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164화 (164/350)

164화

* * *

사천당가.

한때는 개같이 멸망했지만, 이제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입구를 장식한 화려한 현판과 그 안으로 들어선 으리으리한 전각들.

예전에 있던 다 낡아빠져 쓰러져 가던 것들은 싹 다 밀어버리고 새롭게 단장한 당가 내부는 누가 보더라도 일개 성 내에서 최고의 성세를 자랑하는 가문이라 생각할 만했다.

뿐만인가?

보이는 것만이 화려할 뿐 아니라, 그 내부에는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어 침입자를 격퇴할 준비가 되어 있고, 한때 몰락을 겪으며 줄어들었던 인구수는 붉은 바위 일족과 율도국의 유민들이 이주해 오며 일개 가문이라 불릴 만한 적정선을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들을 유지할 경제력도 확실하지.’

사천성주와 짜고 치며 짝짜꿍한 덕에 사천성 내 과반수의 사업체를 손에 쥐게 되었고, 광형상단과 장강수로상단 덕분에 사천 내수 시장에만 치우치지 않고 무림 전역에도 영향력을 뻗치게 되었다.

그렇다.

이제 진짜 더는 할 게 없게 된 것이다.

“…진짜냐?”

“그렇습니다, 형님.”

“진짜, 진짜진짜?”

“예, 그렇습니다.”

“진짜진짜진짜? 진짜 내가 할 일이 없다고?”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이제는 그간 못다 한 휴식을 취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놈이 말했다면 당장에 네놈이나 휴식을 취하라고 죽빵을 갈겼겠지만, 하필 이 말을 한 발언자가 당가 역사상 두 번째로 훌륭한 가주, 당위혼이라는 게 문제였다.

“형님께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가까운 별장을 알아두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휴가비로 사용하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위혼이 녀석은 탁자 중앙에 주머니 하나를 올렸다.

세상에, 이게 다 뭐래니?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은화나 동화 따위가 아닌 싹 다 금화였다.

“…이 많은 금액을 언제 다 준비해 뒀냐? 총관이 알면 날뛸 텐데?”

암만 이제 우리 집이 부자가 됐다지만, 몰래 뽀려 오기에는 너무나 흉흉한 액수가 아닐까?

“괜찮습니다. 제 사비를 모아온 것입니다.”

“가주 품위 유지비를 이만큼이나 모아왔다고? 왜 그동안 안 쓰고…….”

아, 쓸 시간이 없었겠구나?

생각해 보니 이 녀석만큼 금욕의 화신이 따로 없었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자마자 하는 게 무공 수련이고, 그다음에는 줄창 업무 삼매경이다.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가문의 성장세란, 그만큼 폭발적인 업무량의 폭증을 가져왔다.

식사도 전용 집무실 내에서 끼니를 때우는 게 평균이니, 그마저도 벽곡단으로 때우겠다는 거 사천 제일 숙수들을 불러 모아 만든 최고급 찬합(饌盒)으로 해결하겠다고 타협을 본 게 엊그제 일 같다.

‘이 녀석이 안 먹으면 방계놈들 싹 다 굶겨버리겠다고 단식 투쟁을 했던 게 벌써 몇 달 전이구먼.’

처음에는 단식 투쟁을 하면 직접 하시지 자기들을 끌고 오냐고 빼애액거리던 방계놈들도 이 가주 동생 녀석이 먹는 하루 식사가 아침 점식 저녁 벽곡단 한 알씩, 총 세 알이라는 것을 알고는 기절초풍하며 그 자리에서 드러누웠다.

“굉장히 아련한 표정을 지으십니다.”

“아니, 그냥… 너도 참 질기기가 쇠 힘줄 같다 싶어서.”

허허.

내가 할 말은 아니고, 또 방계 놈들 부려 먹은 입장에서 할 말도 아니지만 역시 팔은 안으로 굽고 열 손가락 깨물면 새끼손가락이 제일 아프다는 듯 이 녀석을 보자니 가슴 한편이 아련해졌다.

“너, 연애는 안 하니?”

“예?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아니, 그 왜 있잖냐. 천하의 불퇴 녀석도 붉은 바위 일족의 참한 아가씨랑 잘 사귀고 있는데, 너 정도 되는 녀석이 왜 젊은 이팔청춘을 이리도 삭막하게 보내고 있나 해서 말이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로, 이 녀석이 어디 가문이 달리나, 무공이 달리나, 인물이 달리겠냐?

