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자, 이제 지난 일백 일 동안의 사천당가 정세는 대충 정리되었다.
그동안 외부 확장에 죽어라 힘썼으니 한동안은 내부의 기틀을 착실히 닦고 내실을 다지는 수순이 필요했다.
바닥엔 옥장판이 쫘악 깔리고, 다 박살 났던 현판은 지난번에 바꾼 데 이어 또다시 반짝반짝한 새것으로 갈아치웠다.
방계놈들이 또 혈세 낭비가 아니냐 우려를 표했지만,
“혈세? 혈세? 이 망할 놈의 망둥이 자식들이!! 너희가 아직도 예전처럼 약초 캐와서 돈을 벌어오는 줄 아나!!
더 이상 내가 나가서 녀석들의 기강을 다지지 않아도, 대황상총관 당궁상이 입에서 불을 뿜으니 알아서 수많은 입들이 다물어지도다―
‘자식, 그동안 설움이 보통이 아니었구나.’
내가 없는 동안 가계의 무거운 등짐을 얹어 매고 가난과 빈곤의 굴레에 시달려야 했던 당궁상은 딴 건 몰라도 사천당가의 이름을 새긴 현판에는 어질어질한 집착을 보였다.
그러니 어쩌겠어,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라구?
겔겔겔―
대충 그렇게 당가의 변화를 한눈에 훑어본 뒤에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좀 사천당가의 위명에 맞는 가세를 찾아가는 것 같았으니, 이제 그 마지막 조각을 끼울 때가 된 것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음, 아무래도 그렇죠?”
그 마지막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향한 곳은 율도국 유민들이 정착한 곳.
전직 율도국의 국왕이자 현직 율도촌의 촌장이 되어버린, 뭔가 가슴 아픈 위치 변화에도 밝은 웃음을 짓고 있는 홍수월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과연, 저와 유민들이 이곳에 온 이래로도 당가는 눈부신 발전을 계속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 고맙네요. 다만… 음, 율도국의 다른 분들은 좀 어때요?”
나야 기쁘긴 한데, 망국의 유민들 앞에서 마냥 웃고 있자니 또 미안하긴 했다.
괜히 기쁨의 감정을 숨기는 것도 위선일 것 같고, 그렇다고 숨기지 않자니 또 염장질일 것 같아 머리를 긁적이자 홍수월은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율도국은 없습니다. 이곳 새 땅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율도촌만이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그 시작은 이전까지의 고난을 지워낼 수 있을 정도로 무척이나 희망적입니다.”
음, 그런가?
일단 부족함 없이 지원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고, 내가 아니더라도 가주 위혼이 녀석이 워낙에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는바, 금전적인 이득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고 듣기는 했다.
“붉은 바위 일족이라고 하셨지요? 또 다른 가족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빠른 속도로 율도촌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력은 진정 천하에 장사들만 모인 듯하더군요.”
“그 양반들이 힘 좀 잘 쓰기는 하죠.”
차양당 방계놈들도 힘 잘 쓰는 일꾼이기는 하지만, 타고난 신력만 따지면 붉은 바위 일족이 우위였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율도촌에 동질감이라도 느꼈는지 다들 흔쾌히 나서서 각종 건축물을 제작하는 데 힘을 썼다.
아무래도 율도촌 유민들은 그간 수적놈들의 포로 신세가 되어 힘든 시간을 보낸 만큼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해 제힘을 내기 어려워했다.
‘그러고 보면 불행 중 다행인 게, 그들의 특별한 신세가 반영이 되어 별달리 험한 꼴은 보지 않았다는 건가?’
만약 수적들 중 누군가가 율도국 유민들의 몸에 손을 댄 사실이 적발되면 또 한바탕 칼춤을 췄어야 했을 텐데, 개별 심층 면담 결과 그런 경험은 없다 하니 아픈 과거를 털어버리고 새 시작을 할 수 있었다.
여하튼,
“율도촌도 어느 정도 기반을 다져간다니 다행이네요.”
각설하고, 이제 본론에 들어가 볼까?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다행이지요.”
홍수월도 내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당가 전체적으로도 설계대로 대부분의 기반이 준비된 듯하니 이제 진법을 설치하면 될 듯합니다. 가져오신 물건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여깄어요.”
