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잡룡단.
그들은 등장과 동시에 빠르게 사천 전역에서 일어나는 난리에 끼어들어 소란을 진압했다.
한창 불만이 폭발하는 타 지역 문파들이 사건을 만들고 있었기에, 그들을 진압하는 잡룡단의 이름도 빠르게 퍼져 갔다.
그리고 그 소식은 청원의 귀에도 들어갔다.
“잡룡단? 내버려 둬라.”
정천맹이 사천에 자리 잡은 이상, 원래라면 사천의 치안은 정천맹의 역할이 되어야 했다.
그렇기에 당가에서 잡룡단이라는 이름으로 대신 치안을 정리해 주는 것은 작게 보면 자존심을 긁는 것이요, 크게 보면 영역권에 대한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원래의 청원이라면 먼저 나서서 문파 대 문파의 항의를 걸었을 인물이지만,
‘지금은 그놈들의 도움이라도 필요한 실정이니…….’
이미 많은 것을 내려놓은 청원이었다.
자존심?
그딴 것은 약 삼 주 전쯤 전량 매도한 것도 같았다.
‘끌어다 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끌어다 쓴다.’
실제로도 지금의 청원은 그가 장문인의 자리에 오른 이래 그 어떤 시기보다 압도적인 물자를 끌어다 쓰고 있었다.
청성의 전성기에도 쉽지 않았던 물류의 흐름이 그 자신의 턱짓 한 번에 휙휙 바뀌는 권능을 오롯이 느끼는 중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냐면,
‘흐흐, 좋을 수가 있겠는가.’
일단, 가장 문제는 인력난이었다.
정천맹의 발족 사실이 무림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그 위세가 생각보다 더욱 대단하자 지금도 실시간으로 입맹하겠다고 찾아오는 무인들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부지가 마련되는 대로 인원들을 수용하고, 끊임없이 건물들을 확충시켜 사람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한참 부족했다.
이게 어디 동네 식당도 아니고, 정천맹쯤 되는 연합체의 본단이 되려면 적재적소에 사용인들도 계속해서 배치해야 했다.
그나마 검증된 사용인을 구하기도 빠듯할 정도이니, 장원을 지키는 이들은 전부 청성의 무인들로 돌려야 했고, 그를 위해 속가 문파들의 인원도 끌어들여 겨우 머릿수를 충당시켰지만 그마저도 쉬운 게 아니었다.
‘빌어먹을 놈들. 네놈들이 부리는 소란을 진정시키고, 또 네놈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청성의 무인들이 밤새도록 고생하는데, 그걸로 부당 이득을 취하려는 게 아니냐고?’
인사 배치가 아무리 예민하다지만 뭔가 하나를 할 때마다 이 집단 저 집단에 불려 가서 해명을 해야 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진정 이놈들은 정파라는 거죽을 뒤집어쓴 승냥이 무리가 따로 없구나.’
그런 면에서 당가의 잡룡단인지 뭔지 하는 놈들은 아니꼽긴 했지만 딱 한 가지는 좋았다.
바로, 소란을 만드는 놈들은 평등하게 쥐어패 준다는 것.
‘꼭 대단치도 않은 놈들이 문제를 일으켜서 기분이 더러웠는데…….’
그런 자리마다 잡룡단원들이 귀신같이 나타나 녀석들을 쥐어패 주니 묵은 체증이 싹 가라앉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래, 너희들은 그렇게 시간만 끌어줘라.’
청원은 그리 생각하며 다음 책자를 펼쳤다.
사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쭉정이들이 아니었으니까.
“곧, 사신단의 배정이 완료된다.”
사신단(四神團).
이들이야말로 정천맹이 창설된 이유이며, 녹림을 토벌할 네 개의 보검이었으니,
각 지역의 백 대 고수니 뭐니 하며 잡스러운 것들이 난리를 부리며 소란을 일으키는 동안에도 ‘진짜’라 할 수 있는 대문파들이 지금껏 무거운 엉덩이를 자리에 붙이고 앉아 있는 이유였다.
“실로… 힘들었다.”
정파란 참으로 희한한 족속들이다.
사파는 그래도 힘 센 놈들이 다 가진다는 단순명료한 논리가 존재하지만, 이놈의 정파는 배분, 체명, 명예, 위신 등이 복잡하게 엮여 있다.
