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위험했네.’
철컥…….
손목에 차고 있던 수련용 철갑이 끊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거기서 검의 궤도를 바꿔?’
피했다 싶은 순간 수직으로 턱밑을 노리는 검격.
수련용 철갑에 내공을 둘러 막아냈으나, 어찌나 예리한 일격이었는지 철갑이 잘려 나갔다.
하지만,
“미친놈. 검 한 번 휘두르려고 팔을 포기했냐?”
그 한 번의 검을 휘두르는 대가로 진혁수의 팔은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순수하게 무(武)에 미쳐서, 자기 자신조차 잃어버린 상태.’
단 한 번 완벽한 검의 궤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다 버릴 수 있는 것이 무아지경이었다.
그리고,
“이거… 다…….”
만족스럽게 웃음 지은 진혁수는 그대로 픽― 하고 쓰러져버렸다.
모든 걸 조금 전 일검에 바친 대가로 온 기력을 다하고 혼절한 것이다.
“…이놈 참 위험천만한 놈일세. 뭘 잘했다고 웃어?”
비록 유효타를 먹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애초부터 진혁수가 원한 것은 자신이 꿈에 그리던 무(武)를 현실로 이끌어 내는 것.
결과야 어쨌든, 자신이 보고 만족할 만한 검초를 그려낸 진혁수는 혼절한 채로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숨을 한번 푹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나와라.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흐, 감이 좋구나.”
공동의 모서리 한편.
그쪽에서 딱 봐도 나 수상한 놈이요, 하는 듯한 넝마를 쓴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있는 것을 어찌 알아챈 것이지? 이 땅의 신성한 가호가 나를 품어주고 있을 텐데…….”
“뭐라는 거야? 숨을 거면 잘 숨든가.”
느글느글거리는 기운이 몸서리치게 느껴진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폐가 썩어들어 갈 것 같은 끔찍한 악취랄까?
“좀 씻고 살아라. 더러운 마교도 놈들 아니랄까 봐 냄새가 코를 치르는구만.”
“흐, 더러운 불신자답구나. 신성한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도다.”
뭐지?
이 새끼 지금 나랑 대화하는 거 맞나?
가만 놔뒀다간 영원히 평행선상을 달릴 것 같은 문답이다.
‘그래, 마교도 새끼들이랑 대화는 무슨 대화.’
진혁수는 검에 미쳐서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지만, 더러운 마교도놈들은 그냥 하루 십이 시진 전부가 무아지경이다.
나는 없고 신앙에 도취되어 광신에 매몰된 상태.
그런 놈들과 섞을 것은 설왕설래 혀가 아니라 독과 암기뿐이다.
매끈한 피부를 가르고 쌈박하게 암기를 쑤셔 넣고 휘적휘적 독을 섞어주면 그게 진정한 의미의 대화지, 암 고렇고 말고.
“그래, 많이 동정해 줘. 이왕이면 동정하는 김에 목도 예쁘게 빼주면 고맙겠고.”
그래야 썰어가기라도 쉽지 않겠니?
“크크크, 꿈도 크구나. 그리고, 감히 너 같은 불신자 따위가 위대하신 그분의 세례를 받은 이 몸에 손을 댈 수 있을 것 같으냐?”
짜악―
합장을 한 번 하자 그게 신호인지 뒤편에서 우르르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한 자루씩 철검을 꼬나쥐고 있는 게, 처음에는 드디어 마교의 검대(劍隊)가 나왔나 싶었지만…….
“…하, 이러니까 저놈이 당했지.”
어째 익숙한 복색에 덜 떨어진 눈동자들이 안면이 익다.
사실 개개인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청성파 새끼들. 제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그들의 정체가 이곳에 왔다가 실종 처리된 청성파 제자놈들이란 것은 알 만했다.
“흐흐흐, 시간이 없어 더러운 흔적을 지우고 갱생의 은혜를 내리지는 못했으나… 결국 그것 역시 이들의 운명. 죽음으로서 그 죗값을 갚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일이겠지.”
중얼중얼.
놈이 무어라 진언을 외우자 곧 음습한 마기의 유동이 일더니, 청성파 제자들을 휘감았다.
“끄으으악!!”
“끄아… 괴, 괴로워!!”
청성파 제자들은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들에게 느껴지는 기세가 몇 배로 증가했다.
부리는 이들에게 강화 효과를 주는 능력.
“어째 악취가 심하다더니, 사제였나?”