턱―
탁자 위에 지난 구십구 일간의 진언으로 만들어진 향로를 올렸다.
원래는 홍수월의 몸 상태를 회복시키고, 잃어버린 술법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 준비한 물건이지만, 아쉽게도 이 물건은 중간에 제작 중단될 뻔한 위험을 겪었다.
왜?
“좋군요. 은은히 풍기는 향취가 이리도 고고하니, 일찍이 몸 상태를 회복한 뒤로부터 꾸준히 준비를 해둔 보람이 있을 듯합니다.”
홍수월이 이 법구의 도움 없이도 술법 세계를 회복했기 때문이었다.
‘허 참, 밥이 보약이라더니.’
비법은 별거 없었다.
법구를 만드는 동안에도 혹시 몰라 홍수월의 회복에 좋을 영험한 약초들을 잔뜩 제공해 주었고, 그뿐만 아니라 광형상단과 장강수로상단을 통해 유입되는 물품들 중 영험하다는 수식어가 붙은 것들은 모두 다 끌어와 투자했다.
술법이란 준비 과정이 무공보다 배로 복잡해서 그렇지, 한 번 발동만 되면 수십 배의 효율을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기에 아끼지 않고 투자한 결과였다.
‘덕분에, 벌써 오십 일 전에 홍수월은 건강을 회복했고, 다시 남은 오십 일 동안 당가 전체에 기관 지식의 뼈대를 준비해 왔다.’
기관진식.
흑룡도에서 육언이 선보였던 석탑팔문금사진이 진식에 그친다면, 거기에 기관을 추가한 것이 바로 기관진식이었다.
일반적인 진식이 단기성이나 일회성에 그치는 데 반해, 기관진식은 유지 보수만 제때제때 된다면 반영구적인 효용성을 지닌다.
마른하늘에 운무를 생성하고, 침입자의 방향 감각을 흩트리게 만드는 것은 아주 일차적인 기능.
일반적으로 팔괘와 오행을 공부한 이들이 설치하는 진식도 평범한 이들이 보기에는 깜짝 놀랄 만한 효과를 선보이는데, 술사가 직접 매개체를 통해 설치하는 것은 수성전 등에서 압도적인 병력 차도 역전시키게 하는 묘용을 가지게 된다.
“바로 가시겠습니까?”
“그러죠.”
향로를 받아든 홍수월은 곧장 자리를 옮겼다.
적재적소에 향로를 설치해야만 미리 준비해 둔 기관진식이 제대로 작동하는 법.
그리고 그 위치는 율도촌 내가 아니라 내 방이 되었다.
‘그게 안전하니까.’
홍수월 입장에서는 신뢰의 증표로 그 핵의 위치를 맡기기도 했지만, 적의 침입에 대비하자면 역시 내가 먹고 머무르는 방만한 위치가 없기도 했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내 방이 딱 당가의 중심에 있기도 했고.’
방을 배정받고 보니 지리적으로도 적합했기에 그동안 나름 보수 및 개조 공사를 마친 방으로 이동했다.
“설치하겠습니다.”
딱 잠만 자는 데 쓰는 방이지만, 그래도 널따란 공간의 한쪽 벽면에는 향로를 올려두기 위한 제단이 있었다.
그곳에 향로를 올려두는 순간,
우웅―
대기가 작게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동기화를 진행하겠습니다.”
작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고, 홍수월은 두 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진언을 읊었다.
진혁수가 하던 것과 비슷하지만 다른, 훨씬 상위의 원리를 따르는 술법이 펼쳐졌고 잠시 후 은은한 향이 방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후우…….”
약 일각이 소요되고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홍수월이 숨을 푹 내쉬었다.
그것이 홍수월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는지 안색이 파리해진 모습이었지만, 그는 크게 내색하지 않으려 하며 입을 열었다.
“완료되었습니다. 향로를 매개로 하였기에, 술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향이 당가 전체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에잉, 향내가 진동하는 건 별론데.”
툴툴거리긴 했지만, 그만한 게 없다는 것을 알기에 큰 불만은 또 없었다.
홍수월도 그걸 잘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좋은 향이지 않습니까. 기본적으로 당가에 드는 이들에게 심신 안정의 효과를 주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술법적인 효과에 의한 거예요?”
“기본적으로 상시 작용하는 효과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효과들은 더 있지요.”
