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가유혼-169화 (169/350)

169화

【흑접(黑蝶)】

진혁수가 공간을 빠져나가고, 홀로 남은 당유혼은 고개를 돌려 어느새 텅 비어버린 통로를 쳐다봤다.

“자, 그럼. 쫓아가 볼까.”

한 대 맞고 한 대 갈겨 주는 정정당당한 공방.

원래라면 전투가 이어졌어야겠지만, 넝마의 괴인은 그 한 대를 맞자마자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야말로 괴이한 경우지만, 당유혼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여기 처박혀 있었나, 나태(懶怠).’

나태(懶怠).

그 이름은 행동이나 성격 따위가 느리고 게으른 천성을 뜻하지만, 또한 한때는 전 무림을 공포로 떨게 만들던 일곱 종파 중 하나를 상징했다.

“사교도 소굴인 줄 알았는데, 마교도 소굴이었다 이거지?”

히쭉―

웃음이 흘러나왔다.

전신을 핏물로 물들인 상태에서 피어나는 웃음꽃은 살벌하면서도 위험한 향기를 풀풀 풍겼다.

‘하윤호, 드디어 밥값을 하는구나.’

단전에 똬리를 틀고 있던 탐이 육중한 몸을 일으켰다.

이젠 녀석 역시 마기에 감응하듯 반응하니, 중단전을 통해 흘러나온 검푸른 기운이 전신을 휘감으며 삶의 의지를 활성화시켰다.

‘그동안 너무 평화로웠지.’

알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당가의 모습 덕분에 한동안 뒷방 늙은이마냥 처박혀 있던 몸뚱이에 활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가보자고.’

파팟!!

한줄기 검푸른 섬광이 되어 통로를 질주했다.

순식간에 긴 거리를 좁혀 도달한 곳은 어느 커다란 공동.

등 돌린 채 주저앉아 있던 넝마 괴인이 침입자의 등장을 알아채고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귀찮… 았… 는… 데…….”

“그래, 귀찮았겠지.”

한 대씩 주고받고 사라진 넝마 괴인.

녀석이 사라진 이유는 말 그대로였다.

‘더럽게 느릿느릿하고, 더럽게 게을러 빠져서는, 탐 녀석보다 더 나태한 놈들.’

그게 바로 나태종에 속한 놈들의 특징이었고,

“안 그러면 나태의 마수겠나?”

그 기질로 똘똘 뭉친 나태의 마수가 바로 넝마 괴인의 정체였다.

“너어…….”

넝마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으나,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뻔해 보였다.

“어떻게 알았냐고? 뻔하지. 싸우기 귀찮아서 도망치고, 일하기 귀찮아서 어디 숨다가 죄수의 옥쇄를 강제당한 채 일하는 놈들이 너희밖에 더 있냐?”

뻔하디뻔한 적의 존재를 바라보며 천천히 주변에 가득한 관을 둘러봤다.

아까 제단에서도 한 번 본 풍경.

비슷한 걸 보니, 딱히 이곳이 더욱 깊은 심처라기보다는 이런 공간이 여럿 존재하는 듯했다.

다만, 다른 게 하나 있다면,

달칵… 달칵…….

그 관들이 서서히 열리더니, 안쪽에 있던 이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것.

“너… 수상한… 위험한…….”

그 속에서 나태의 마수는 느릿하고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제거… 한다…….”

그리고,

파팟!!

또다시 나태의 마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온다!’

그 사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두 팔을 겹쳐 전방을 향해 방어 자세를 취했고,

콰아아앙!!

그대로 후려쳐져 뒤로 날아가 처박혔다.

“…크하!!”

뒤늦게 터져 나오는 피가래 섞인 비명!

분명 인지하고 있음에도, 이전보다 더욱 빨라진 속도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것이다.

‘역시, 더럽게 빠르잖아.’

느릿느릿한 몸동작과 달리 그 움직임은 눈으로 좇기도 힘들다.

그리고, 그것이 나태종(懶怠宗)의 특징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느려터진 게 아냐. 오히려, 그들 자신은 너무나 빠르기에, 세상이 상대적으로 느릿느릿하게 보이는 거지.’

그런 놈들이기에, 중단전을 활성화시킨 지금도 그 속도를 따라가기 버겁다.