정천맹을 대표할 무력단의 단주라면 분명 가진 힘이 막강할 테지만, 거기에 대문파의 장로를 역임시키자면 다들 발을 뺀다.
‘그놈의 체면과 위신이 상한다고 말이지.’
어찌 이 나이에 발로 뛰냐며 학을 떼는 그들에게는 적당한 감투를 대신하여 씌워줘야 했다.
정천맹의 장로 자리가 바로 그러했다.
‘그럼 결국 단주는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버금갈 정도 되는 방파의 어느 경험 많은 이를 앉히게 되어 있지.’
그렇게 되면 그 휘하에 대주 급에 대문파 신집 고수들이 배정받게 되는데, 당연하게도 이 과정이 무지하게 어려웠다.
‘아미, 점창과의 관계는 이미 틀어졌다. 하지만, 그들과 무한히 반목할 게 아니면 그들에게도 적당한 감투를 얹혀 줘야겠지.’
무림에는 원래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는 격언이 존재했고 청원 역시 어느 정도 동감하는 바였다.
그렇지 않다면 사천성주와 손잡고 나머지 사천삼주를 쥐어패는 지금의 현실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우선 아미와 점창이 적당히 타협 본 인력에게 단 하나를 맡기도, 오대 세가였던 이들에게 또 한 자리를 맡기고, 그다음은 어느 정도 세력을 일군 중소방파에게 한 자리를 맡겨야겠지.’
너희끼리 다 해 먹는다는 소리를 듣기 싫으니 마지막 자리에는 낭인 출신의 무인들을 배치시켰다.
이렇게 하니 각 단급에는 총 다섯 개의 대대가 존재하게 되었고, 그 대대를 맡게 될 대주들의 서열을 매기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다행이라 해야 할지, 예로부터 무림에는 이런 경우에 항상 효과적인 방법이 존재했다.
“이제, 슬슬 후기지수 대회를 시작해 볼까.”
그것은 바로 후기지수 대회.
정천맹의 개파 대회에 그 자리를 빛낼 꽃이자, 세상 사람들에게 정천맹의 힘을 알릴 수단이었다.
‘명문이 어째서 명문인가?’
한 세대 반짝하고 끝날 사파의 문파와 달리 명문 정파라 함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그 미래가 환히 보이기 때문에 명문이었다.
후기지수란 훗날 미래의 강함이기도 함과 동시에, 그 어린 나이에 이 정도의 무위를 쌓게 할 집단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따라서, 후기지수 대회는 청원이 밤낮 침식을 거르며 지금껏 준비해온 비장의 한 수였다.
그것이 곧 다가옴을 느끼자 청원은 북받치는 무언가 속에서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당가 놈들. 그래도, 지원 하나는 확실히 해주는구나.”
그 대회를 열기 위해 당가에게 받은 재정적 지원이 어마어마했다.
물론 그 포상 내역이야 사천성주가 후원한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들이 결국 어디서 왔는지는 뻔했다.
‘우승자에게 줄 보검과 영약들의 수준이… 우리 청성이었다면 진작 곳간을 헐어서야 마련할 수준이구나.’
청성 역시 구대문파의 일좌로서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부(富)를 가졌다 생각하지만, 장강수로상단을 통해 전 중원 대륙의 값진 물건을 끌어오는 당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물건들을 보자니 청원 역시 욕심이 생겨났다.
‘이것들을 우리 청성에서 타 내올 수 있다면…….’
얼마나 화끈하게 지원해 줬는지, 굳이 우승자나 준우승자뿐 아니라, 본선 진출만 하더라도 영약들이 쏟아졌다.
그렇다면 대회 진행자로서 아주 조금의 편의를 챙길 수는 있는 노릇 아닌가?
‘예를 들어, 대진 순서를 어느 정도 바꾼다면…….’
조금이라도 더 사문을 부강하게 하기 위하여, 누구를 출진시킬지 머릿속에서 인명부를 하나하나 떠올려 나갔다.
그때,
“장문인. 본문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집무실 밖에 있던 이가 소식 하나를 알려왔다.
“적운자가 깨어났다고 합니다.”
* * *
몽롱한 기분이었다.
꿈을 꾸는 듯 흐릿했으나, 그 안에서 그려낸 검의 궤적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오로지 그 궤적을 쫓아 춤추듯 움직였고, 그 속에서 진혁수는 타는 듯한 갈증에 허덕여야 했다.
- 일어났냐?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혼몽(昏懜)을 한참이나 헤메다가였다.
