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선견지명은 개뿔.’
한편,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하윤호의 표정은 차갑게 식었다.
‘이게 정경유착이 아니면 뭐가 정경유착이야?’
살다 살다 이렇게 정치력을 잘 써먹는 무림인은 처음 봤다.
소위 명문 정파라 불리는 이들도 역사에 그 이름을 깊이 새기기 위해서는 정치가 기본이라는 건 잘 알지만, 이렇게까지 해 먹는 경우는 단연코 처음이었다.
“어때, 내 솜씨가?”
“아이고! 공자님께는 항상 배웁니다요!!”
물론, 그 속내는 일언반구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지만.
“어찌 이런 귀계와 책략을 자아낼 수 있을는지! 이 하 모는 항시 배움의 자세를 견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요!”
“그려그려, 너도 이번 기회에 많이 해 먹었잖아.”
“흐흐흐, 다 공자님 덕분입니다요!”
결정적으로, 하윤호의 주머니에 채워진 금액도 결코 적은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 이게 다 우리 하오문 사천지부를 위함이지. 암, 그렇고말고.’
당유혼이라는 이 작은 거인이 주도하는 질서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항상 그가 꽂아주는 것은 거부하기에는 너무 큰 액수였다.
“어쨌거나, 많이 해 먹었으면 잘해. 내가 굳이 찾아온 이유는 알고 있겠지?”
“무림맹… 아니, 정천맹 내부에 회선을 만들어 두라는 것 아닙니까요?”
“바로 그거지.”
공식적인 무림맹의 부활도 아니고, 그때에 비해 전력은 채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정파 무림에 그럴듯한 구심점이 생겨났다는 것.
“뭐든 초기 투자가 중요하거든. 미리미리 비선을 만들어 두면 두고두고 쓸모가 있을 거다.”
“준비하고 있습죠!”
척하면 척.
이번 기회는 하윤호 역시 결코 놓칠 생각이 없었다.
“저, 그런데 공자님. 본격적인 회맹 발족은 이 주 뒤라고 들었는데, 공자님도 참석하실 것입니까요?”
“뭐? 내가 미쳤냐? 그 진흙탕에 발은 왜 담가.”
단언하건대, 그곳은 세상 끔찍한 진흙탕이 될 것이다.
‘그딴 곳에도 연꽃이 피어나려면 못해도 한 달은 걸리겠지. 그럼 뭐… 한 두 달 뒤쯤에나 갈까?’
그쯤이면 대충 정리되어 있겠지.
* * *
그렇게 이 주가 흘렀다.
누군가에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이 흘러가고, 사람들은 진정 정천맹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저마다 희망을 가졌다.
만가쟁패.
강자에게는 기회의 시대요, 약자에게는 고난의 행군인 이 시대가 저물 희망의 발판이 되지는 않을까?
비록 시작은 미약할지 언즉, 그 끝이 창대하길 바라는 양민들의 염원을 담은 목소리가 나날이 사천성을 채워 갔으니,
“희망 같은 소리하고 있군.”
성도에서 들려오는 풍문을 들은 청원은 썩어 문드러진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현실은 이다지도 끔찍한 것을.”
근 한 달여 간.
당유혼의 제안을 수락한 뒤 청원이 보낸 시간은 그야말로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사사건건 부딪치지 않는 건이 없구나.’
인사, 기획, 홍보, 재무, 총무, 물류, 법무, 보안 등등…….
맹(盟)이라는 거대한 연합체가 결성되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요소요소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그 건을 해결하기 위해 청원은 나날이 늙어갔고, 지금처럼 혼자 남은 시간 동안 넉두리만 늘어났다.
“삼주 때는 그나마 셋이었지. 지금은 목소리 큰 이들이 열이 넘는구나.”
정천맹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은 무림인들과 집단을 끌어모았다.
정말 많은 지역에서 정천맹에 합류했고, 아주 당연하게도 그들은 저들끼리 편을 갈랐다.
“원래는 입도 못 열 것들이… 자신의 처지를 알고 똘똘 뭉치는 모습이란…….”
정작 단독 발언권을 가진 이들은 체면과 위신을 지키기 위함인지 함부로 입을 열거나 하지 않았는데, 꼭 애매한 것들이 가만히 있으면 자신들에게 주어질 이권이 줄어들까 설쳐댔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청원의 상황은 더더욱 열악해졌다.
맹주에 대한 존중?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나.’
사천성주의 지원?
‘그나마 그게 있어서 이 자리나마 지키는 것이겠지.’