하지만,

‘대신, 그 대가로 너희는 생각조차 단순해 빠졌지.’

정작 기습적인 공격을 성공시킨 나태의 마수조차 상태는 좋지 못했다.

“끄어… 끄… 끄어어……!!”

기습을 성공시킨 한쪽 넝마가 통째로 녹아버렸고, 그 안쪽에 있던 것들 역시 함께 녹아내려 진물을 뚝뚝 흘렸다.

‘나태종의 특징은 최속(最速)이라 불릴 만한 속도를 가졌음에도, 오히려 그 반대급부로 생각도 행동거지도 게을러터졌다는 것. 즉, 공격 발상 역시 단순한다는 거지.’

직선거리로 최속으로 달려가 때려 부순다.

변화도 속임수도 없지만,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지녔기에 가능한 그 전략은 실제로 대부분의 무인들에게 파멸적인 효과를 자랑했다.

‘보이지 않으니까, 게다가 너무 빠르니까. 검을 휘두를 찰나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압도적인 속도로 상대방을 박살 내는 게 주된 전략.

하지만,

‘나는, 굳이 보일 필요가 없지. 방향과 순간만 알면 함정을 깔면 되니까.’

꿀렁… 꿀렁…….

“어때, 정신이 번쩍 드냐?”

돌 더미를 무너트리며 일어서는 당유혼의 앞쪽 대기가 기이한 흔들림을 보였다.

“너희를 위해 준비한 극독이야.”

스르르…….

동시에, 중단전을 통해 활성화된 탐이 반투명한 형상으로 당유혼의 몸을 휘감으며 혀를 날름거렸다.

그 앞에 있는 것은 짙은 독의 장막.

어차피 공격당할 방향도, 시간도 전부 알고 있기에 그 자리에 함정을 설치해 두었고 나태의 마수는 그곳에 스스로 몸뚱이를 처박은 것이다.

“으어… 아파… 아파… 아파아……!!”

어린아이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찌나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지 공동이 뒤흔들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화풀이가 아니었으니,

“그으으…….”

“그으으으으…….”

“그으…….”

관속에서 몸을 일으킨 존재들이 그 괴성에 반응하듯 적의를 물씬물씬 품어내기 시작했다.

“흐흐, 머리를 쓴다는 거냐?”

직접 다가오기 싫으니 부하들을 보낸다?

생각하면,

“참 너희 다운 결정이야.”

몸 움직이기를 귀찮아하는 나태종이기에, 그들은 원래도 자신을 대신할 하수인을 잔뜩 만들어 두었었다.

“그으읏…….”

“그어어어!!”

그리고 그 하수인들 역시 나태종에 속한 만큼 쾌속무비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그래서, 더 고맙고 말이야.’

몸을 일으키는 마물의 숫자는 물경 수십에 이른다.

마수(魔獸)가 되지 못해, 마물(魔物)에 불릴 뿐인 놈들이라지만 이 정도면 어지간한 무림방파는 하룻밤 만에 지울 만한 전력이겠지.

그럼에도 당유혼은 웃었다.

그런 건, ‘어지간한 무림방파’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니까.

“먹어 치워라, 탐.”

혼원신공(混元神功).

탐(貪).

식(食).

쩌억―

공동 일대에 어둠이 드리웠다.

바닥에 균열 같은 게 생겨났고, 그것이 무언가의 쩍 벌린 아가리라는 것을 눈치챈 이들은 없었다.

그들이 채 눈치채기도 전에, 탐(貪)이 포식을 시작했으니까.

콰직, 콰직, 콰직!!

몸을 일으켰던 마물들이 한 줌의 혈수로 돌아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격하(格下)의 것은 삽시간에 먹어 치우는 흉포한 맹수가 마물들을 먹어 치웠고, 그것을 꾹꾹 삼켜 마기로 환원시켰다.

“크흐…….”

강렬한 마기가 차오르며 온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강대한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육체가 죽어 나가는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지, 끊임없이 울혈이 역류해 목구멍을 통해 토해지지만,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그 정도는 돼야, 저 끔찍한 놈을 때려죽일 만하지 않겠냐?

“너어… 그 힘… 어째서…….”

