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본격적이라고?
그 말에 진혁수는 미간을 좁혔다.
“아직 본격적이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건 좀 이상했다.
스스로 인정하기는 싫지만… 눈앞의 이 시건방지고 싸가지 없는 놈은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일류를 넘어선 초일류였다.
‘나를 금수가 아닌 사람으로서 만드는 데는 물론 스승님께서 제일이시겠지만, 무인으로서 가르치는 능력만 따지면…….’
정말 짜증 나게도, 청성 전체를 뒤져봐도 이놈만 한 양반이 없었다.
한데, 그것마저 본편이 아니라고?
“뭐래, 지금까지는 몸풀기였지. 말하자면 토양을 좀 다졌달까? 종자를 심기 위해서 땅을 고르게 폈을 뿐이다.”
“흠…….”
허세인가?
솔직히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 말이 진심이기를 바랐다.
지금만으로도 무의 증진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는데, 여기서 더 강해질 수 있다고?
“곧바로 시작하지. 자세를 잡아라.”
한눈에 보기에도 진혁수는 지금 무언가를 배울 만한 몸 상태가 아니었지만, 당유혼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립하라 명했다.
그리고, 진혁수 역시 가타부타 두말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행했다.
“열두 가지 동작을 외워라.”
이어서 곧장 이어진 열두 가지의 시현 동작.
당유혼이 한 번 보여주면 진혁수가 따라 하며 진행되었고, 그럴 일은 흔치 않았으나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는 즉시 매서운 손길이 날아들어 그 자세를 교정해 줬다.
그 동작은 과연 지금까지가 기본기를 닦기 위한 발판이었음을 알려주는 듯했고, 정말 무언가 하나의 무공을 익히는 듯했다.
그런데 그걸 계속하면 할수록 진혁수의 표정이 점점 묘해지기 시작했으니,
“자, 이제부터가 가장 중요하다. 지금까지 열한 가지 동작을 전부 일련의 과정으로 완성시킨다면…….”
가르침이 절정에 이르러 두 손이 거대한 곡선의 이음을 만들어내며,
“이것을 완(完)이라 부르며, 원(圓)이라 칭하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진혁수의 표정을 완전히 일그러지게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
“…이, 미친놈!! 지금 내게 무엇을 가르치려는 거냐?!”
결국 참다못해 경악한 그가 버럭 소리쳤다.
“뭐 인마? 좋은 것 알려줘도 지랄이네?”
“아니…….”
좋은 것은 분명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건, 네놈 가문의 차양십이수(遮陽十二手)가 아니더냐!!”
그건 바로, 자신이 그렇게 얻어맞고 처맞으며 몸에 새길 듯 남아버린 차양십이수였으니까.
“이야, 역시 하도 처맞아서 그런가. 한눈에 알아보네?”
“놈!! 지금이 장난칠 때냐?!”
눈앞의 무뢰배가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놈인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무려 청성산에 올라 청성파 장로에게 일대일 비무를 신청했고, 삼 초를 양보받는 동안 만천화우라는 필살기를 세 번 연속 작렬시켜버린 놈이었으니 당연 보통은 아니겠지.
하나, 그것도 다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것은 네 가문의 무공이다! 본파의 장로에게 흉수를 뻗었을지 언즉 그것은 타 문파로부터 네놈의 가문을 지키기 위한 방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행적은 대체 무슨 짓이냐! 이러고도 네가 선조들을 볼 낯이 있느냐!!”
‘뭐 래는 거야?’
내가 선조인데.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따진 놈이었…구나.”
맞네.
이놈이 워낙 하는 짓거리가 주먹패 저리 가라 할 수준이고, 평소 행실이 도사 같지 않다고 하지만 사문에 대한 사랑은 진심인 놈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스승과 그 스승이 속했던 문파에 대해 진심인 놈이었지.’
십수 년도 넘는 세월, 자신보다 못한 놈들이 되도 않는 짓거리를 해대는 것을 꾹꾹 참아가며 청성파에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보통이라면 문파를 뛰쳐나와 제 잘난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이겠다고 하는 게 정상인 세상이요, 또한 그러한 시대에서 꿋꿋이 청성에 뿌리 박고 남아 사문을 개혁해 보려 아등바등거리는 게 이놈이었다.