정천맹의 현판을 올린 이 장원만 해도 당유혼이 기다렸다는 듯 땅문서를 들고 오며 제공하지 않았다면 쉽사리 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무슨 이렇게 거대한 장원을 떠넘기나 싶었지만, 이후에 몰려온 이들의 숫자를 보면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그 외에도 사천성주의 이름으로 제공된 각종 편의와 장강수로상단을 통해 들어온 물자 지원은 아득한 수준이라, 새삼 사천당가가 자신들의 목 밑까지 따라왔음을 확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하나 그런 위협을 느끼기에는 청성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본격적인 개파 대회가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고작해야 현판을 걸어 올렸을 뿐인데도 청성의 전 인력은 정천맹의 유지에 투입되어야 했다.
“부탁이니, 여기서 그들까지 난리를 피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사천을 삼분하던 패주는 온데간데없고, 다 늙어버린 도인만이 남아 한숨을 내쉬는 시기.
그렇다면, 그 근심 어린 걱정을 받고 있는 사천당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한다면,
“와, 신기하다. 사천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네.”
“그러게. 사천이 대도시라고는 해도, 그래도 중원 기준으로는 서쪽 변방에 밀려 있다고 들었는데.”
“엥? 서쪽은 저기 곤륜파 같은 애들이 있는 청해나 감숙 아닌가?”
“거긴 아예 논외지.”
그들은 마냥 쏟아지는 인파가 신기한 지 두 눈 동그랗게 뜬 채 입에 당과나 물고 있었다.
물론, 전부가 그들처럼 순수하게 감탄만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에라이, 멍청이들아. 너희는 느끼는 게 그게 끝이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몰?루”
나는 생각이 없다―라는 표정으로 하나같이 양손에 닭꼬치나 쥐고 있는 형제들을 보며 몇몇 방계들은 통탄을 금치 못했다.
“이놈들아. 우리는 당가의 상징이다. 예전처럼 당가에 있는 인원이라고는 우리가 끝일 때고, 현판도 반쪽 나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될 때는 몰라도. 인구도 늘고 사천을 대표하는 문파가 되었으니 좀 바뀌어야 할 것 아니야?”
그들은 이러한 의견을 피력했지만,
“뭔 소리야? 그럼 적석촌이나 율도촌 사람들은 뭔데?”
“맞아. 우리도 방계고 그쪽도 당가 사람인데, 그분들은 차별해?”
“우우우, 차별주의자 물러가라!”
돌아오는 것은 몰매뿐이었다.
“큭!! 이 자식들아!! 암만 그래도 우리가 독과 암기의 상징인 사천당가인데, 양손에 꼬치구이만 들고 있는 건 좀 아니잖아!!”
“꼬치가 뭐? 우리 대형은 젓가락도 던지는데.”
“나도 대형이 제대로 된 암기 던지는 게 더 희귀하다고 생각하는걸?”
그건 아무래도 가문의 우두머리인 당유혼부터가 권위 의식 따위는 땅바닥에 처박은 사람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원래 끼리끼리 논다고, 당유혼의 물이 제대로 든 방계들은 굳이 피곤하게 어깨에 힘주고 다닐 필요가 있냐는 게 전반적인 의식 수준이었다.
게다가,
“어쭈? 힘 안 빼?”
자꾸만 형제들이 귀찮게 하자 짜증 난 방계 하나가 쪼르르 당유혼에게 달려가 일러바치자,
“아, 아니 그래도 대형! 저희가 사천을 대표하는…….”
“아 그래서 빼기 싫으시다? 내가 빼줘?”
“…빼겠습니다.”
안 빼면 그냥 관절을 뽑아버리겠다는 이글이글거리는 눈빛에 큰 꿈을 품고 있던 이들은 단번에 진압되어 버렸다.
“알아둬라. 무림에선 뻣뻣한 놈들이 제일 먼저 부러지는 거야. 괜히 쓰잘데기없는 것에 힘 빼지 마.”
안 그래도 곧 힘쓸 일 넘칠 테니까.
당유혼의 일갈 아래 어설프게 뭔가를 해보려는 이들은 시무룩해진 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당유혼은 피식 웃었다.
“으휴, 귀여운 녀석들. 그래, 어릴 땐 다 그런 거지.”
이팔청춘이 별것인가?
힘이 생기고 없던 게 생기면 자랑해 보고 싶고 휘둘러보고 싶은 법이다.
검객이 보검을 얻었는데 휘둘러보고 싶지 않다면 그게 정상일까?
하지만,
‘검 자랑하는 놈들은 그 검에 찔려 죽는 거고, 힘 자랑하는 놈들은 단명하는 거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면 골로 가게 되는 것이 무인의 인생.
그리고, 그런 놈들이 잔뜩 몰려있는 게 지금의 사천이었다.
* * *
“…젠장!”
백학검객 장산해.