“징그럽지? 나도 알아. 너희 상대할 때마다 내 심정이 그렇거든.”

그러니까, 이제부터 그 힘을 실컷 겪어보라고.

혼원신공(混元神功).

탐(貪).

지독(至毒).

푸확!!

흡수되었던 마기가 역으로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얼마나 많은 마기를 흡수했던 것인지, 퍼져 나가는 마기는 대해의 파랑과 같이 공간을 덮쳤다.

“…그, 오옷……?!”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피할 공간 자체를 점유해 버리며 퍼부어지는 독의 파도는 나태의 마수를 뒤덮고,

“그오… 오오오……!!”

그 거체를 통째로 녹여버리며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다!

“흐흐, 그게 네 본체냐?”

거구를 덮고 있던 넝마가 녹아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한 유충(幼蟲).

여덟 개의 다리에 쇠사슬을 매달고 있는 그 기괴한 행태에 당유혼은 비쭉 웃었다.

“아주 어울리는 생김새구만?”

- 그아… 아아아……!!

터져 나오는 목소리가 변화했다.

더 이상은 사람의 언어를 흉내 내는 것도 포기했는지, 괴이한 목소리가 동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죽인… 다… 죽… 여……!!

콰아앙!!

분노에 찬 거대한 유충이 돌진했고, 그 거대한 동체는 잔영만을 남기며 사라졌다가 전방에서 나타났다.

또다시 벽에 처박혀야 했지만, 몸뚱이가 녹아내린 것은 마수 역시 마찬가지!

“하하하! 좋아, 죽일 수 있다면 죽여봐라!”

핏물과 마기, 마수의 체액과 독액으로 범벅이 된 당유혼의 입에서 광기 어린 포효가 터져 나왔다.

죽고 죽이는 혈투가 시작되었다.

* * *

지하에서 대혈투가 벌어지는 동안 지상은 나름 평화로웠다.

“형님.”

“왜.”

“저희 진짜 이러고만 있어도 괜찮을까요?”

습격다운 습격은 개뿔, 지나가는 들짐승 하나 없다.

밤하늘 아래에서 모닥불 하나 피워놓고 타닥타닥 불멍이나 때리고 있는 게 현실이니, 당불퇴로서는 여간 좀이 쑤시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난들 알겠냐.”

나라고 다르겠냐고.

퇴로 확보?

말은 좋다.

하지만 퇴로든 나발이든 뭐가 나타나는 게 있어야 막아 내고 확보를 하지 않을까?

“…진짜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하나.”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은 당지명은 슬쩍 홍수월을 돌아봤다.

‘만일의 경우, 저분의 조언을 들으라고 했지.’

오만하기 짝이 없는 대형이 인정한 상대.

잘 아는 것은 없지만, 아까 부린 술수로 보아 확실히 보통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래서 슬쩍슬쩍 눈치만 보고 있자니,

“말씀하시지요.”

묵묵히 명상을 취하고 있던 홍수월이 어느새 두 눈을 반개한 채 자신을 쳐다보며 말을 걸어왔다.

“옙?”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아닙니까?”

“어… 그, 그게…….”

진짜 신통력 같은 것이라도 있나?

순간 당황한 당지명이지만, 이내 결심을 내리고 물었다.

“그… 계속 여기 있어야 할지 싶어서 말입니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형을 돕고 싶습니다.”

진작 따라가지 못한 것은 정말 자신이 당유혼의 발목을 붙잡을까 봐서였다.

정말 상정하지 못할 적을 만날 시, 자신이 발목을 잡을까 두려웠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력하게 앉아 있기만을 원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군요.”

홍수월은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슬슬, 적들도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으니까.”

“그게 무슨…….”

“형님!!”

말뜻을 따라가지 못해 당황해할 때, 당불퇴의 비명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 마을 사람들이!!”

그에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인 풍경은,

흠칫!!

‘뭐, 뭐야?’

“끄으으…….”

“으어어…….”

쓰러져 있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완전히 진면모를 드러내는군요. 섣불리 다가가지 마시지요. 더 이상은 망자(亡者)조차 되지 못한 이들이니.”

어느새 서늘하게 가라앉은 홍수월의 목소리가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나긴 밤이 될 듯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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