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맹주(盟主).
그 이름이 주는 유혹에 청원은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그것은 꿀처럼 달콤하되, 독처럼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꿀꺽―
‘…허황된 말.’
다른 경우였다면 자신을 놀린다 화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서신을 보낸 자가 사천성주였다.
‘모르는 일이지. 이 계획이 이 자의 머리에서 나왔든, 다른 누군가에게서 나왔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성주가 동의했다는 것은.’
사천성주가 누구인가. 처음 임관할 때만 하더라도 근본도 없고 세력도 없는 일신의 무위만이 조금 뛰어난 필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난 이십 년간의 시간 사천에 터 잡은 청성, 아미, 점창의 미묘한 신경전을 이용하여 자신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 끝끝내 유일무이한 패자가 된 지장이요, 패왕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런 근거 없고 허황된 계획에 동의했을 리가 없다.’
“허허… 어떻게 말씀이시오?”
물었구만.
애써 관심 없는 척 헛웃음을 흘리지만, 대답의 간격이 미묘하게 느렸다.
‘그래, 너희가 이런 거에 관심이 없겠냐.’
“개요는 이래요.”
담담히 계획의 기본 골자를 설명했다.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필수적인 부분들은 전부 담겨 있었고, 그 정도만 돼도 청원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반적인 사업 개요를 들었을 때,
‘…괴물이군.’
청원은 충격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지 천채적인 무재를 가진 정도라 생각했다. 혹은, 기껏해야 몰락해 가는 가문을 살려내고 사천의 패권을 다툴 경쟁자 정도로.’
그런 이들은 많았다.
만가쟁패의 시대.
제 잘났다고 날뛰는 이들이 한 세대에 이리도 많이 태어날 수 있나 싶은 그런 시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천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놈은 괴물이다.’
어린 나이에 이미 머릿속에서는 천하를 주물럭거릴 귀계가 가득한 괴물!
“…왜 하필, 청성인가?”
그 사실을 받아들인 청원이 조심스레 묻자 당유혼은 씨익 웃으며 답했다.
“간단한 이유죠. 청성이 제일 만만하니까.”
“뭣……?”
끄득―
괴물로 인정한 것과 면전에서 이러한 모욕을 듣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
충천한 노기가 뻗어 나오려 할 때,
“보자. 22년 전, 당가가 운영하던 진가표국주에게 몰래 접근해 뒤통수치게 한 것이 이제 막 장문인의 자리에 오른 당신이었죠? 19년 전, 당가가 운영하던 상단의 경쟁 상대로 속가제자인 안호상회를 등장시켜 가격 경쟁으로 무너트린 것도 있고. 16년 전에는…….”
히히덕거리며 웃는 입에서 과거사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터져 나오려는 분노마저 딱딱히 굳게 만드는 것은, 청원이 사람을 부려 당가를 패망의 길로 이끌었던 역사.
어느 하나 공론화된다면 문파 대 문파의 생사결로 들어가야 할지 모를 일들이 일각 여 간 쉬지도 않고 열거되었다.
“이야, 많기도 하시네. 뭘 얼마나 많이 해 먹었으면 자잘한 건 다 빼먹고도 이렇게 많아요?”
이 정도 분량을 다 외우기도 힘들었다고.
“…….”
“하하, 표정이 너무 굳으셨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이런 거 일일이 하나하나 다 따져서 혈채를 받고자 했다면 용독문건이나 얼마 전인 일 년 전쯤 상행 건부터 따졌겠지.”
참 많이도 해 먹어 왔다.
문파간에 쌓인 채무가 얼마나 많은지, 그나마 정상 참작이 가능한 점이라면 그래도 직접적으로 당가인의 목숨에 위해를 끼치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
“다 이해해요. 무림이란 원래 약육강식. 약하면 물어뜯기는 곳이고, 장문인도 그런 것뿐이잖아요?”
그러니 표정 좀 풀어, 난 다 이해한다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뭐, 그쪽도 마찬가지였다는 거죠.”
“우리 말이오?”
“지난번 상행 습격 건도 청성파가 맡은 일이었고, 이번 사천비무대회도 청성파 쪽에서 맡았다가 대차게 말아먹었죠. 그렇다면 같은 연합인 사천삼주 내부에서 청성의 목소리가 줄어든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큭……!”
아닐 리가 있을까.