섬서 지방에서는 백 대 고수 안에 든다는 그는 국밥을 입에 퍼넣다 말고 욕지거리를 뱉었다.
‘왜 이렇게 매워?’
사천이 향신료가 강하다는 것 정도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입에 쑤셔 넣는 것은 더더욱 먹기가 역했다.
아니, 사실 그가 이리 인상을 찡그리는 것은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정천맹. 우리 백학문을 이리도 냉대해?”
그는 섬서 백 대 고수임과 동시에 백학문을 이끄는 문주이기도 했다. 녹림의 산적들을 토벌하고 백학문의 명성을 드높인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문도들과 함께 정천맹에 입맹했지만, 의를 드높이고 협행을 실천하기 위해 찾아온 그들에게 정천맹이 해준 것은 실로 초라했다.
‘뭐? 빈 객실이 없어서 외부 숙소에 알아서들 짐을 풀라고? 거기다, 제대로 어딘가에 배치해 줄 곳도 아직 미정이라고?’
정천맹의 발족 소식에 곧바로 짐을 싸 들고 찾아온 게 무려 이 주 전이다.
이곳 사천 땅에 도착하고도 이 주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정천맹 문턱도 넘지 못한 게 현실이니 그의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건 당연한 현실이기도 했다.
섬서에서 백 대 고수라고들 하지만, 그건 백학문에서 열심히 밀어붙이는 명성일 뿐이요, 정천맹 입장에선 그냥 절정 무인 하나가 왔구나… 정도로 인명록에 기재할 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밤낮 수련에 매진하여 이룬 경지도, 정천맹 입장에선 차고 넘치는 무인 명부에 기재될 한 줄에 불과하다고 할까?
물론, 당사자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기에 그저 애꿎은 데 화풀이를 할 뿐이었고, 점점 쌓이다 못해 한계치를 넘어선 분노는 괜히 만리타향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에서 폭발해 버렸다.
“주방장 나와! 이딴 걸 음식이라고 가져왔냐!!”
쿠당탕―
그릇과 내용물이 함께 바닥에 쏟아지고, 탁자가 소란스레 뒤집혔다.
식사하고 있던 손님들이 움찔 몸을 떨고, 바쁘게 움직이던 점소이가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그래, 이거지.’
그들의 경외 어린 시선이 쏠리자 그제야 백학검객 장산해는 마음속 한편에 위안이 서리는 걸 느꼈다.
정천맹에서 그는 찬밥 신세를 받지만, 그가 있던 지역에서는 항상 이런 시선을 받고 살아왔으니까!
그때,
“그럼 음식이지. 네놈 같은 돼지새끼 입에 들어갈 여물이겠느냐?”
누군가 그의 상쾌한 기분에 똥물을 퍼부었다.
“뭐? 감히 어떤 놈이… 응? 네 녀석은?!”
발작하듯 돌아보던 장산해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패왕권, 구일엽!!”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장산해의 백학검문과 함께 섬서 땅에서 자웅을 겨루던 패왕보의 보주, 패왕권 구일엽이었기 때문이다.
“먼 땅에서 웬 돼지 우는 소리가 들리는가 했더니, 학인 척하는 돼지새끼가 여기 있었구나.”
참고로 백학검객 장산해는 그 별호와 달리 무척이나 비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평소 경쟁자이던 패왕보에서 놀림거리로 삼던 그 별명을 여기서도 듣게 되자 장산해는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렸다.
“구일엽, 네가 아주 미쳐버렸구나. 이곳 사천 땅에서는 네가 그렇게 꼬리 만 개처럼 머리를 비벼대는 종남파도 없는데 어찌 이리도 깝죽대느냐!”
“크크크, 뭐라는 거냐 돼지놈이!”
“이놈이? 진정 시시비비를 가려보자는 것이냐?”
“글쎄. 돼지가 어떻게 우는지를 오늘 사천 땅에 널리 알려주고자 한다면 덤비거라.”
자칭 정파라는 두 명이지만, 그 누구도 이 국밥집 주인에 대한 염려는 없었다.
그들이 내뿜는 기세가 도저히 식사를 온전히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식사하던 손님들이 전부 도망쳐 나가기 시작했을 때,
“어이.”
그 기류 사이를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으니,
“너희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이빨에 낀 고기 조각을 나뭇가지로 쑤시며 나선 사내가 손을 휘휘 저었다.
한참 서로를 향해 적의를 피워올리다 개무시를 당한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그 사내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어디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네놈은 누구냐!!”
“허 참, 그 소리를 우리 대형이 들었으면 너희는 오늘 여기서 묫자리를 알아봤어야 했을 텐데…….”
그 외침에 자기도 이런 말을 듣게 될지 몰랐다는 표정을 지은 사내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답했다.
“당불퇴 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