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154화 (154/350)

151화

기이한 기류가 장내를 감싸 안았다.

그것이 삼재진이란 것을 붉은 바위 일족의 전사들은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또 이건가?’

‘이건 당최 적응이 안 되는군.’

짙은 운무가 깔리며 감각이 뒤엉켰다.

몸이 무거워지고, 어지럼증이 생겨나고, 방향 감각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그동안 질리도록 당한 삼재진이 발동된 것이다.

‘그나마 이게 많이 봐준 거라던가?’

전해 듣기로 원래라면 이 운무에 짙은 극독이 섞여 있더란다.

그나마 살상을 금하기에 그런 능력들은 싹 다 제외했다지만,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 남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황은 어지러웠다.

머릿수도 세 배나 많고 개개인의 근력과 체력 등 신체 능력만 따지면 우위인 붉은 바위 일족을 가장 크게 곤란케 한 것이 바로 이 삼재진이었다.

‘시간을 끌면 무조건 진다.’

장기전으로 갈수록 전세가 불리해진다는 것은 이미 질리도록 경험한 사실.

이제 전사 비율이 붉은 바위 일족 총인구수 비율 대비 육 할이 넘는 수준이 되었지만, 개중에서도 최전선에 선 적무기는 적웅 다음으로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내가 먼저 길을 뚫는다!’

붉은 기운이 적무기를 감싸며 삼재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일족의 전사들이 뒤따라 돌진했고,

슈슈슉!

저돌맹진(猪突猛進)하는 그들을 반기듯 수십 개의 투사체들이 날아들었다.

‘왔군!’

‘또 이것인가?’

그것은 젓가락이었다.

당가의 암기 대부분이 마찬가지로 살상력이라는 이유로 봉인되었기에, 천골저(穿骨箸)라 불리는 나무젓가락들이 대신 기용되었다.

하지만 단순 젓가락이라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이름 그대로 ‘뼈를 뚫는 위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압!!”

“크압!!”

그들의 손이 움직였다.

예전에는 투박한 직선 일변도의 움직임만을 보이던 그들의 손놀림이 이제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드는 젓가락들을 쳐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전진은 멈춰져야만 했고, 방계들과의 거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멀어졌다.

‘갉아먹기 전략이구나!’

자신들이 다가가려 할 때마다 젓가락 세례로 돌진을 지연시키고 그사이 이리저리 위치를 바꿔 거리를 유지한다.

삼재진의 공능과 젓가락 세례가 연이어 체력을 깎아 먹는 것이 주요 전략인데, 저 젓가락이 다 떨어지기를 바라려 해도 한 사람당 못해도 수백 개씩 챙길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먼저 떨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전사들의 체력이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적무기는 이를 악물고 다시금 거리를 좁히기 위해 돌진했다.

그를 반기듯 천골저 세례가 퍼부어졌지만, 이제 몇 개 정도는 타격당하더라도 곧장 뚫고 가기로 결정했다.

퓨퓻!!

살가죽이 찢기고 피가 솟구쳤지만 적무기는 상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러자 짙은 운무 사이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흐…….”

그의 앞을 틀어막은 것은 방계들 중 기골이 장대한 편에 속하는 이였다.

전신에는 검푸른 기운을 뒤덮고 있는 것이 붉은 기운을 뒤덮고 있는 적무기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형세였다.

“또 자네로군. 좋아, 시작해 보세!”

벌써 쉰 번째 시작되는 당적지무다.

붉은 바위 일족이 삼재진의 운무 속 젓가락 세례에 답도 없이 고전하던 때도 있었고, 그들 중 누군가 부상을 무릎 쓰고 나아가니 방계들이 당황하던 때도 있었다.

그게 반복되며 방계들 중, 특히 체술에 자신 있는 이들이 일족의 전사들과 마주하는 양상이 생겨난 것이다.

“갑니다!”

그런 양상은 연무장 전체에서 일어났고, 방계들과 붉은 바위 일족은 전체적인 백중지세를 이루었다.

그 말은 즉, 승패의 결정은 대장전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었다.

콰아앙!!

사람의 가죽과 사람의 가죽이 부딪쳤다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살벌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건 실제로 적웅의 주먹이 당불퇴가 방어를 위해 들어 올린 팔뚝에 꽂히며 울려 퍼진 소리였다.

‘이 아저씨, 진짜 잘 치는구만?’

한 대 처맞으니 골이 뒤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당불퇴는 진정으로 흥분된다는 듯 씨익 웃었다.

거기다 전신에서 피어난 검푸른 기운이 당불퇴가 매번 입으로 주창하던 푸른 야수로 보이게 만들었다.