‘어휴, 더러운 스승박이놈.’
솔직히 좀 부럽기도 했다.
‘차양당놈들이 이런 모습을 좀 본받아야 했는데…….’
어디 스승이 하늘과 같이 높은지 모르는 놈들만 보다가 이런 놈을 보니 영 적응이 되야 말이지.
“미치겠군! 나는 할 일이 있어 이제와 근맥을 자를 수도 없고, 단전을 폐할 수도 없다. 이걸 어찌할 것이란 말이냐!!”
좋은 것 익혀놓고 괜히 씩씩 성을 내는 진혁수의 모습은 진심 그 자체였다.
괜히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됐으니까 발광하지 말고 앉아. 우리 선조님들이 화낼 일은 없으니까.”
일단 내가 선조라는 건 둘째치고,
“그 무공, 내가 만든 거니까.”
“…뭐?”
우뚝―
한참 난리를 치던 진혁수의 몸이 딱딱히 굳었다.
“귀가 먹었나. 차양십이수, 내가 만든 거라고.”
이름이야 원래 있던 거지만 거진 뿌리부터 다시 만든 게 난데, 이제 와서 누가 화를 내겠냐고.
“진심…이냐?”
“내가 너랑 농담 따먹기나 할까? 나 바쁜 몸이야.”
“허…….”
그 말에 진혁수는 전신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무의 경지가 높은 것과 무공을 만들어내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새로운 무(武)를 창시하는 이들을 종사(宗師)라 칭하니, 자신보다 십 년은 어려 보이는 놈이 이미 한참 전에 그 경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짙은 탈력감이 찾아온 것이다.
“…빌어먹을.”
“뭐가 또. 이런 천재님께서 특별히 강의해 주시겠다는데.”
“세상 엿 같고 더럽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리되니 욕지거리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런다.”
그렇게 말한 진혁수는 다시금 주먹을 꾹 쥐었다.
‘호오. 스스로를 천재라 생각하던 놈이 더한 놈을 만나서 절망하는 것은 흔치 않은데… 그걸 이렇게 빨리 떨쳐내고 일어나?’
워낙 어릴 때부터 세상의 불합리에 질리도록 데인 놈이라 그런지, 재기하는 것도 남달랐다.
“좋다. 다시 시작하지.”
그 뒤로는 계속해서 차양십이수를 펼치고 또 펼쳤다.
그러니까, 끝없이 원을 그리고 또 그렸다는 뜻이다.
“물처럼 흘러라. 원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 만류(萬流)가 끝끝내 귀종(歸宗)하듯이, 차양십이수는 그것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그건 네 무공 역시 마찬가지겠지.”
훈련은 단순 차양십이수를 그리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각기 다른 대극(對極)을 하나의 무공으로 엮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기에 완성했을 때 더 가치가 있는 일. 너는 하나의 몸에 두 개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그딴 게 되나?”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자, 이렇게 해봐라.”
무공 수련을 하다 말고 붓필 두 가지를 가지고 왔다.
그다음 한 일은 왼손으로는 사람 인(人) 자를 새기고, 오른손으로는 입 구(口) 자를 그리는 일.
당연하게도,
“또 틀렸잖아, 이놈 자식아.”
“젠장! 입 좀 닫아라!”
그 수련은 별달리 피와 땀을 흘리는 일이 아님에도 무척이나 힘들었다.
‘육체가 완성에 이를수록 한 가지 오롯한 답을 만들려 하지. 그러나 그걸 나눠야 이놈이 원하는 무에 도달할 수 있는 것.’
며칠간 종일 차양십이수를 수련하고, 저녁에는 양손 붓질에 삼매경이고 새벽에는 향로를 만들기 위한 일상을 반복했다.
어느 새부터 숙식도 마련해 준 곳에서 전부 해결하며 이 공간 일대 서른 장을 벗어나지 않는 삶이 되었으나 진혁수는 식음(食飮)을 최소화한 채 오로지 그런 일상에 매진했다.
