론 그러시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당적지무는 이주에 한 번 이루어진다.
길다면 길고 짧으면 짧은 간극을 두고 이루어진 그간 당적지무의 결과는 사십구 전 이십사 승 이십오 패.
딱, 일 패 차이로 밀리고 있는 차양당 방계들은 투지를 활활 불태웠고, 양쪽의 인사를 끝낸 뒤 심판을 맡은 이의 신호를 필두로 당적지무가 시작되었다.
“먼저 가리다. 혈웅(血熊)이시여!”
그리고, 그 시작은 어느새 숫자를 불린 일백의 전사들을 이끄는 붉은 바위 일족의 대전사 적웅이 되었다.
쿠웅!!
그를 중심으로 하늘로 기둥 같은 것이 생겨나는 듯하더니 붉은 기운이 전신을 뒤덮고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등 뒤로 거대한 형상이 어리기까지 하는 것이, 그 모습을 본 당유혼은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찼다.
‘눈 씻고 다시 볼 상대는 저쪽이었나?’
저 아저씨는 그사이 대체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었는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배는 강해져 있었다.
두 집단 사이에는 스무 장의 거리가 있었지만, 순식간에 그 거리를 좁힌 적웅이 달려들었다.
말 그대로 미친 곰이 달려드는 듯한 광경은 정상인이라면 공포에 질려 얼어붙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방계들에게는 그 미친 곰한테도 당당히 맞서 싸울 이가 있었으니,
“불퇴야!”
“예압!”
그 미친 곰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드는 당불퇴가 바로 그러했다.
“당가의 푸른 야수, 당불퇴가 간… 꾸엑!!”
콰앙!!
폭음이 울려 퍼지며 당불퇴는 달려든 속도보다 두 배쯤 빠르게 날아가 돌담에 처박혔다.
그래도 덕분에 적웅의 돌격은 멈출 수 있었다.
“크르르르…….”
자신의 돌격이 다른 힘에 의해 강제로 중지되자, 적웅은 성난 곰처럼 울음소리를 흘렸고 당지명은 그 앞으로 걸어가며 두 손을 양쪽으로 확 펼쳤다.
반짝―
그와 동시에 적웅의 눈에 허공에 무언가 번쩍거리는 게 보였다.
그것은 워낙 가늘어 잘 보이지도 않는 선이었지만, 결코 그것을 우습게 볼 수 없었으니,
“크릉!”
황급히 뒤로 물러나자 그가 서 있던 자리가 화약이라도 터진 듯 콰쾅!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갔다.
천년혈주에게서 얻은 거미줄을 가공하여 휘두른 은사가 광포히 작렬한 것이다.
‘시작해 볼까.’
첫 공격은 유의미한 피해를 입히지 못했지만, 당지명의 반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의 열 손가락 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에 묶여 있는 은사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콰과곽, 콰과과곽!!
그것은 마치 열 가닥의 채찍이 동시에 휘둘러지는 것만 같았다.
얇고 가는 은사 하나하나에 강기를 두르고, 그것을 또 하나하나 조종할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른 당지명의 은사 공격은 잘 보이지도 않는데 강력하기까지 했다.
“크르릉!!”
계속해서 물러서던 혈웅은 기껏 좁혔던 거리가 다시 다섯 장까지 벌어졌을 때 무언가를 결심한 듯, 이를 악물더니 정면을 향해 뛰어들었다.
‘이런?’
그에 놀란 당지명이 움찔했지만, 적웅은 더욱 붉은 기운을 두텁게 하며 두 팔을 휘둘렀다.
휘리릭!
매서운 소리와 함께 은빛 바람을 만들던 은사들이 적웅의 두 팔에 휘감겼다.
‘헛!’
힘을 더 주면 양팔을 난도질해 버릴 수도 있을 만한 상황이라 여겼건만, 이제 보니 그것도 어려워 보였다.
‘또 저 비술인가?’
호신강기보다 더욱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붉은 바위 일족의 비술을 마음껏 발휘한 적웅은 은사들을 자신의 양팔에 휘감은 체 붉은 기운을 내뿜어 불태워 버렸다.
순식간에 자신의 한 수가 무효화됐지만, 당지명은 오히려 짙게 웃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줘야지.’
동시에 적웅 역시 버럭 소리쳤다.
“일족의 전사들이여!! 전면전을 시작한다!!”
“오오오!!”
“오오오오오!!”
우두머리끼리의 일합이 이제 막 끝났으니, 이제 시작될 것은 양 세력의 본격적인 충돌!
붉은 바위 일족의 전사들이 본격적으로 비술을 발동시키자 장내에는 거대한 파동이 흘러넘치며 붉은 파도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두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삼재진을 발동시킨다!”
그에 질세라 지켜보고 있던 방계들 역시 삼재진을 발동시켰다.
순식간에 붉은 바위 일족이 가져갔던 전장의 기류가 방계들에게로 넘어왔다.
‘시작이군.’
그간 당적지무에서 수없이 당해 왔던 삼재진이 발동되었다.
‘이건 당해도 당해도 모르겠구나.’
그간 차양당 방계들은 붉은 바위 일족을 한 가족이라 여기고 그들이 아는 것들은 대부분 알려주었다.
개중에는 삼재진도 있었으나, 도대체 그게 어찌 돌아가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다른 가르침을 파고들었다.
무공(武功)이었다.
“오오오오오!!”
전신을 뒤덮은 붉은 기운이 훨씬 효율적으로 전신을 휘몰아쳐 주먹 끝에 맺혔다.
그 강격을 받아 내기 위해, 어느샌가 한쪽 벽에 처박혔던 당불퇴가 마주 달려 나와 주먹을 마주 내뻗었다.
콰아아앙!!
묵직한 굉음.
적웅의 두 눈에는 보였다.
자신과 마주 주먹을 부딪친 당불퇴의 주먹에 휘감겨 있는 검푸른 기운.
그것은 분명, 자신들의 일족이 ‘비술’이라 부르는 것.
중단전을 개방한 당불퇴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