당가불퇴진무(唐家不退進武).

청야권(靑野拳).

당불퇴의 두 눈에 푸른 귀기가 발함과 동시에 단순 무식하지만 극강의 주먹이 내뻗어졌다.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날리는 반격기!

쩌어어엉!!

두 팔을 겹쳐 막아낸 적웅의 신형이 뒤로 쭉 밀려났다.

‘주먹이 맵군.’

팔뚝에 붉은 자국이 새겨졌다.

당불퇴와 적웅의 승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회피 따위는 없는 두 사나이 땀내 나는 방어 없는 공격 일변도의 대전!

“커허허엉!!”

“끄으압……!”

물론, 밀리는 건 당연 당불퇴였다.

“야, 이 멍청한 놈아! 막지 말고 피하라고!”

똑같이 피하지 않고 공격을 주고받으면 신체 능력이 월등히 앞서는 적웅의 우위였다.

오기 하나로 버티고 있지만, 몇 번 공격을 허용하면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건 어쩔 수 없었고 저도 모르게 입가로 침이 줄줄 새 나왔다.

뒤에서 삼재진의 효력을 집중시켜 계속해서 적웅의 신체 능력을 저하시키고 있는 당율기가 비명을 질러댔지만, 당불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오히려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그럼 네가 더 잘 도와주든가!”

당율기의 혈압을 급속도로 상승시키는 외침에 당지명은 반쯤 체념한 어조로 말했다.

“놔둬라. 말한다고 듣겠냐. 저 금수 같은 놈한테?”

그래서 당지명은 더욱 바삐 손을 움직였다.

그때마다 천골저가 날아들어 적웅의 움직임을 견제했고, 자연스레 당불퇴에게 향하는 공격의 빈도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또, 절묘한 순간에 날아드는군.’

게다가 천골저는 아무렇게나 투척되는 게 아니었다.

당불퇴에게 결정적인 치명타를 가하려 할 때 툭툭 날아들어 공격 흐름을 끊고, 당불퇴의 반격에 뒤로 밀려나 호흡을 가다듬으려 할 때마다 날아들어 호흡을 방해했다.

지속적인 깎아 먹기가 계속되자 적웅은 우선 당지명부터 처리하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어허, 어딜 가시나?”

그사이 다가온 당불퇴는 끈덕지게 적웅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하.’

아무래도, 이 젊은이 때문에 피곤한 건 저쪽이나 이쪽이나 매한가지인 듯했다.

‘길어지겠군.’

이번 당적지무도 해가 저물을 때가 되서야 결판이 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 * *

“…그럭저럭, 괜찮네.”

당적비무를 본 당유혼은 짧게 소감을 내렸다.

조금이라도 발전이 미진하면 사정없이 쥐어패려 했지만, 이쯤 되면 아무리 당유혼이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들 중단전에는 제법 익숙해진 것 같고.”

아주 기본적인 언질만 해줬던 것 같은데, 어느새 다들 중단전을 사용하고 있다.

그건 아무래도 붉은 바위 일족이라는 좋은 스승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비술이라는 이름하에 계속하여 중단전을 사용해 왔으니까.’

전문 지식과 선조로부터 계승되어온 지혜를 따지자면 당유혼보다 더욱 잘 알려줄 이들이 붉은 바위 일족이다.

게다가 단순히 구어로 전승받는 게 끝이 아닌, 그들과의 반복적인 대련을 통해 실전 경험까지 쌓으니 이제는 숨 쉬듯이 자연스러워지기까지 했다.

‘다만, 그 결과가 저런 형태라는 건… 솔직히 예상 못 했는데.’

중단전은 결국 어떤 상위 존재를 받아들이냐에 따라 위력을 달리한다.

한데, 저 검푸른 기운이 의미하는 건…….

‘뭐,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니까.’

방계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는 이내 붉은 바위 일족에게로도 시선을 향했다.

“백 명의 전사라, 이건 정말 고무적인데?”

이제 붉은 바위 일족과 당가는 운명 공동체다.

저들의 무력이 곧 당가의 무력이라 할 수 있었고, 전사의 수가 저만큼이나 늘어났다는 것은 인구 부족이 심각한 당가에 있어 상당히 희망적인 이야기였다.

‘붉은 바위 일족은 이백 명이 조금 안 된다. 그런데 전사의 숫자가 백 명이 넘는다?’

전사는 생산 인력이 아니다.

간혹 그들이 사냥을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사란 일족이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외적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키우는 소모 인력이다.