“흐… 이 땅의 신성한 신도들에게 그분의 은혜를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지.”
사제 계급.
직접적으로 무공을 사용하기보다는 마공을 익힌 이들에게 가호를 내려주고 능력치를 몇 배로 상승시켜주는 이들을 뜻했다.
대표적인 중단전 사용자들이며, 일대일이면 만만하지만 집단전에서는 제일 짜증나는 놈들이었다.
다만,
“너, 진짜 자신 있냐? 내가 아까 너희가 숭배하던 그 마수놈 죽이기 직전까지 몰고 간 것 못 봤냐?”
그래봐야 절정도 이르지 못한 검수들을 강화시켜서 뭐에 써먹겠다고 이렇게 당당해?
“흐흐흐흐, 건방진 놈. 착각도 유분수라더니, 네놈 따위가 진정 그분의 옥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지만, 사제놈은 한결같은 미소를 지었다.
‘진짜 정신이 나가버린 건가?’
쥐어 터지고 도망친 놈에 뭐 저리 맹목적 믿음이 드는가에 대해 합리적 의심이 차오를 때,
“보아라. 아직은 준비 단계이나, 특별히 더러운 불신자인 네놈에게 가장 먼저 위대한 기적을 마주할 은혜를 베푸마!”
사제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소리쳤다.
그리고,
구우우우웅!!
장내에 흐르는 마기의 유동이 몇 배로 강화되었다.
그제야 이곳이 단순한 마교도 소굴이 아닌, 제사와 의식의 역할을 겸행하는 곳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뭔가 구린 걸 꾸미고 있다 싶더니, 이런 거였나?’
당연하게도 마기의 유동은 청성파의 검수들에게도 더욱 강대한 효과를 발휘했고,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더더욱 상승했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존재감은 어느새 스물세 명의 일류 검수가 스물세 명의 절정 검수로 변화했음을 알려주었다.
“흐하하하하, 위대한 기적을 체험하게 해주마!!”
스물세 명의 절정 검수부터는 결코 우습지 않다. 거기다, 마수놈이랑 생사결을 치르느라 몸 상태가 개판인 이 상태에서는 더욱더.
그 사실은 사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신성한 은혜는 믿는 자들에게는 축복을 내리고 더러운 불신자들에게는 거동하기도 힘든 중압감을 선사한다. 네가 얼마나 날고 기는 놈일지 몰라도, 이곳에서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넘쳐흐르는 힘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는 쾌감이 더더욱 사제의 기분을 고양시켰다.
하지만,
“…쯧, 진짜 시간이 흐르긴 흘렀나 보다.”
들려오는 것은 혀를 차는 소리.
진심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사제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정파 새끼들이야 알아서 썩어 문드러질 것 정도는 생각했는데. 그게 너희 같은 광신도 놈들에게도 적용될 줄은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쉽게 빈틈을 줄 리는 없으니까.’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지만, 사제는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넘쳐흐르는 힘의 유동 속에 강대한 축복을 한 몸에 휘두르면서도 지울 수 없는 불안함.
그 기분 나쁜 감각에 사제는 발악하듯 소리쳤다.
“뭐 하느냐! 당장 저 불신자를 죽ㅇ…….”
아니, 정확히는 소리치려 했다.
“어… 어…? 끄, 끄우에에에엑!!”
그 순간 기혈이 역류하며 울혈이 터져 나오지만 않았다면.
“끄우에에엑!!”
뭐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시, 신성한 은혜의 흐름이… 끄, 끊어졌다?’
장내에 가득하던 마기의 흐름이 일순간 단절되며, 자연스러운 순행을 이어가야 할 내부의 흐름마저 역행해 버렸다.
덕분에 기혈은 진탕되고, 온몸의 혈관이 터져 나오며 바닥으로 거꾸러진 것이다.
“컥… 커허억…….”
물 밖으로 끄집어내진 물고기처럼, 나태의 사제는 자신이 뿜어낸 핏물 속에서 꿈틀거렸다.
“이해할 수 없나?”
그동안 눈앞까지 다가온 당유혼이 이죽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사제는 믿지 못해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어째서, 신성한 은혜의 흐름이… 네게 흐르고 있단 말인가?!’
물론, 그건 핏물이 가득 채운 입 밖으로 터져나가지 못하는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유혼은 사제의 눈빛에 어린 의문을 이해하고는 시선을 마주하며 쪼그려 앉았다.
