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이런.’
어느새 포위망에 갇혔다.
정신 차려보니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마을 사람이 아닌 마을 사람들이었던 것이 되어 있다.
두 눈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혈광은 딱 봐도 사람이 아닌 듯했다.
“저거… 아까 심령인가 뭔가를 끊었다고 안 했습니까?”
“그랬네만, 저건 무언가에 연결된 게 아닌 듯하군요.”
“예?”
그 차이가 뭔지 이해하지 못하는 당지명을 위해 홍수월이 말했다.
“이미 저들을 조종하던 이들은 통제를 포기한 듯합니다. 대신, 저들 내부에 있던 무언가 술법적인 장치를 기폭시켰고, 그 영향으로 저들은 방향성 없는 적의를 사방에 뿜어내는 겁니다.”
즉, 이지를 상실한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것.
그 뜻을 이해한 당지명의 인상이 왈칵 찌푸려졌다.
“사술(邪術)을……!!”
진정한 의미의 사술이었다.
사이한 술법을 부려 사람들을 이지를 상실한 괴물로 만들어버린 미지의 적에 분노를 토하며 당지명은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저들을 다시금 원상태로 돌릴 방법은 없습니까?”
“지금은 도저히 보이지 않는군요. 게다가…….”
홍수월의 말이 끊겼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뒤편으로 또 다른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이… 끝이 아니었나?”
물경 일백을 넘어가는 머릿수.
하지만 홍수월은 그마저 너머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건 제단이군요, 아니… 공방이군요. 산 사람을 바쳐 무언가로 만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 일대 전체가 진법의 매개체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적들에게 유리한 흐름이 불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알지 못했지만, 홍수월은 지금 술법으로 안력을 강화하며 주변에 놓인 흐름을 역추적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말은 두서가 없었고, 친절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자신이 깨달은 것은 언어를 통해 정리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 개떡 같은 말에도 당지명은 찰떡같이 알아듣는 데 성공했다.
‘흐름? 진법? 그거 완전 삼재진이잖아?’
동시에 당불퇴도 같은 답을 내렸다.
“형님. 이거 삼재진 아닙니까?”
“비슷한 것 같은데? 쯧, 이때 율기만 있었어도…….”
술법은 모르겠다만, 진법이라면 자신 있었다.
삼재진이라면 몸에 배듯 수련했고, 당율기가 있었더라면 뭔가 유의미한 변화를 꾀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는 당율기도 없고, 그래서 삼재진을 펼칠 여력도 없다.
다만, 그럼에도 한 가지 결론에는 도달했다.
“술법사 양반. 내가 다른 건 모르겠는데, 진법이라는 것은 핵이 있는 거고, 그걸 깨부수면 되는 것 아니요?”
“맞습니다. 제가 그 흐름을 역추적해 보겠습니다.”
그즈음에서 홍수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안에 펼쳐진 술법진이 대체 어떤 효과를 지니고 있고, 어떤 형식으로 되어 있는지 알아낼 시간은 도저히 없었기에 가장 단순한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할 게 있습니다.”
“아아, 그건 잘 알지.”
그르르르…….
그르…….
이제는 완연히 그림자로 뒤덮인 밤의 숲.
그 속에서 당불퇴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며 으르렁거렸다.
“일단, 이 죽지 못한 이들에게 안식을 선사하자고.”
* * *
쾅! 콰아앙!! 쾅!!
지하 공동 속에는 굉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 소리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려주듯, 공동 여기저기에는 움푹 들어간 파괴흔이 가득했고, 지금 막 생성된 곳에서 돌 더미를 우수수 무너트리며 당유혼이 걸어 나왔다.
‘빌어먹을 놈. 이게 몇 번째 처박힌 거지?’
벽에 처박힌 횟수가 열을 넘긴 이후로는 더 이상 숫자를 세지 않았다.
퉤― 하고 침을 뱉으니 내장 파편 섞인 핏물이 떨어져 나왔고, 지이잉거리는 이명이 들려오는 귀를 쾅쾅 두들겨 원상태로 복구시켰다.
그러고도 어질어질한 현기증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런 당유혼의 상태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적의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 그어… 아파… 아프다아아……!!
