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제법인데?
완성된 향로는 고아한 기품과 향을 자아내고 있었다.
원래부터 상등품의 향로를 재료로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구십구 일간 진실된 진언을 통한 축복이 겹겹이 쌓이자 법구(法具)라 할 만한 물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을 건네 온 진혁수가 물었다.
“쓸 만한가?”
“쓸 만하냐고?”
은은히 풍겨오는 향에서 짙은 현기(玄機)가 느껴졌다.
한 명의 도인이 구십구 일 동안 새벽 진언을 외우다 지쳐 쓰러지길 반복한 결과물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으니까.
“그 이상이지. 자식, 밥값은 하는구만?”
“그런가.”
그 말에 진혁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그간의 고생이 끝났음에 탈력감을 느끼는 듯했고, 빳빳이 세워져 있던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조금은 빠져나가는 듯도 했다.
그리고,
“당유혼.”
척―
다시금 허리에 힘을 주고 반듯하게 선 그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엥? 너 뭐 하냐?”
웬 답지 않은 짓이여?
“내가 받은 것이 네 싸구려 변덕일지라도, 받은 은(恩)은 사라지지 않는 법.”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때, 진혁수는 품에서 각패(角牌)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받아라. 이것을 받는 것은 네가 처음일 거다.”
“각패?”
‘무슨 애늙은이여?’
옛날 무림에는 은을 받았을 때 그걸 위해 자신의 각패를 나눠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것을 자신의 목숨과도 같이 중히 여겨, 이걸 가져오는 상대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걸고 전장에 서는 경우도 왕왕 있었으니까.
‘이제는 다 잊혀진 낭만이라 여겼는데…….’
더 없이 삭막한 마음을 가진 주제에, 두 눈에는 진심을 가득 담은 채 바라보는 그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물론, 네가 보기에 지금의 나는 하잘해 보이겠지. 그러니 내 미래를 네게 주겠다는 거다. 먼 훗날, 내 이름은 분명 천하에 떨칠 것이고, 청성은 무림에 그 명성이 자자할 것이다. 너는 그 도움을 받을 권리를 얻은 거다.”
그 진심이 뜻하는 것은 확신.
먼 미래에 자신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눈빛이 결연하게 맺힘에 당유혼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허세 부리기는.”
뭐, 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다.
“좋아. 그럼 나는 지금 하나 들어주지.”
“뭐?”
“마찬가지야. 이거, 보아하니 내가 없는 동안에 피를 토하며 만든 것 같은데 말이야.”
향로에서 느껴지는 고아함은 제작자가 보통 정성으로 만든 게 아님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뭐든 잘하면 추가 상여금이 붙는 법이지.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라. 우리 집 돈 많으니까, 영약이든 뭐든 말하면 하나 정도는 싸 들고 갈 수 있게 해주지.”
너, 못 먹고 살잖아.
가뜩이나 청성에서 찬밥 먹고 사는 놈이다.
내공의 정순함은 정파놈들 아니랄까 봐 맑고 깨끗하지만, 그 양이 턱없이 적다. 보나 마나 자신에게 왔어야 할 영약이 일찍이 다른 놈들한테 빼돌려진 것 같은데.
“잘 모르면 내가 추천해 주마.”
대출혈 자선 행사까지 가능하다고?
“한 가지 도움이라.”
그 말에 진혁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굳이 주겠다는 것까지 거절할 정도로 풍족한 삶을 살지도 않은 그였기에, 장고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한 가지 부탁하지.”
“뭔데? 영약 추천해 줘? 아니면 비상용 암기라도 하나 챙겨주리?”
“아니, 그런 건 필요 없다.”
내가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
“무(武)를 원한다.”
…뭐?
“설마, 나?”
“그래.”
“허 참…….”
어이가 없네.
뭐지?
그래도 남의 집 자식이라고 편하게 키워줬더니 내가 만만하게 보였나?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해볼 만하다 싶은 생각 따윈 하지 않는다.”
그런 오만함 따위, 이미 몇십 일 전에 깨져버린 지 오래였다.
“지난 구십구 일의 시간, 너와의 격차를 현격히 느꼈다.”
격이 다르다는 것은 진정 이런 것이구나.
절망하고 무뎌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검을 갈고 닦았고, 그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더 알아보고 싶은 거다. 지금의 내가, 어디까지나 닿을 수 있는지.”
그 결과가 승리이든 패배이든 상관없다.
그냥 한번 부딪쳐보고 싶은 것뿐!
그 순수한 무혼(武魂)에…….
“아이고야…….”
이마를 탁 하고 짚었다.
‘왜 꼭 쓸 만한 놈은 남의 집에서 나는 거야?’
육언도 그렇고, 이놈도 그렇고.
누구네 집 자식놈들은 좋은 거 귀한 거 하나하나 다 처먹이고 일일이 가르쳐줘야 겨우 쓸 만해지는데, 남의 집 자식은 아무 데나 던져놔도 알아서 쑥쑥 자라난다.