“중단전이란 깃드는 힘이지. 상위 존재의 힘을 받아들여 이적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 원리. 그건 네놈 마교도들이라 해도 다르지 않아.”
어차피 중단전의 싸움은 받아들이는 존재가 얼마나 상위의 존재인지와 그 힘을 얼마나 세련되게 다루는지를 다투는 기량의 싸움이다.
술자 개인의 역량 따위는 중요치 않기에, 어느 상위 존재를 뒷배로 모시는지가 첫 번째 요소일진대,
“마기(魔氣)라면 나도 다룰 줄 알거든.”
그렇다면 남은 건 두 번째.
누가 더 세련되게 마기를 다룰 수 있냐는 것에서 결판은 나뉠 수밖에 없으니,
‘우, 웃기지 마라……. 더러운… 불신자 따위가… 신성한 축복을 받은… 나보다 더… 이적을 부릴 수… 있다고……?’
“쯧쯧, 눈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만.”
한 가지 오해는 정정하자고.
“딱히 너보다 잘 다루는 건 아냐. 나도 이 더러운 걸 잘 다루고 싶지는 않거든. 다만, 어떻게 해야 네놈들에게 더 엿을 잘 먹일 수 있는지는 알고 있거든.”
무수한 실전 경험에서 쌓인 지식이라고 할까.
“예를 들자면, 어딜 어떻게 끊어줘야 너희의 술식이 파훼되는지 말이다.”
무공으로 따지면 파훼식과 같다.
수백 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앙숙 관계에서는 오히려 상대보다 더욱더 상대의 무공을 파훼하는 법을 잘 알고 있듯, 마교와 죽어라 싸워왔던 나는 어지간한 마교도보다 더욱더 마공을 파훼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만한 도구도 있고.’
천마살(天魔殺).
마공을 익히는 이들에게 작용하는 최악의 독은 장내에 가득한 마기의 흐름을 타고 흘러 들어가 사제의 중단전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자, 이제 끝내자.”
그 말이 들려올 때에야 나태의 사제는 주변에 가득하던 비명 소리조차 사그라들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가호를 받던 청성파의 검수들은 어느새 실 끊어진 괴뢰 인형마냥 우뚝 멈춰 있었고, 자신이 작동시켰던 제단 역시 다시금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안… 돼… 나태의… 성수시여… 도망치… 소서…….’
어떻게든 애절한 비명을 질러보지만,
스윽―
눈가를 뒤덮어오는 손이 완전히 시야를 가렸을 때, 그의 의식은 암전하며 죽음의 구덩이로 떨어져 내렸다.
“…후우.”
운이 좋았다 해야 할지.
‘위험천만한 곳에서 별 모자란 놈을 다 만났네.’
조금이라도 중단전을 이용한 차력전(借力戰)에 능한 이를 만났더라면 위험할 뻔했다.
다만 의아한 것은 한 가지.
‘그런데 왜 사제놈이 혼자 나돌아다니고 있는 거지?’
사제 계급은 마교 내에서도 귀족이라 불릴 만한 놈들이다.
마교도 무인 몇몇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놈들도 제 상태는 아니란 건가?’
알 수 없다.
그러니 알 수 없는 것에는 더 이상 신경을 낭비하지 않고 주변에 있는 녀석들을 훑었다.
“너희는 운 좋을 줄 알아라.”
마기에 절여져 있는 청성의 무인들.
시간이 오래 지났다면 되돌아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겠지만, 지금 당장이라면 희망이 있다.
“탐(貪).”
- 크르르르…….
그림자가 장내에 드리우고, 마기의 흐름을 향해 탐은 아가리를 쩍 벌렸다.
나태의 사제가 발동시켰던 기묘한 장치가 마기가 한쪽으로 흐르게 만들어놨기에 그걸 삼키기만 하면 청성파 무인들에게 흘러들었던 마기도 자연스레 빨려오는 구조였다.
“그르륵…….”
“그륵…….”
물론, 그게 아주 무해할 수 없어 청성파 무인들은 완전히 탈진해 기절했지만,
‘목숨을 구한 게 어디야?’
바닥에 쓰러진 녀석들을 일일이 구할 틈은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은 녀석들도 마찬가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들을 들쳐 메고 밖으로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도망친 마수를 쫓아가 완전히 마무리를 하는 것이었다.
“딱 기다려.”
이 동굴의 끝이 보일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