그제야 자신이 어떤 술수에 당했는지를 깨달은 진혁수는 우선은 사건의 뒤처리부터 해결해야 했다.
쌓인 빚도 있거니와, 어린 제자들을 구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문제들을 전부 해결하곤 곧장 폐관 수련을 위해 참회동에 처박혔다.
그의 복귀에 대해 입 아프게 떠드는 이들이 많았지만, 하루 이틀 일도 아닐뿐더러 당시의 진혁수에게는 그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궤적을, 재현해야 한다.’
아직도 꿈꾸듯 흐릿하지만,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그때 그렸던 검로를 재현하기 위해 참회동에 처박힌 진혁수는 근 한 달의 시간 동안 밥 먹는 것도 잊고 미친 듯이 검만 휘둘렀다.
그럴수록 그의 검은 점점 꿈에 그리던 궤적에 가까워져 갔지만,
“…아.”
점점 더 선명해진 사실은, 아직까지 자신은 그 궤적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
여기까지가 한계라는 것을 깨달았고, 진정 얻어야 할 심득은 이 공동 내부에서 검만 휘두른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님을 직감했다.
‘상대가 필요하다.’
누구라도 좋았다.
일대 제자 누구라도 좋으니 검을 섞을 상대를 필요로 했고, 곧장 참회동을 뛰쳐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본 청성산 내부는,
“…다, 어디 간 거지?”
실로 황량하기 그지없었으니,
“정천맹?”
지나가던 삼대 제자 하나를 잡고 물어보니, 참, 세상이 많이도 바뀌어 있더란다.
“…또 무언가를 하고 계시군.”
청성의 장문인 청원자가 툭 하면 무슨 일을 꾸며댄다는 것은 이제 신기하지도 않다.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뿐, 청성을 드높이기 위해 밥 먹듯이 수작질을 부리는 게 청원자였기에 진혁수는 인상을 조금 찌푸릴 뿐 자기 할 일을 하려 했다.
삼대 제자 하나가 지나가듯이 툭 던진 말만 아니었으면,
“후기지수 비무대회?”
“그렇습니다! 무려 오대세가 출신의 이들도 참석하고, 사천삼주 외에도 다른 구파일방의 무인들도 대거 참석한다고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원 중부 지역의 이름난 다른 문파들의 후기지수들도…….”
기대된다는 듯 조잘거리는 삼대 제자의 말을 듣는 순간 진혁수는 심장이 빨리 뛰는 걸 느꼈다.
‘이거다.’
단지 강한 상대를 원했다면 곧장 당가로 쳐들어가면 될 일이다.
그들에게 빚진 게 있지만, 이번 일을 그들의 입맛대로 처리해 줬으니까 빚 하나 더 달아두는 셈 치고 검을 섞어달라 할 수 있으니.
하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드높은 길이 아니라 수십 갈래의 다양한 길이었다.
“정천맹의 위치가 어디라고?”
그 길로 진혁수는 곧장 청성산을 내려갔다.
정천맹이 생겨나기도 전에 폐관 수련을 들어갔던 진혁수지만, 사천성도 내 전부가 정천맹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으니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도 않았다.
그렇게, 정천맹을 찾아가 맹주이자 청성의 장문인인 청원을 찾아간 진혁수는 곧장 입을 열었다.
“저를 비무대회에 참가시켜 주십시오.”
‘…이놈이?’
갑작스러웠다.
원래부터 진혁수가 자신을 사문의 존장이라기보단 경쟁 상대 정도로 본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경우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의 청원은 정천맹에 들어온 온갖 문파들의 정치전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상태.
“못 들은 걸로 하마.”
예전이라면 빙빙 돌려서 할 말도 지금은 단칼에 내뱉어버렸다.
“어째서입니까? 이번 비무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둘수록 청성에 좋은 일이 아닙니까?”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보다 더 나은 후보는 없을 것이라는 뜻.
진혁수 역시 심득에 반쯤 미쳐 있는 생각이었기에 원래부터 관계가 좋지 않던 둘은 뒤 없이 막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둘의 신경전이 시작되려 할 때,
“자, 잠깐! 이곳은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갑자기 집무실 밖에서 소란이 일더니,
벌컥―
맹주전의 문이 대낮의 국밥집마냥 열려 젖혀졌고,
“안녕하세요, 맹주님!”
안으로 들어선 당유혼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