여덟 개의 다리 중 다섯 개가 녹아 있고, 몸뚱이의 절반이 짓눌리듯 사라져 있는 모습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유충의 머릿속에 든 것은 고통보다는 의문이었으니.
- 어떻게… 이런… 독이…….
최속의 마수.
그들, 나태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이명은 금강불괴(金剛不壞)였다.
“믿을 수 없나? 네놈의 몸뚱이에 이 정도로 피해를 줄 수 있는 독이 있다는 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들어 충격을 가하는 나태종은 그 부하를 견딜 만한 육체를 타고났다. 그들 마수들은 하나 같이 도검불침쯤의 능력은 우습다는 듯 가지고 있었고 하나하나가 쇠보다 단단한 몸뚱이를 지니고 있었다.
물리력에 대한 저항은 물론, 독에 의한 내성조차 지니고 있는 그들이었다.
특히나 마수라는 상위 종족이었기에 독에 당한다는 상황 자체를 상상하지 못했겠지.
‘실제로도, 지난번 마교대전에서 당가의 독은 대부분이 그들에게 유효한 효력을 내지 못했지.’
일반적인 독은 목욕을 하듯 퍼부어도 끄떡이 없었고, 당가칠대금기에 해당하는 독 정도나 되어서야 그나마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그래서였다.
‘어떻게 하면 마교도놈들에게 통하는 독을 줄 수 있을까?’
그건 평생을 궁구한 숙제였고, 죽기 직전에 몇 가지 해답을 내놓을 수 있었으니,
‘그 답은 너희들이 주었다.’
독천마(毒天魔).
한때 마교도들에게 죽음이라 불리우던 자신의 이명.
그리고, 그로부터 만들어낸 새로운 독.
유충 형태의 마수 역시 그 정체를 깨달았으나, 그럼에도 믿기지 않아 비명을 토했다.
- 어떻게… 마기(魔氣)로… 이루어진… 독이…….
마기로 만들어져 자신의 본질인 마기(魔氣)를 파괴하는 독.
“천마살(天魔殺)이라고 불러라.”
못다 한 원한을 담아, 잘근잘근 씹어뱉듯 그 이름을 불렀다.
- 뭐어……? 네… 놈… 감히……!
자신들이 숭배하는 이가 모욕당하자 나태의 마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계속되는 고통과 죽음의 위협, 그리고 천마에 대한 모욕까지 더 해지자 강대한 마기가 폭발하듯 흘러나왔다.
- 그오… 오오오……!!
“네 녀석도 마지막 한 수가 있다는 거냐?”
뭐든 상관없다.
닥쳐올 공격에 앞서 더더욱 독기를 끌어올릴 뿐.
그런데,
“응?”
파팟!!
금방이라도 덮쳐들 것 같던 녀석이 몸을 돌리더니 저편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도망치는 거냐?”
이건 계획상에 없었는데?
“이런 미친!!”
반쯤 녹아내린 몸뚱이로도 어마어마한 속도를 자랑하는 녀석은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멀어져갔다.
“거기서……!!”
그 뒤를 쫓아 달려 가려는데,
푸화악!!
뒤편에서 서늘한 예기가 느껴지더니 날카로운 검기가 날아들었다.
‘쯧!’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공격에 머리를 숙여 피해 내니, 날카로운 검격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기습적인 검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이번엔 종(縱)으로 내리꽂혔다.
그걸 또 피해 내니 횡 베기가 사각을 노리고 날아들었고, 검면을 손등으로 쳐내니 이번엔 대각선 베기가 날아들었다.
두 자루 검격이 교차하며 날아드는 데 그 어떤 것도 서로의 궤적을 방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각자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귀신같이 그 빈틈을 메우며 이어졌다.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쌍검술이 펼쳐졌다.
‘왜 하필…….’
그것이 얼마나 끈덕지게 들러붙는지 결국 당유혼은 마수를 추적하길 단념하고 두 손을 움직였다.
질척이는 독기를 집어넣고, 웅혼한 내공을 끌어올려 두 주먹에 잔뜩 담았다.
그러든 말든 이어지는 검격은 무수한 검영을 그리며 시야를 현혹했으나, 당유혼은 그 속으로 몸을 던지며 두 주먹을 내뻗었다.
꽈앙!!