청성, 점창, 아미는 결국 한데 뭉친 연합체와 같고, 청성의 실패는 연합체의 전력 약화를 가져온다.
당연 책임론이 빗발침에 따라 청성은 그간 가졌던 이권 몇 개를 계속해서 뱉어내야 했다.
‘사천삼주가 함께 몰락했다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힘을 잃은 것은 청성이었다…….’
그 쓰디쓴 현실에 청원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그대의 말이 옳다. 하나, 그렇다 해서 본관이 그대들의 손을 잡을 것 같나?”
그에,
“잡겠죠.”
당유혼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같잖다는 듯 웃었다.
“익숙하잖아요, 그거.”
우리 엄청 조사 많이 했다니까?
이미 청성의 행보 하나하나를 전부 수집해 와서 약점을 다 찾아낸 지 오래인데, 너희 성격 하나 몰라볼까.
으득…….
그 반응에 청원은 이를 갈았다.
분하고, 수치스러우며, 당장에라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눈앞의 어린놈의 언변이 사정없이 그의 심기를 난도질 한 것은 둘째치고,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구나.’
얼마나 철저히 자료 조사를 해왔는지, 차마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 거죠?”
그런 그에게 뱀의 교언과 같은 속삭임이 귓구멍을 어지럽혔으니,
“크으으……!!”
바들바들 떨리던 두 어깨는 마침내 힘없이 축― 늘어졌다.
거친 세파에 맞서 청성이란 대문파를 이끌며 항상 당당하던 어깨가 지금은 초라한 노인의 그것과 같이 변했으니, 대답은 굳이 들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좋네요. 그럼 자세한 계획은 곧 보낼게요. 아, 그리고.”
생각해 보니 하나 궁금한 게 떠올랐다.
“진혁수. 그놈은 뭐 하고 있어요?”
“…혁수? 적운 말인가?”
거참 더럽게 안 어울리는 이름이네.
불처럼 급한 놈의 도호에 구름 운(雲)이 들어가다니.
“예.”
“그의 근황은 왜 궁금한 것이오?”
“그냥 뭐. 이래저래 도움받은 사이잖아요?”
“…….”
가뜩이나 기분 더러운 상황에 듣기 싫은 이름까지 나오자 청원의 표정은 끝을 모르는 지하로 처박혔다.
그러나 더 이상 길게 얘기 섞기도 싫었기에 툭― 하고 내뱉듯 답했다.
“적운은 폐관 수련 중이오. 지난날 복귀하자마자 스스로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며 참회동에 들어갔소.”
‘참회동? 허허…….’
어디서 구린 냄새가 솔솔 흘러나왔다.
‘그래, 너희가 그럼 그렇지.’
별달리 기대도 안 했기에 실망도 없었다.
이 자리에서 청원을 압박해 그를 빼내는 것도 가능하긴 했지만,
‘내가 거기까지 해줄 의리는 없지?’
인생은 원래 고난의 연속이고, 끊임없는 시련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
‘알아서 빠져나와.’
그 정도 그릇은 되잖아?
* * *
사천성주의 사자로 온 당유혼이 돌아가고, 청원이 그 제안을 수락하며 계획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문학은 곧장 녹림, 대외적으로는 중원을 어지럽히는 산적들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령을 선포했고 무림인들을 대거 기용한다는 포고를 내렸다.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천문학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그들을 사천 땅에 결집시키는 것마저 허락했으니 광형상단과 장강수로상단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간 이 소식은 전 무림인들을 술렁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만약 그가 직접 토벌에 나선다고 했거나, 그 지역이 사천에 국한되었다고 한다면 이 정도까지 파란을 몰고 오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직접 나서지도 않고 사천까지만을 제한으로 두지도 않았으니―
그 포고문의 끄트머리에 적힌 총 책임을 ‘청성’에게 맡긴다라는 문구가 전 무림을 요동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은 특히 사천삼주의 세 문파에게 더 했다.
“장문인. 이게 사실입니까?”
“무량수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요.”
사천삼주, 지금은 그 위명을 대거 상실했지만 아직도 사천 땅에서 힘자랑 꽤나 하는 거두들이 모였다.
사안이 얼마나 급한 지 장로 몇 명 보내는 게 아니라 세 문파의 장문인들이 직접 모여 이루어진 회합은 당연하게도 청원을 갈구는 합공의 장이 되었다.