술법이 가미된 기관진식은 가호를 내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방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진법의 대표격인 운무진이 작용됩니다. 발동시킨다면, 침입한 적들의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할 것이고, 당가의 소속원이 아니라면 내공을 소모할 시 회복도 더뎌지게 됩니다.”
“자연지기를 흐트러트린다는 거예요?”
“바로 그렇습니다.”
허 참.
‘그건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전투가 장기전으로 돌입할 시 내공 소모는 필연적이다.
당가 내부까지 침투한 상황에서 그게 과연 큰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땅덩이 하나는 더럽게 넓은 사천당가 특성상 생각보다 중기전 정도까지는 돌입할 확률이 있고, 운무진의 범위를 확장시킨다면 꼭 가문 내뿐 아니라 외부에도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전장이 확장되면 단 한 호흡의 내공도 소중하게 될 경우가 왕왕 있을 테니 그 효과는 꽤 클 것이고,
“반대로 당가의 소속원들에게는 이로운 가호가 함께할 것입니다.”
적군의 능력치를 하락시켰다면, 그다음은 당연 아군의 능력치를 상승시키는 효과가 따르게 된다.
“몸놀림은 가벼워질 것이고, 소모된 내공은 평소보다 빠르게 차오를 것입니다. 감각은 한층 더 예민해질 것이며, 난전에서 눈 없는 화살이 빗나갈 확률이 높아지게 됩니다.”
“화살이 빗나간다라…….”
그 건은 말 그대로 천운(天運)에 이르는 가호.
확률 영역을 조작하는 것은 단순 개인의 내공을 쌓는 하단전을 통한 무공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영역이고, 중단전이나 상단전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 정도가 주요 효과입니다. 아, 부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악령과 잡귀를 물러나게 하는 것들이 있겠군요.”
“괴력난신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이곳 중원은 도가 문파들이 산재해 있고, 그들이 정기적인 토벌을 반복하기에 흔히 보기 어렵다고 들었지만, 고국인 율도국의 뿌리가 되는 한반도 땅은 산어귀마다 산주인들이 사람을 잡아가고, 산귀들이 산사람에게 해악을 끼치고는 했습니다.”
뭐야, X발.
그거 완전 무섭잖아.
덤덤한 얼굴로 말하는 홍수월이어서 더 무섭다.
한반도, 대체 그 땅은 대체 어떤 곳일까?
“후후,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곳 중원 땅에는 그런 이들은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이 중원 땅덩어리가 넓기는 어지간히 넓다.
그래서인지 그 안에는 정말 다양한 세계가 존재하고,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변방의 국가 간 전쟁은 황궁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 상계의 싸움은 상단에서 할 일이며, 무림의 일은 무림인이 해결하듯, 괴력난신의 해악은 역시나 도가 문파나 속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은둔 기인들이 해결하는 법이지.’
그만큼 구분 지어지고 경계가 분명한 각기 다른 세상들을 한 덩이로 점토처럼 주물럭주물럭 뭉개버렸던 마교가 그만큼 흉악한 것이지, 세상은 원래 그렇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래, 진혁수 같은 애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겠지.’
설마 당가가 그런 일에 얽히는 일이 오겠어?
대충 그렇게 상념을 털어 넘기고 있자니, 홍수월은 다시 한번 향로를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한데, 실로 잘 만들어진 법구입니다. 제작자의 공들인 정성이 이리도 훤히 느껴지다니. 이걸 만든 귀인이 참으로 궁금하군요.”
“아, 그 녀석요?”
뭐, 스승의 명예를 제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녀석이 그것을 등에 지고 새벽 공양으로 만들어낸 법구이니 보통 물건은 아니겠지.
그리고 그 녀석이라면 지금쯤,
“산 중턱이나 올랐지 않았을까요?”
“예?”
“자근자근 잘 다져줬거든요.”
건방진 소리를 하던 녀석의 뼈관절을 정성 들여 하나하나 고루 만져 줬다.
원래라면 한 삼 주쯤은 앓아눕게 만들 생각이었지만,
‘그동안 좋은 것 잔뜩 먹였으니, 지금쯤이면 청성산 중턱쯤은 올랐지 않았을까?’
겔겔겔―
오늘도 흉악한 미소를 머금는 집주인의 모습에 그저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 홍수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