“그건 또 무슨 뜻이지? 내 도전을 받아주기 싫다는 건가?”
“아니 뭐, 그건 아니고.”
해준다고 했으니 이제 와서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은 없다.
“바로 시작하길 원하냐?”
“그렇다. 본산을 너무 오래 떠나 있을 수는 없으니까.”
“좋아. 그럼 여기선 좀 그렇고, 따라와라.”
곧장 자리를 옮겼다.
원래도 인적 드문 야산이었지만, 그보다 더욱 깊숙이 들어가자 꽤 넓은 공터가 나왔다.
“이 정도면 되겠지?”
‘삼십 여장 정도 되겠군.’
진혁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저 끝으로 가서 빙글 몸을 돌렸다.
“청성의 진혁수다.”
사문과 소속을 밝히고 스스로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
이제는 빛바랜 구닥다리와 같은 인사에 당유혼은 피식 웃었다.
‘애늙은이냐?’
삼십 년 전에도 저러는 놈은 많이 없었는데.
‘아니, 청성에 하나 있기는 했지.’
“그래. 청운(靑雲)이었던가?”
“뭐? 네가 우리 스승님의 도호를 어찌 알지?”
“뭔 소리야. 그냥 지금 구름이 그렇다는 건지.”
“아.”
푸른 하늘.
그 꽤 흔한 표현에 뒤늦게 머쓱해진 진혁수가 머리를 긁지만, 기실 그의 착각은 착각이 아니었다.
“청성의 청운입니다.”
그리 강하지 않은 도인이었다.
기도는 평범했고, 기세 역시 그리 특출나지 않았다.
하지만 도사 특유의 쾌쾌한 냄새가 꽤 짙게 배어 있는 녀석이었다.
‘그 시대에도 그런 녀석은 많이 없었으니까.’
청성이고 점창이고 아미고 할 것 없이, 사천에 있던 녀석들은 도사고 중이고 할 것 없이 자신을 경원시하는 시선으로 바라볼 때 홀로 맑은 정광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도인.
그가 이 녀석의 스승이었다.
‘늦게 피운 꽃인가.’
부럽기도 하구만.
누구는 쓸 만한 놈 하나 못 구해서, 아직도 못 죽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데, 누구는 마음 편히 후계자 하나 정해서 저 하늘에서 편히 쉬고 있다니.
이게… 세상의 불평등함?
“준비됐으면 바로 시작해도 되겠나?”
천천히 허리춤에 패용한 검집에서 검을 꺼내든 진혁수가 물어왔다.
“그래, 들어와 봐.”
상념은 거기까지.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리자 진혁수 역시 한 층 더 진지한 눈으로 상대를 훑었다.
‘전신이 빈틈이군.’
허술하다.
어디를 향해 검을 휘둘러도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빈틈 투성이의 모습.
그러나,
‘전부 함정이겠지.’
꾸욱―
검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며 식은땀이 흘렀다.
‘읽을 수가 없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상대의 감함이 마주함으로써 더욱 선명해졌다.
무인으로서의 감각이 예리하게 울렸고,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
“뭐야, 안 올 거냐?”
그렇다면 두려운가?
“그럴 리가.”
씨익―
‘너무, 흥분되잖아.’
나라는 존재는 과연 어디까지 나아갔는가.
그것을 무제한으로 실험해볼 수 있는 순간에 진혁수는 입꼬리를 비틀며 검무를 시작했다.
“간다.”
청운적하검(靑雲赤河劍).
비익연리(比翼連理).
두 자루 궤적이 그려졌다.
세찬 날갯짓을 하듯, 두 방향에서 날아드는 검격이 각기 머리와 몸통을 동시에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속에서 당유혼은 침착하게 검리를 읽었다.
‘검격은 눈속임이군.’
붉은 기운을 뿜어내며 날아드는 검은 화려하고 강맹한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은 함정,
‘진짜는 검집.’
흔히들 검이 가진 날카로움과 강맹한 위세에 그쪽에 신경 쓰면 푸른 기운으로 뒤덮인 채 은밀하게 다가오는 검집에 일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겉보기만 검격 쪽이 화려할 뿐, 실제로 그 안에 압축된 기운의 총량은 검집 쪽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옜다.”
당유혼은 품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 튕겼다.
암기술(暗機術).
천녀산화(天女散花).
파챵!
간단한 손동작에 구슬을 산산 조각나며 수백 개의 조각으로 화했다.
‘흡?’
검격이고 나발이고, 끝까지 검을 휘두르다가는 저 파편에 휩쓸려버릴 기세에 진혁수는 재빨리 검과 검집을 회수하며 검막(劍幕)을 만들어냈다.
카카카캉!!