“관과 무림은 불가침이거늘… 청성의 장문인께서 상행의 이치에 도가 텄음을 익히 알고 있다지만, 지금 무림의 정기를 사천성주에게 매각해 버린 것이오?”
“귀파 청성은 본문과 점창, 이리 셋이서 함께 한 곳임을 아는데… 이 어찌 무도한 행보이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비난이 빗발친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점창파의 장문인 관천사일 도일재와 아미파의 장문인 복호신니는 수십 년 경력을 증명하듯 언변으로 청원을 두들겨 팼다.
당연하게도, 죽을 맛이었다.
‘큭… 무림의 정기를 팔아먹어? 함께하는 곳인데 무도하다?’
그게 네놈들이 할 말이냐?!
누구보다 상리(商利)에 먼저 눈을 뜬 게 점창이요, 청성이 흠을 보일 때마다 그걸 명분 삼아 이권을 뜯어간 게 아미였다.
어떻게 저희가 제일 잘하고, 잘해 온 것으로 자신을 비방할 수 있는지…….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진정 네놈들에게 남은 염치가 존재는 하는지 묻고 싶구나.’
이를 아득아득 갈았다.
사실, 여기 오기 전부터 청원은 잔뜩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장문인, 진심이십니까?!”
“부디 그 말씀을 거둬 주십시오!”
“어찌 청성의 정기가 아직도 건재한데 한낱 관군의 밑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후죽순 일어서며 한마디씩 뱉어대는 장로들의 반발이 첫 번째였다.
청성은 그 장문인인 청원부터가 그렇지만, 다른 무엇보다 정치력으로 그 입지를 다진 곳이었다.
장문인이 흠이 보인다 싶자 개같이 물어뜯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청성의 장로들이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분명 그놈들이 이들에게 말을 흘렸겠지.’
포고령이 난 것은 맞지만, 이들이 움직인 것은 그들보다 한 걸음 빨랐다.
청성의 변화와 앞으로 갈 길에 대해 미리 논하고자 장로들을 불러 모았더니, 그다음 날 이 두 명이서 광견병 걸린 개새끼들마냥 왈왈거려오니 청원으로서는 정신이 나가버릴 지경이었다.
‘…누굴 탓하겠나. 내가 이리 만든 문파인 것을.’
청성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뒷배가 필요하고, 그건 당연히 문파 내부에서만으로 충당할 수 없는 일이다.
최소한 절반이 넘는 이들이 외세와 결탁했을 게 분명하니, 청원은 어째서 당가의 그 시건방지고 머리 새파란 놈이 자신에게 이 제안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당가가 워낙 개판이어서 그렇지, 우리 청성이 그다음이었구나.’
허허허허.
이제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장문인. 진정 실성하셨소?”
“믿기지 않습니다. 어찌 이런 상황에 웃으실 수 있는지…….”
힘들 때 우는 건 삼류.
힘들 때 참는 건 이류.
힘들 때 웃는 건 일류.
…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난 초일류가 되겠다.’
“여러분들의 말씀은 잘 알아들었소이다.”
“진심이십니까?”
“솔직히… 믿기지 않습니다.”
그놈의 믿기지 않는다는 말은 몇 번째인지.
우리 사이에 믿음이 있긴 한 건지, 아니, 애초에 이 말을 꺼내는 내가 멍청한 건지.
오만가지 생각이 청원의 머릿속을 휘적휘적 뒤섞어버렸지만, 청원의 입가에 진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허허허허.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뒤적뒤적―
품에서 꺼낸 문서 하나를 꺼내 들고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그곳에 찍힌 것은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끈따끈한 사천성주의 직인.
“성주님께서 말씀하더이다.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고, 멋대로 산중에 살며, 무도하게 불법 도검 소지의 범법 행위를 저지르는 등 다수의 무력을 지닌 이들은 분명 녹림이라 불리우는 산적의 연합체일 것이라고.”
“…뭐?”
“당신, 지금…….”
산중에 살고,
불법 도검소지에,
다수의 무력을 지닌 것?
엥? 그거 완전…….
“아, 물론 여러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다들 성주님의 말씀을 들으실 것 아닙니까. 아, 물론 그분의 말씀을 이행하는 본도의 의견에도 동참해 주실 것이니 말입니다.”
허허허허.
청원은 정신을 놓아버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