‘네놈은 모를 거다. 이 수련법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하나의 몸에 두 가지 마음.
이러한 무공은 무림에서 단 한 가지뿐이었다.
양의신공(兩儀神功).
‘그 말코놈에게 배운,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무당에서도 비밀리에 전해지는 수련법이지.’
“…그래, 그런 놈이 있었지.”
“…음? 뭐라고 했나?”
한창 수련 중이던 진혁수가 자신을 찾았나 싶어 돌아봤다.
“아니, 혼잣말. 하던 거 계속해.”
아니라고 대충 손을 저어주며 하던 수련이나 집중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다 문득 생각에 잠겨갔다.
‘그놈은,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가장 사연 많은 놈이기도 했다.
한때는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놈이기도 했다.
당시 무림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비슷한 경지까지 온 놈이라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대체 왜…….’
눈을 떴다.
감으면 찾아오는 어둠이 의심암귀(疑心暗鬼)를 만들어낼 것 같았다.
삼십 년 후 눈을 뜬 시점에서 당가의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던 이유기도 하고, 굳이 그전까지 이어져 있던 인연이 남아 있지 않을까 찾아보지도 않았던 이유기도 했다.
그래서 새삼스레 깨달았다.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구나.’
갑작스러운 시기, 갑작스러운 자리에서 얻은 깨달음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한 번쯤은,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 세상에서 누구도 알 수 없는, 홀로 오롯이 간직한 상념을 털어내며 진혁수가 수련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고,
“궁금한 게 있다.”
진혁수가 문득 물어왔다.
“너는, 내게 뭘 원하는 거지?”
“밥 잘못 먹었냐? 비싼 것만 처먹인 것 같은데, 뭔 헛소리야?”
힘 좀 팍팍 쓰라고 실제로도 당가에서 귀한 약재만을 가져와 처먹였었다.
꾸욱―
그 사실을 잘 아는 진혁수이기에 되려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나는 강해졌다. 네게 가르침을 받기 전과 후를 생각한다면 사별삼일즉갱괄목상대(士別三日則更刮目相對)라는 말이 우스울 수준이겠지.”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러한 가르침을 어째서 문외인인 자신에게 이리도 상세히 알려주었냐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묻자, 당유혼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는 것. 없지는 않아.”
“무엇이지?”
“거대한 바위. 아니, 거대한 벽? 그래, 그 정도가 아닐까 싶군.”
그것이 바람이었다.
“…그 녀석들의 경쟁자가 되길 원한다는 뜻인가?”
“정확해.”
“오만하군.”
그 녀석들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나는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청성으로 돌아가면 이대 제자와 삼대 제자들에게도 가르침을 주겠지. 물론, 네 가문의 무공을 전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 그 외에 내가 얻은 깨달음을 나눠주는 것만으로도 청성의 미래는 더더욱 밝게 빛날 것이다.”
그리고, 그리된다면,
“네가 키운 청성은 곧 당가의 경쟁자가 될 것이다.”
“좋네. 그걸 바라는 거야.”
조금의 걱정도 없다는 확답.
진혁수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네놈, 청성이 우습나?”
“당연히 우습지.”
“뭣? 이런…….”
“하지만, 네가 있는 청성은 우습지 않아.”
우습다면, 경쟁 상대로 정하지도 않았겠지.
“네 생각보다 나는 네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한다. 알겠냐? 그래서 널 선택한 거야. 청성은 널 버렸지만, 너는 청성을 버리지 못할 테니. 네가 있는 청성은 더더욱 강해지겠지. 그렇게 우리 가문의 앞을 막아서라.”
“하… 자신 있나?”
“웃기는군. 네가 할 말이냐?”
“…그런가.”
하긴.
문파에 버림받은 주제에 그 문파를 누구보다 강하게 만들겠다는 자신이 할 말은 아니겠지.
‘가능과 불가능을 따질, 자신이 있어서 하는 일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이기에 행할 뿐.’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선 진혁수는 지난 시간을 회상하며 두 손으로 향로를 들어 올렸다.
“완성이다.”
그가 이곳에 온 지도 이제 구십구 일이 지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