즉, 전사의 수는 항상 생산 인력에 비례해 일정 규모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당가에 터를 잡으며 이야기가 달라졌다.

‘여기 있으면 기본적으로 ‘생산’ 자체를 걱정할 필요가 없지.’

붉은 바위 산의 맹수들과 생존 경쟁을 해야 했던 때와 달리 지금은 치안에 인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또한, 그때는 수렵과 채집 등 효율 안 나오는 생산 방식을 공들여야만 했다면, 지금은 붉은 바위 일족의 야장들이 제련 기술을 이용해 당가에 이득을 제공하면 지금은 당가에서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치안 업무까지 겸비해야 했던 일족의 전사들은 수련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수준도 빠르게 올라간 것이다.

‘완벽해.’

이 아름다운 선순환에 다른 말이 필요할까?

당유혼은 저도 모르게 입 벌려 감탄하고 말았다.

“이 밥만 축내는 쓰레기 같은 것들! 그래도 한 건 정도는 해주는구나!”

드디어 나 없이도 이놈의 가문이 돌아가기 시작하다니!

감격의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그래, 이거지. 이게 맞지!!”

이게 맞다. 아니, 진작 이랬어야 했다.

뭔 놈의 가문이 최고 어른이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돌아가는 게 맞는 걸까?

“이제야 겨우 투자금 회수가 가능하겠어.”

물론, 그러려면 아직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러면 좀 어때? 꾸준히 물 주고, 가지치기해 주고, 양지바른 곳에 옮겨줘야 하는 고생은 이제 그만해도 되는데.”

그 정도만 돼도 만족스럽다.

당유혼은 훨씬 가벼운 걸음걸이로 미뤄두었던 만남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당유혼의 개인실.

원래라면 집무실이라고 만들어 준 곳이지만, 실제로 집무랍시고 보는 일은 거의 없어서 먼지만 쌓이던 그 공간이 모처럼 제 기능을 다 할 날이 찾아왔다.

“찾으셨다구요?”

당유혼은 직접 우린 차를 건네며 맞은편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우선,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를 차리며 말하는 이는 망국 율도국의 왕자 홍수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당가에서 머물며 안정을 찾고 기력을 회복한 결과 지금과 같이 기품이 좔좔 흐르는 모습이 되었다.

그건 단순히 꾸민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타고난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홍길동 그 녀석을 빼다 닮았군.’

“나는 천하디천한 소첩의 자식 중에서도 가장 천하다 불리우는 얼자(孼子)였지. 하지만 반대로 그만한 천인이신 어머님을 아비께서 안으실 정도면 얼마나 미색이 고우셨겠나? 내 얼굴은 그 덕을 잔뜩 본 결과물이야.”

수면 위에 비추어진 달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던 날, 홍길동은 그리 말했다.

결코 좋은 과거는 아니지만, 술 한 잔에 껄껄 웃으며 털어 넘긴 이야기에 마냥 홍길동은 잘생겼었다.

‘굳이 말하자면 나랑 동등하거나…….’

“은인?”

“그, 이상?”

“예?”

“크흠… 아니 뭐, 그냥 옛 생각이 좀 나서…….”

잡생각은 대충 털어 넘기자.

“음, 일단… 전해 주신 물건은 잘 받았어요. 거참, 워낙 귀한 물건을 주셨더라구요?”

“한낱 물건의 가치가 귀해 봐야, 구명의 은혜에 비할 바가 있겠습니까? 다행히 은인께서 구해 주신 유민들 중에는 장인이 제법 있는 편이고, 대량은 불가능해도 꾸준히 생산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꾸준히 생산 가능하다라…….

말은 은혜를 갚겠다는 것이지만, 정말 그 뜻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큼 멍청한 소리가 없다.

이것은 자신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증명이니, 진실로 그들을 귀히 쓰자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셈해야겠지.

그럼 뭐,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까놓고 말하자고.

“전 이런 걸로 괜히 머리 쓰는 거 싫고, 그쪽 율도국에 나쁜 감정도 없어요. 원하는 게 있다면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면 가능한 선까지 최선을 다해 지원해 드릴게요.”

“…….”

그 말에 홍수월은 우묵한 눈빛으로 당유혼을 바라보았다.

그 말에 거짓은 없는지, 그 말에 진의는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듯했다.

‘그래, 볼 테면 봐라.’

어차피 진짜 도와주고 싶은 것은 진심.

볼 테면 마음껏 보라며 가슴을 떡 하고 내미니,

“그렇군요.”

홍수월 역시 결심했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입을 열어 물어왔다.

“은인께서는 혹시, 상단전에 대해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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