묵직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쌍검을 든 검수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나풀나풀 실 끊어진 연처럼 나가떨어지던 검수는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돌더니 다시금 자세를 잡아 착지했다.
“하아…….”
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검수를 보며 당유혼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혁수, 이 새끼야. 넌 또 왜 그 꼴이냐?”
두 눈에 정광이 사라지고 오로지 혼탁함만이 가득한 검수.
그 정체는 바로 진혁수였다.
‘기껏 탈출시켜놨더니…….’
어디서 쉽게 당해 주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혼자 보냈더니, 어디 사교도 놈들한테 세뇌라도 당했는지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섭혼술인가?’
무림에는 예로부터 섭혼술(攝魂術)이라 불리는 게 있어, 이걸 사용해 사람의 이지를 망가트리고 괴리인형으로 부리는 놈들이 몇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표적으로 마교도 놈들이 있었다.
‘하지만, 섭혼술이란 게 마냥 편한 술법은 아닐 텐데.’
타인을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게 그리 쉽게 되는 게 아니다.
이런저런 제약도 필요하고, 시간도 꽤 많이 걸린다.
특히나, 정순한 내공을 지닌 이일수록 그 제약은 더욱 복잡해져서 쉽게 세뇌하기도 힘들었다.
그럼 단순히 세뇌당했다는 뜻은 아닌데…….
“…미친, 설마 무아지경(無我之境)이냐?”
반개한 눈.
탁 풀린 동공.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침도 줄줄 흘러나온다.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닌 모습.
‘이 자식들, 지들 입맛대로 주물러 놓을 수 없으니 대충 이성만 잃게 하고 던져놨구나!’
“청운이 흐르고 적하가 드리우면, 그 아래 반개한 구름 사이로 개벽의 빛무리가 번져 나오니 그 시간을 찰나와 같아도 붉음과 푸름이 공존하고…….”
“미친놈, 여기가 어디라고 지 무공 구결이나 읊고 있어?”
무공 구결을 읇는데 그치지 않고 허공에서 몇 번이나 검을 붕붕 휘둘러보기도 하는 게, 스스로 그 검로를 찾아가고 있는 듯했다.
‘이거 위험한데?’
무인이 무아지경에 이르는 것은 자아를 잃고 스스로 각성 상태에 이름을 의미한다.
기존 상식과 제약의 굴레에서 벗어나, 오로지 한 가지 맹목적인 목적만을 추종하는 무아(無我)의 상태가 바로 그것.
숨만 쉬어도 오만가지 잡생각이 드는 인간이 그 지경에 들어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한 번 진입하기만 하면 그때부턴 식음을 전폐한 채 그것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하필 저 녀석이 빠져든 것은 무공!
“…이게, 아닌가?”
스슥― 슥―
몇 번 허공에 검을 휘적거리던 진혁수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제자리에서 휘두르던 검무를 멈췄다.
그리고,
“아, 여기 보지 마. 다른 쪽 봐. 훠이, 훠이!!”
“검… 휘두른다… 벤다…….”
“…그래, 기대도 안 했다.”
다시금 청운적하검을 펼쳐온다.
청운적하검(靑雲赤河劍).
운공관일(雲空貫日).
‘큭?’
방어를 포기한 채 날아드는 공격 일변도의 검격!
생사를 도외시 한 채, 무공의 완성만을 바라보기에 펼쳐지는 검격은 예리하기 그지없다.
‘이 미친놈이!’
당유혼은 속으로 쌍욕을 뱉으며 찌르기를 피해 냈다.
분명 이 불완전한 검격은 빈틈 투성이었다.
만약 마교도가 이따위 검을 펼쳤다면 감사합니다! 하고 목을 분질러 줬겠지.
하지만,
‘무슨 빈틈을 노리면 다 죽어버리는 것밖에 없어?’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고안된 초식의 시현은, 어디 하나 잘못 치는 순간 억― 하고 뒈지기 딱 좋게 펼쳐졌고, 당장 진혁수를 죽일 수도 없는 당유혼은 그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걸렸, 어.”
불협화음과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진혁수의 혼탁한 눈이 이채를 발했다.
동시에 그 검의 궤적이 기이하게 꺾이더니,
서걱―!
날카로운 절삭음이 공동 내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