반구 형태의 검막이 생겨나며 깔끔하게 파편을 막아냈고, 그 틈에 당유혼은 비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검법의 아직 미완점을 말해 주지.”
우웅―
비도에 내공이 듬뿍 주입되며 검날이 덜덜 떨렸다.
“첫 번째로 너무 정직해. 검로가 너무 정직하니 읽히기가 쉽고, 읽히기가 쉬우니 이런 가벼운 변수에도 막히지. 그렇다면 이걸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일까?”
“큭… 변초를 섞으란 건가?”
“아니지. 압도적인 힘이지.”
바로 이렇게.
비도술(飛刀術).
일점혈(一點穴).
비도가 내던져졌다.
가볍게 내던져진 비도였으나, 그 안에 담긴 위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낌새를 눈치챈 진혁수가 서둘러 검과 검집을 겹쳐 막아냈지만,
구구구구구……!!
‘컥! 무, 무슨……!’
분명 막아낸 건 비도인데, 수백 근 철퇴로 내려 찍히는 듯한 충격과 함께 뒤로 쭈욱 밀려났다.
“변초를 섞는다? 말은 좋지. 근데 그건 그냥 힘이 부족하니 편법을 만드는 것뿐이지.”
그딴 식으로 해서 제대로 된 무공이 만들어질까?
“그래도 굳이 변초를 섞겠다면, 이 정도는 되야지.”
투둑―
암기가 듬뿍 담긴 통 하나를 통째로 뜯어냈다.
안에 담긴 비침 수백 개를 양손에 쥐고 힘껏 허공으로 흩뿌렸다.
“자, 잠깐… 서, 설마 그거!!”
“응, 네가 생각하는 그거야.”
당가칠대금기(唐家七大禁技).
만천화우(萬天花雨).
“미친……!”
콰콰콰쾅!!
방어? 그딴 건 생각할 겨를도 없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미친 듯이 달려서 비침 세례의 폭격 범위를 벗어나는 것뿐!
쿠당탕!!
나려타곤의 수법으로 땅바닥을 굴러서야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진 진혁수는 풍비박산이 난 비침의 폭격 범위를 멍하니 바라보다 빼액 소리 질렀다.
“이… 이, 정신 나간 놈!! 이게 무슨 짓이냐!!”
“무슨 짓?”
그에,
“우리 혁수. 구십구 일 동안 좋은 것만 먹어줬더니 배가 잔뜩 불렀네.”
당유혼은 차갑게 조소했다.
“…뭐?”
“네가 아직도 꿈에서 못 깨어나는 것 같아서, 이 몸이 직접 찬물을 들이부어 주는 김에 하는 말인데 말이지. 너, 이제 돌아갈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냐?”
“……!”
이곳에서 비무가 끝나가면 돌아갈 곳.
당연하게도,
“청성산…….”
“그래, 널 버린 청성산이다.”
그곳은 결코 아늑한 집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가시방석과 덩굴 벽으로 지어진 작은 전쟁터였다.
“내게 배움을 얻고 가르침을 받는다고? 좋아. 그건 나쁘지 않아. 하지만, 네가 그걸 얻음에 한가하게 가진바 무공을 모두 찬찬히 펼쳐내며 비무나 할 처지냐?”
착각도 유분수지.
“죽을 기세로 덤벼. 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대로, 하나라도 더 얻어가기 위해 아등바등 발악하라고.”
찬찬히 휘두르는 검무나 나풀나풀 풀어내기에 네 삶을 녹록지 않다고.
찬물을 끼얹다 못해 아예 물속으로 빠트려버리는 촌철살인의 어구(語句)들이 진혁수의 가슴을 푹푹 찔렀다.
“낭만(浪漫)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을 강함을 지닌 놈들이나 지킬 수 있는 거다, 이 애송아.”
마치, 네 스승이 그러했듯이.
“…큭.”
뒷말은 속으로 삼킨 말이었으나, 진혁수 역시 자신의 스승을 떠올렸다.
분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것을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현실은 언제나 비정하고, 진실은 쓰디쓴 법이지.’
그래서,
“…좋아.”
이를 악물며 검병과 검집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아주 좋아……!”
아등바등 발악하는 것이라면, 누구보다 잘할 자신 있는 특기니까.
“네 은혜에 무한히 감사하며, 네게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워가겠다!”
설령 그 과정에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길지라도!
히죽―
그 말에 당유혼은 비릿하게 웃었다.
“죽을 만큼 괴로울 거다. 아니, 그냥 죽어달라고 말할 정도로 몰아붙일 거야. 한번 시작한 이상, 나 역시 대충하고 관둘 생각은 없거든.”
“그래?”
그것참,
“눈물 날 정도로 고맙군!!”
진혁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달려들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칼질이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줄 테니까!
이후, 인적 끊긴 산길을 따라 쇳소리와 폭음이 한참이나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해가 지고 달이 뜬 뒤, 새벽 동이 밝아올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