누구네 집 직계 자손인지 몰라도, 위혼이 녀석은 얼굴 역시 결코 못나지 않았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그냥 잘생겼지.’

우락부락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또 비리비리하지도 않은 그런 체형.

항상 정갈한 의복을 입고 있지만, 그 안에는 다부진 육신이 깃들어 있고 그 위로 준걸(俊傑)의 풍모를 풍기는 얼굴이 장착되어 있다.

샌님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디 파락호 같지도 않은 딱 좋은 미형(美形)을 가지고 있으니, 집 안에 박혀 있지만 않고 밖으로 나돌아다니면 연심을 품은 아낙네들이 줄을 설 만했다.

‘그런데 왜 안 나가고 이런퀴퀴한 집안에만 박혀 있는 거야?’

에잉, 쯧.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냐? 내가 좀 도와줘? 아니면, 인력 좀 뽑아올까?”

“농이 지나치십니다. 제가 할 일이 남에게 맡길 일은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됐다. 내가 밖으로만 싸돌아다닌다고 업무에 대해서도 문외한일 듯싶더냐? 굳이 남에게 맡겨도 될 일을 네가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다니니 그렇게 스스로 업무를 등에 업고 다니는 거겠지.”

이제 보니 쉬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 녀석이었네?

“말 나온 김에 됐다. 우리도 가업을 좀 분업화 좀 하자꾸나. 아니지, 사람을 좀 채용하자꾸나.”

그래, 언제까지 이 녀석보고 일에만 치여 살라고 하겠어?

너도 좀 인생 즐겨봐야지.

“정말로 괜찮습니다, 형님. 게다가 저는 이리 보여도 일가를 책임지는 가주입니다. 아무나 만나서도 안 되고, 함부로 만나서도 되지 않습니다.”

“누가 아무나 만나라더냐? 내가 원하면 매파를 서줄 수도 있다. 사천 내에 내로라하는 명문가들이 너 한번 만나고자 줄을 서 있을 텐데, 그중 아무나 한 명 잡아 만나면 되지.”

“형님.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함부로 엮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는 단호히 말하는 당위혼이었다.

“아니, 너는 나이도 어린 게 왜 이렇게 고지식하냐?”

누가 혼인이라도 하라고 했냐?

그냥 연애만 하라니까?

“툭 하면 이 핑계 저 핑계로 만나고 헤어지며 연분이 생겼다 틀어지는 게 이팔청춘이라거늘… 에잉, 쯧쯧.”

암만 말해도 들어먹을 생각이 없는 듯하다.

‘누가 누구 손자 아니랄까 봐.’

생각해 보면 당사유 그 녀석도 이런 면에서는 고지식하기 그지없더라니…….

더 말해 봐야 소용없음을 한탄하고 있자니 당가의 어린 가주는 기어코 자신의 대형의 품에 금화 주머니를 안겨주고 밖으로 내몰았다.

모처럼 할 일이 없나 하고 슬그머니 가주실로 찾아왔던 전 당가의 태가주치고는 실로 초라한 퇴장이었다.

“…하아. 이다지도 할 게 없다니.”

할 게 없다.

진짜로 할 게 없다.

‘이럴 때는 방계놈들이라도 쥐어패고 싶지만…’

문제는 이제 방계놈들도 더 이상 쉽게 못 팬다는 것이다.

당연, 방계들의 무력이 이제 쉽게 손을 쓰기 힘들 정도로 드높아졌다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이유는 아니었다.

‘이제 그놈들도 하는 일이 많아졌단 말이지…….’

그들은 새벽부터 일어나면 당가 내부의 노동에 투입된다.

외부에 드러나 보이는 전각들은 다 지어졌다지만, 아직 율도촌 등은 손볼 구석이 많이 남아 있다.

율도촌이라 불릴 만한 최소한의 구색은 갖춰졌다지만, 그건 진짜 최소한의 구색일 뿐이지 이리저리 더 지어야 할 게 많다.

‘그렇다고 수련 시간을 빼자니, 더 이상 녀석들이 혼자 수련하는 게 아니니까.’

장강을 한번 다녀오고 나니 붉은 바위 일족과 부쩍 친해진 방계들은 거의 매 순간 그들과 함께 수련한다.

격주마다 한 번씩 열리는 당적지무를 위해 개인전이든 집단전이든 서로서로 교류하며 발전하고 있으니, 괜히 그 자신의 심심풀이를 위해 빼내기도 힘들었다.

“물론, 아주 할 게 없는 것은 아니야.”

멍하니 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이토록 발전했고, 또 발전해 가는 당가지만 갈 길은 아직 멀었다.

삼십 년도 더 전, 그때의 당가와 지금의 당가를 비교해 보자면 저 하늘과 자신이 밟고 선 땅 수준의 차이가 있다.

하나, 그렇다 해서 지금 당장 재촉한다고 뭐가 될 리도 없는 일이다.

‘분명, 할 것은 많다. 더 강해져야 되는 것도 강해져야 될 일이지만 마교놈들의 잔재가 어디서 야욕을 부리고 있을지 모르니 그 역시 경계해야 한다.’

겉으로야 웃고 지내지만, 당유혼의 속에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건 결코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기에 품에 끌어안고 살고 있으나, 그렇다고 지금 가만히 손을 놓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강에서는 육언과 백경이 조사하고 있고, 하윤호 역시 물밑으로 그들의 존재를 추적하고 있겠지. 그럼 사실상 당가를 움직인다 한들 더 효과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괜히 위험 부담만 가중될 뿐.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셈이 된다.

그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요?”

에잇, 어차피 답 안 나오는 거 생각해 봐서 뭐 해?

이럴 땐 전문가 상담을 받아야지 않겠어?

“응, 심심해.”

‘아니……!!’

미친놈이?

‘내가 암중으로 마교를 추적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제 입으로 말해 놓고서도 날 찾아와?!’

바로 전까지 온몸을 갈아 넣으며 파멸적인 격무 속에 시달리다 당유혼의 호출로 급히 뛰쳐나온 하윤호는 입가에 매달아 놓은 거짓 미소가 깨지려는 걸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하… 하하… 시, 심심하십니까요? 아이구, 그러시면 아니 되겠습지요.”

마음 같으면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네가 심심한 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외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분명……. 그럼 상관있게 해줄까? …라고 말할 게 선명하니…….’

굳이 뻔히 보이는 위험천만한 미래로 몸을 내던지고 싶지 않은 하윤호는 필사적인 표정 관리와 함께 머리를 굴렸다.

“흠… 하지만 정말 저랑 농담 따먹기나 하시러 오셨지는 않으실 듯합니다요.”

“아무렴, 내가 암만 할 게 없어도 너 같은 삭막한 아저씨랑 짝짝꿍 하고 있겠냐?”

일 줘.

쉽게 말하면 그런 소리였다.

“끄으응…….”

말하는 방식이야 그래도, 사실 본론 자체는 하윤호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언제나 인력난에 시달리는 하오문 특성상 눈앞의 무뢰배 정도나 되는 인력이 스스로 자원해서 온다면 분명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러니 더더욱 아무 일이나 맡겨서는 안 되지.’

일을 달라고 해서 진짜 아무 일이나 원하는 게 아니다.

딱히 보수를 바라고 온 것이 아닐 테니 돈 되는 일을 맡겨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일을 맡겼다가는 더욱 큰일이 날 터였다.

‘자신에게 필요하고, 자신이 필요한 일을 찾아달라는 의뢰에 가까울 테니…….’

그것은 참 쉬우면서도 어려운 문제였다.

어쨌거나 눈앞의 무뢰배가 자신과 같은 배를 탄 동업자인 이상, 그와 관련된 일을 찾아보면 쉽게 결론이 나온다.

다만,

‘내가 그렇게 쓰기는 싫단 말이지.’

말하는 꼬락서니는 아니꼬워도, 분명 그 존재 자체는 천하에 둘 없을 명검.

한때 자신이 탐내던 최상품의 복검(腹劍)인 만큼 함부로 천하를 향해 휘둘러 그 예기를 손상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당장 해결하기 어려우면서도 이자에게 맡기거나 당가의 도움을 받을 문제가…….’

머릿속을 뒤적거리며 그 안에 들어 있을 방대한 정보량을 허덕이던 그때,

“아.”

하윤호는 문득 떠올렸다.

최근 들어 들어오는 굉장히 수상하지만, 또 자신이 처리하기에는 애매한 그런 건수가.

“소협. 혹시 민생 안정에 힘써보실 생각은 없으니까요?”

참으로 사파가 하기에는 힘든, 딱 정파 협객의 도움이 필요한 그런 문제가 하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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